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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며

박근혜가 탄핵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역행하던 민주주의가 순행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민주주의가 역행과 순행을 오락가락한다면, 그것은 정상국가라고 보기 힘들지 않을까요. 민주주의가 흔들리지 않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현재의 이른바 '87년 체제'를 출범시킨 것은 '6월 항쟁'입니다.

그리고 6월 항쟁을 위해 자기 삶을 바친 많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열혈투사들이 모였던 곳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약칭 민청련)이었습니다. 이글은 민청련에 젊음을 바친 수많은 – 일부는 정치인으로서 유명인사가 됐고, 다수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투사로 남은 – 청년들의 활동에 대한 기록입니다.   

오늘 우리 민청련동지회가 민청련의 역사를 쓰고자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던 지난 시기의 노력들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과거를 기억하고 공유하는 일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다시는 후퇴하지 못하도록 하는 중요한 버팀목이 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민청련이 창립되던 날 - 민주의 봄을 기다리며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심복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궁정동에서 만찬 도중 박정희를 저격하여 숨지게 함으로써 길었던 18년 유신체제가 무너졌다. 우리가 맞이한 1980년 봄은 바로 무너진 그 자리에 어떤 사회를 건설할 것인가를 놓고 부푼 기대와 젊음의 열정이 들끓었던 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1980년 봄을 '서울의 봄'이라 부른다.

냉혹한 군사독재로 얼어붙었던 동토에 민주주의의 새잎이 돋아나 온통 푸른 봄의 세상으로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신의 심장에 총을 쏘았던 김재규는 곧바로 반란 수괴로 감옥에 갇혔고, 박정희의 후예 신군부 소장파 장교들이 12.12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했다. 앞서 11월 24일에 민주화운동 세력은 유신체제에서와 같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통대선출저지국민대회'를 열었다가 계엄사 군인들에게 짓밟히고 대회는 무산됐다. 그러나 우리는 그럼에도 '서울의 봄'이 오는 것은 자연순환의 이치처럼 자명한 것으로 믿었다.

1980년 3월 6일, 잔설이 남아 있는 초봄, 육군형무소에서 김재규의 비서실장 박흥주 대령이 총살로 처형됐다. 그래도 우리는 봄이 오는 것은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5월 15일.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온 대학생 5만여 명이 서울역 광장에서 계엄해제를 외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을 때 "봄은 바로 옆, 문밖까지 와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김영삼, 김대중 양 김씨와 재야 지도자들도, 정치의 봄이 오고 있다고, 그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1980년 5월 15일 대학생들이 계엄해제를 외치며 각 학교마다 교문을 뚫고 서울역으로 집결했다. 총집결한 그 날 ‘서울의 봄’ 시위는 그 절정에 이르렀다.
 1980년 5월 15일 대학생들이 계엄해제를 외치며 각 학교마다 교문을 뚫고 서울역으로 집결했다. 총집결한 그 날 ‘서울의 봄’ 시위는 그 절정에 이르렀다.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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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가 바라던 봄의 세상은 오지 않았다. 신군부의 쿠데타와 광주학살로 민주주의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서울의 봄'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신군부의 독재에 저항한 광주 시민 수백 명이 광주항쟁 과정에서 계엄군의 총칼에 희생되었고, 그 기간 중에 김재규와 그의 부하 4명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다시 이 땅은 유신독재의 후예들에 의해 점령되었고, 긴 독재의 겨울이 왔다.

그러나 기나긴 유신독재가 막을 내린 후에 우리 앞에 잠시 나타났다 사라졌던 '서울의 봄'은 단지 한바탕 꿈은 아니었다. 지리산 철쭉꽃이 피어나는 5월이 다시 돌아올 때마다 우리 가슴 속에 '서울의 봄'은 다시 생생한 모습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의 꿈이었고, 만주에서 굶주림 속에 조국해방의 일념으로 일제와 싸웠던 독립용사들의 꿈이었다.

무명 순국열사묘역에서 결의를 다지다

광주항쟁이 좌절된 지 3년여의 세월이 지난 1983년 9월 29일 아침. 수유리 4·19묘지 뒷산 순국열사묘역에 있는 독립군 무명용사묘 앞에 일군의 청년들이 모였다. 바로 다음 날인 30일에 있을 민청련 창립대회를 앞두고 민청련 집행부가 될 내정자들이었다.

 수유리 4·19묘지 부근 북한산 둘레길에 위치한 무명순국열사묘역 안내판
 수유리 4·19묘지 부근 북한산 둘레길에 위치한 무명순국열사묘역 안내판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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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상한 학자풍 얼굴의 김근태 의장 내정자를 비롯해, 뿔테 안경에 장발의 투사형 장영달 부의장 내정자, 이마가 넓은 미남형 박계동 홍보부장 내정자, 다부진 체구에 걸음이 빠른 박우섭 총무부장 내정자, 준수한 외모에 귀공자 타입의 홍성엽 재정부장 내정자, 순발력 있고 재치가 많은 연성수 사회부장 내정자가 한자리에 모였다.

이 묘는 연성수가 아침 운동으로 백련사 길을 올라다니면서 발견한 장소인데, 창립 전날 결의를 다지기 좋은 장소라 생각하여 제안했던 것이다. 맨몸으로 군사정권에 대항할 민청련의 출범을 앞두고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무명용사들 앞에서 출정 의지를 다지는 자리였다. 창립대회를 무사히 치르게 해주십사 기원을 담은 고천(告天) 의식이기도 했다.

연성수가 사회를 봤다. 먼저 독립운동에 몸 바친 순국열사들에 대한 묵념을 했다. 이어서 김근태 의장 내정자가 술을 한잔 올리고 제문을 읽었다.

"유세차 1983년 9월 29일에 천지신명과 독립용사들의 영전에 고하나니..."

김근태 의장 내정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북한산의 맑은 가을 공기 속에 울려 퍼졌다. 천지신명과 무명 독립용사들의 영혼이 출범하는 민청련을 돌봐주시길 간절히 기원하는 제문이었다.

모두 함께 두 번 절하고, 김근태 의장 내정자부터 한 사람씩 돌아가며 추모와 다짐의 말을 했다. 그리고 둘러앉아 제주(祭酒)를 돌려 마셨다. 조촐하지만 비장한 출정식이었다.

 4·19묘지 부근 북한산 둘레길에 위치한 무명순국열사묘역 현재 모습.
 4·19묘지 부근 북한산 둘레길에 위치한 무명순국열사묘역 현재 모습.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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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총회 날

드디어 9월 30일 창립총회 날이 밝았다. 며칠 후면 추석이라, 선선한 날씨에다 새파란 하늘에 구름이 약간 끼어 있는 전형적인 가을 날씨를 보이고 있었다.

이날 서울시경에는 다음 날 있을 세계의원총회(IPU)에 맞춰 대학생들이 연합시위를 계획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그리고 이내 서울 모든 경찰서에 비상령이 통보됐다. 광화문, 종로, 명동 등 시내 요소요소 경찰 닭장차(당시 시위 진압을 위해 출동하는 경찰버스에는 시위대의 돌멩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창문에 철망을 씌워 놓았는데 그 모양이 닭장 같다 하여 닭장차로 불렸다)가 대기하여 젊은이로 보이는 사람들을 검문하였다. 시위 예정 시간으로 알려진 6시쯤 되자 대학생처럼 보이는 젊은이들은 무조건 연행하여 차에 태워 경찰서로 실어 날랐다.

 80년대에는 반정부시위를 통제하기 위해 경찰력을 동원하여 시내 요소요소서 불심검문을 자주 행했다. 사진은 80년대 서울시청 길에서의 검문 모습.
 80년대에는 반정부시위를 통제하기 위해 경찰력을 동원하여 시내 요소요소서 불심검문을 자주 행했다. 사진은 80년대 서울시청 길에서의 검문 모습.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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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일원에서 계획했던 대학생들의 연합시위는 경찰의 철통같은 경계와 무차별 연행 작전으로 별 성과없이 무산되었다. 종로, 방산시장, 신촌로터리 등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을 뿐이었다. 당시 고대를 중퇴하고 학원에서 다시 입시 준비를 하고 있던 한영수는 애꿎게 걸려들어 구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한영수는 경찰들의 '무분별한' 과잉검속에 항의하다가 괘씸죄로 며칠간 유치장 신세까지 졌다. 이런 인연이 나중에 한영수가 민청련의 열성회원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시위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이런 어수선한 상황이 민청련 창립총회를 성사시키는 데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며칠 전부터 국가안전기획부(약칭 안기부. 중앙정보부의 후신이며 현재의 국가정보원)에서는 재야 청년들이 뭔가 일을 벌이려고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듯했다. 그래서 요주의 인물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촉각을 세우고 예의주시하던 차였다. 그러나 시간과 장소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아마도 학생들의 연합시위 정보가 저들의 관심을 분산시키는 데 일조했으리라.

"예비검속을 피하라!"

대회를 준비하는 민청련 집행부는 창립총회를 성사시키는 것만으로도 공개운동단체를 띄우려는 원래 목적을 반은 달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대회 시간과 장소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보안을 철저히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기부는 30일 이날, 뭔가 새로운 단체를 띄운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 같았다. 김근태의 집에 이날 오전에 안기부 요원이 다녀갔던 것이다. 당시에는 예비검속이라 하여 수사기관에서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요주의 인물을 사전에 집이나 특정 장소에 붙들어두는 일이 흔했다. 물론 불법이고, 인권침해였지만 누구도 항의하거나 막을 수 없었다. 김근태 의장 내정자는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여 집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 방문은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게 했다. 아마도 고문이나 지도위원으로 모실 분들에게 연락하는 과정에서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았을까 짐작만 할 뿐이었다.

함석헌 선생, 문익환 목사, 예춘호 선생, 김승훈 신부, 권호경 목사 등 재야인사 30여 명이 이날 오후부터 연금되어 창립대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왼쪽부터 함석헌 선생, 문익환 목사, 예춘호 선생, 김승훈 신부, 권호경 목사.
 왼쪽부터 함석헌 선생, 문익환 목사, 예춘호 선생, 김승훈 신부, 권호경 목사.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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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청년그룹 중에서도 조성우 등 중량급 인사들에게도 연금령이 떨어졌다. 새로 띄우려는 단체의 대표를 맡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는지 조성우에게는 특별조치가 내려졌다.

이날 아침 조성우의 홍제동 집 앞에는 새벽부터 안기부, 보안사, 치안본부 합동팀 5명이 차를 대기시켜놓고 조성우를 모셔가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조성우가 집에서 나오자마자 다짜고짜 차에 태워 교외로 몰았다. 강제연행이었다. 결국 이날 조성우는 이 정보기관원들과 서울 교외 일영 유원지에 가서 하릴없이 하루를 보내야 했다.

창립총회 장소는 상지회관

창립총회는 7시 30분에 시작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6시가 좀 지나자 점퍼 같은 간편복 차림의 민청련 회원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삼삼오오 성북구 돈암동 상지회관 골목 비탈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상지회관은 가톨릭 베네딕트회 수도원으로 일반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장소였다.

집행부는 대부분 일찍 상지회관에 들어와 행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박우섭, 박계동은 들어오는 사람들을 안내하느라 건물 밖에 남아 있었고, 김근태, 장영달, 이해찬, 이범영 등 주요 간부로 내정된 사람들은 일찍부터 회관에 들어와 긴장 속에서 들어오는 회원들을 맞고 있었다.

 현재는 '상지 피정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당시 상지회관의 현재 전경. 성북구 돈암동에 위치한 가톨릭 베네딕트회 소유의 수도원이다.
 현재는 '상지 피정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당시 상지회관의 현재 전경. 성북구 돈암동에 위치한 가톨릭 베네딕트회 소유의 수도원이다.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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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임위 의장으로 내정된 최민화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아예 참석하지 않았다. 집행부가 전원 연행되어 구속되는 사태라도 벌어진다면 최민화가 2진으로 재건 집행부를 꾸릴 임무를 맡았던 것이다. 최민화는 당시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에서 함께 일하던 구창완 목사를 창립집회에 참석하게 하고, 자신은 나중에 현장의 진행 상황을 전달받기로 했다.

임상택, 김도연, 김정환, 박성규, 이을호, 최정순, 권형택, 이우재 등 40~50명의 회원들과 지도위원 임채정, 김종철 선생이 회관 안으로 속속 들어왔다.

7시가 지나자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7시 30분으로 예정된 총회 시작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제동이 걸렸다. 뒤늦게 이곳에서 민청련 창립총회가 열린다는 것을 알아챈 정보기관에서 경찰 병력을 급파하여 집회를 막으려고 한 것이다. 일순 상지회관 일대는 정사복 경찰 수백 명에 둘러싸였다. 경찰은 회관 입구를 차단하고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회관 입구에는 들어가려는 회원들과 막는 경찰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몇 사람은 막는 경찰을 밀치고 들어왔지만 대부분 들어오지 못하고 골목 여기저기 웅성거리며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안에 있던 집행부 몇 사람이 나가서 항의했지만 별무신통이었다.

 상지회관으로 들어가는 골목. 당시 경찰이 막고 있어 많은 회원들이 이 골목에서 서성거리다가 연행되었다. 지금은 창립식을 열던 때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상지회관으로 들어가는 골목. 당시 경찰이 막고 있어 많은 회원들이 이 골목에서 서성거리다가 연행되었다. 지금은 창립식을 열던 때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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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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