메뉴 건너뛰기

close

수유리에는 한신대 신학대학원이 있다. 한신대 정문 앞 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면 화계사가 나온다. 두 곳은 단지 신학대와 사찰 그 이상의 한국 개신교와 불교를 대표하는 장소다.

한신대는 한국 개신교의 한 축인 '기장'의 본산이고, 화계사는 과거 조선왕가의 원찰로서, 근래에는 숭산스님과 그 제자 외국인 스님들의 수행처로서 한국불교의 국제적 위상을 상징했던 절이다.

그런 두 곳이 불과 10분 거리에 이웃하고 있다. 혹 갈등이 있지는 않을까 걱정된다면, 기우다. 매년 석가탄신일과 성탄절에 서로의 기념일을 축하하는 현수막을 걸 정도로 매우 돈독하다. 심지어 석가탄신일에는, 한신대가 화계사 불자들을 위해 학교 운동장을 주차장으로 빌려주기까지 한다. 

민주화운동의 메카

이웃인 화계사와 한신대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는 점이다.

85년 결성한 민중불교운동엽합은 여익구 의장을 중심으로 그해 8월 31일 불교 명절인 우란분재를 맞아 화계사에서 일명 '생명해방의 대축제'를 준비한다. 불교에서 우란분재는 지옥에 떨어진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한 천도재를 지내는 날이다.

여익구 의장은 이 날을 통해 당시 지옥 같던 전두환 정권에 맞서 민중해방, 생명해방을 선언하려 했다. 이를 위해 범패 전문가이자 민불련 문화부장이었던 인묵스님이 공연을 준비했고, 민중문화운동협의회 기회국장 김봉준은 정권을 비판하는 탱화를 그리는 등 만전의 대비를 했다.

그러나 사전에 낌새를 차린 경찰에 의해 화계사 입구는 봉쇄됐고, 행사를 막으려는 경찰과 들어가려는 스님과 신도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비록 행사는 경찰의 방해로 무마됐으나, 이제 막 결성한 민불련의 존재를 알리고, 불교계의 이름으로 독재정권을 규탄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한편 박정희 정권부터 한신대는 설립자인 장공 김재준 목사와 문익환 목사, 안병무 교수 등이 주축이 된 민중신학, 기독교 민주화운동의 메카의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김재준 목사는 삼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위원장,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대표위원을 맡는 등 함석헌 선생 등과 함께 반독재투쟁에 선두에 섰다.

학생들도 교수에 뒤지지 않았다. 한 학년 정원이 50명인 작은 학교였지만, 한신대에서만 긴급조치 9호 위반자가 20명이 나올 정도로 학생들은 투쟁에 적극적이었다. 한신대 앞 여관이 한신대 교수와 학생을 감시하려는 형사들의 24시간 잠복 거처로 쓰일 정도였다.

화계사, 그 날의 흔적은 없지만

화계사 대웅전
 화계사 대웅전
ⓒ 신영수

관련사진보기


화계사 대웅전 측면에서 찍은 필자와 친구들(오른쪽 필자)
 화계사 대웅전 측면에서 찍은 필자와 친구들(오른쪽 필자)
ⓒ 신영수

관련사진보기


"중생이 아프니 부처가 아프다" (유마경)

우리는 그 시절의 흔적을 찾고자 수유동에 갔다. 먼저 화계사에 갔다. 산사에는 의외로 사람이 많았다.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러 온 사람들, 법회에 온 불자들, 또 불교대학 강의를 수강하러 온 주민들도 있었다.

종무소에 들어가 화계사의 역사에 대해 알고 싶어 찾아왔다고 말씀드렸다. 종무소 사무장님이 나와 반갑게 맞아주셨다. 85년 화계사에서 열렸던 생명해방의 대축제를 비롯해, 민불련과 여익구 의장에 대해 여쭸으나, 아는 바가 없다며 미안해 하셨다. 삼십년도 더 흘렀으니 어쩌면 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민주화 이후의 화계사의 사회활동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몇 년 전 화계사 주지를 맡았던 수경스님은 도법스님과 더불어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사회참여 선승으로 꼽힌다. 수경스님은 불교환경연대 대표를 맡아 4대강 반대 등 환경운동에 앞장섰다.

당시에 화계사 신도들도 주지 수경스님을 따라, 오체투지, 삼보일배 등 환경운동에 많이 참여했다고 말씀해주셨다. 사무장님에 따르면, 알려진 명성만큼이나 스님은 신도들에게 모범이 되는 분이셨다고 한다.

비록 생명평화의 대축제를 기억하는 이도, 이를 기념하는 기념비도 없었지만, 그 본의와 실천만큼은 줄곧 화계사에 이어져 계승되고 있는 것 같았다.

한신대, 김재준과 문익환이 걷던 길

한신대 장공기념관 벽에 걸려있는 예수 그림
 한신대 장공기념관 벽에 걸려있는 예수 그림
ⓒ 신영수

관련사진보기


한신대 신학대학원 장공기념관에 걸린 장공 김재준 목사의 글씨. '생명', '평화', '정의'.
 한신대 신학대학원 장공기념관에 걸린 장공 김재준 목사의 글씨. '생명', '평화', '정의'.
ⓒ 신영수

관련사진보기


"이웃의 고통을 아파하는 게 하나님의 마음이다" (출애굽기)

화계사에서 터벅터벅 10분 정도 걸어 내려오니, 한신대가 보였다. 운동장을 옆에 끼고 언덕을 올라가니, 푸른빛의 캠퍼스가 펼쳐졌다. 푸른 잔디와 새로 단장한 듯한 신축 건물들이 제법 어울렸다.

한신대에는 장공도서관과 장공기념관이 있었다. 장공은 대학 설립자인 김재준 목사의 호다. 장공기념관에 들어서니 한 면 가득 걸린 예수 걸개그림이 눈에 띄었다. 사람들의 고통을 걸머진 고난의 모습, 그러나 한편으로는 왠지 모를 평화가 느껴지는 예수의 형상이 한신대의 역사와 퍽 어울렸다.

장공기념관 2층에는 장공기념실이 있었다. 김재준 목사의 흉상과 생전 말씀, 사진 등이 전시돼 있었다. 한신대 본교가 오산으로 이전된 탓에, 장공도서관에는 많은 장서가 있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죽음을 열사들의 죽음에 빗대 화제가 됐던 이현주 목사의 <예수의 죽음> 초판본 등 일반 도서관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민중신학 서적들을 다수 보관하고 있었다.

또 캠퍼스 중앙에는 문익환 목사 시비가 있었는데, 흔한 비석 모양의 시비가 아닌 누워져있는 모양의 시비가 특이했다. 장공 김재준, 늦봄 문익환, 안병무, 도올 김용옥, 그리고 이름 모를 숱한 신학도들이 시대정신을 고민하며 거닐었을 길이라 생각하니, 마음 한켠이 무거웠다. 

이렇듯 암울했던 독재 시절에는 종교인들도 산사와 교회에만 머물지 않았다. 이웃의 고통을 내 고통처럼 아파하며, 자유와 진리를 위해 싸웠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예불과 예배 이상의 그 자체로서 구도요, 신앙의 길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화계사와 한신대가 갈등 없이 돈독한 이웃으로 지낼 수 있는 것도, 어쩌면 교리의 차이를 넘어서는 실천의 투쟁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덧붙이는 글 |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주최한 민주화운동 대학생 탐방에 선정돼, 친구들과 함께 2박3일간 민주화운동 관련 현장을 탐방했습니다. 그중 몇 곳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태그:#여익구, #민불련, #화계사, #한신대, #김재준 목사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