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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소년 승려를 벽 앞에 앉혀 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러시안 미술학도 마리아. 소년은 마리아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티베트 소년 승려를 벽 앞에 앉혀 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러시안 미술학도 마리아. 소년은 마리아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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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왈샤에서 함께 사흘을 보낸 멕시코 친구 래미가 티베트 불교를 좀 더 깊이 접하기 위해 네팔을 향해 배낭을 꾸렸다. 여행길은 이별의 연속이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를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것이었다. 내 엉터리 영어를 귀담아 주었던 동갑내기 래미와의 인연은 닷새에 불과했지만 오랜 친구와 헤어지는 것처럼 허전했다.

그의 직업은 뮤지션이었지만 나에게는 진정한 수행자로 다가왔다. 내가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 얘기를 꺼내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위로 했고 명상 중에 일어났던 신비로운 체험을 얘기하면 토 달지 않고 신비로운 눈빛으로 귀담아 들어줬다.

그는 모든 것에 도통한 것처럼 거드름 피우는 얼치기 수행자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들은 내가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 얘기를 꺼내면 자신들이 마치 도통한 큰 스승이라도 된 양 거드름을 피우며 나무랐고, 신비로운 체험을 얘기하면 자신들도 이미 다 알고 있다는듯 헛된 망상으로 취급했다. 그들은 누군가가 말을 꺼내면 그 이전에 말 꼬리를 잡아 반박할 준비부터 하고 있었지만 래미는 낮은 자세로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 드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래미를 통해 얼치기 수행자들을 떠올렸고 또한 그 얼치기 수행자들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얼치기 수행자들은 입으로 먹고 산다. 누군가 말 한마디 하면 모든 것을 다 파악하고 있다는 듯 함부로 평가하고 재단하여 무시한다. 온갖 오만을 떨어가며 겉으로는 상대의 말을 다 받아 주는 척 하지만 속으로는 딴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겸손은 오만과 자만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과거의 내 모습이기도 했다. 나 또한 한동안 그 오만 방장한 놀음에 갇혀 있었다.

버스 터미널에서 래미와 나는 서로 말이 없었다. 불현듯 그가 좋아하는 수제 쿠키가 떠올랐다. 버스 터미널 근처 제과점으로 뛰어갔다. 갓 구워낸 바삭바삭한 쿠키를 한 봉다리 사서 돌아와 보니 버스는 저만치 떠나고 있다. 보통 일이십 분 늦게 출발하는 버스가 이번에는 정시에 출발했던 것이다. 사는 게 그런 것 같다. 애정 어린 그 무엇인가에 가까이 다가가려하면 좀 더 멀리 떠나가 버린다. 나는 포옹도 없이 떠나보낸 래미를 향해 혼잣말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잘 가시게 사랑하는 친구..."

래미가 떠나던 날, 숙소 옆방에 젊은 러시안 여자가 들어왔다. 티베트 불교의 흔적을 찾아 나서고 있다는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모스타히바. 델리에서 바라나시에로 가는 열차 안에서 만났던 러시안 가족들 역시 티베트 불교신자였듯이 인도 여행 중에 종종 불교 성지를 찾아 나서는 러시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마리아의 화폭에 담긴 티베트 소년 승려.
 마리아의 화폭에 담긴 티베트 소년 승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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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있다는 마리아는 화첩을 꺼내들고 베란다에 나와 수시로 스케치를 했다. 그러던 다음날 열 예닐곱 쯤 돼 보이는 티베트 승려를 벽 앞에 앉혀 놓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산책을 다녀왔을 무렵에는 티베트 승려, 소년이 스케치북 안에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이 함께 산책을 나서거나 식당에 마주 앉아 음식을 먹는 모습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소통의 도구는 영어였을 것이었다. 하지만 티베트 승려는 영어를 거의 구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러시안 미술학도의 몸짓이나 입에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언어에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고 때로는 사춘기 소년처럼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그는 러시안 미술학도, 마리아를 이성적으로 좋아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붉은 승복을 입은 티베트 소년은 매일 아침마다 마리아의 방문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나는 그의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늠해가며 숙소 베란다에 할 일 없이 나와 담배를 피워 물고 그를 지켜보곤 했다. 오늘은 여느 때와 달리 티베트 소년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숙소 근처에 살고 있는 티베트 노인이 한 손에는 염주를, 다른 한 손으로는 마니차(불교 경전을 넣은 경통. 마니차는 손에 쥘 수 있는 작은 마니차에서 부터 몇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마니차가 있다. 티베트 사람들은 마니차가 돌아가면 경전의 불력이 세상에 퍼진다고 믿고 있다)를 돌리며 마을길을 나서고 있다.

매일 아침저녁 마니차를 돌리며 리왈샤 마을을 돌고 노인.
 매일 아침저녁 마니차를 돌리며 리왈샤 마을을 돌고 노인.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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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언제부터 염주와 마니차를 돌리며 마을길을 돌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리왈샤에 머무는 내내 매일 아침저녁 마니차를 돌리며 마을길을 돌고 있는 노인을 보았다. 노인이 마을길로 접어들 무렵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자 호수 주변을 돌던 순례자들은 서둘러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아랑곳 않고 염주와 마니차를 돌리며 빗속을 걷고 있었다.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노인은 저 길을 나섰을까. 티베트 사람들은 마니차를 한 번 돌릴 때 마다 경전을 한번 읽는 것과 같다고 여긴다. 마니차를 돌리면 경전을 읽는 것과 같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미신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마니차를 돌리는 일은 경전에 새겨져 있는 부처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수행의 한 방편인 것이다. 작심 수행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최소한 마니차를 돌릴 때 만큼은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떠올리게 될 것이었다.

자비로운 마음이야 말로 부처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하여 마니차를 돌리며 마을을 돌고 있는 노인의 모습을 보는 이들 또한 자비로운 마음을 새기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마니차에 새겨진 자비로운 부처님의 가르침이 노인을 통해 빗줄기가 거세지는 리왈샤 온 마을로 퍼져 나가고 있을 것이었다.

 러시안 미술학도 마리아, 마리아를 짝사랑한 티베트 소년과 시크교인.
 러시안 미술학도 마리아, 마리아를 짝사랑한 티베트 소년과 시크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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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골목길로 사라지고 한참 지나서야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러시안 미술학도의 그림 속의 주인공, 티베트 승려가 빗물을 털어내며 숙소 베란다에 올라왔다. 잠시 후 숙소 베란다 맨 끝 방에 머물고 있는 시크교인이 호탕하게 웃으며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그는 내가 이른 아침 호수를 돌고 올 무렵 마리아와 함께 숙소를 나갔었다. 나는 바보처럼 히죽히죽 웃고 있는 티베트 소년 대신 그에게 물었다.

"마리아가 보이지 않네요."
"마리아는 곧 올 겁니다."
"식사를 함께 했습니까?"
"그렇소. 당신은 아침 식사를 했나요?"
"나는 아침을 먹지 않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내일 떠난다고 합니다."
"어디로요?"
"라다크로 간답니다."

내일이면 그녀는 떠난다. 소년은 우리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했는지 연신 싱글벙글 웃고 있다. 소년의 손에는 종이 봉지가 들려있다. 봉지 안에는 소년을 싱글싱글 웃게 해주는 그 무엇인가가 들어 있을 것이었다. 그것은 그녀를 기쁘게 해줄 그 무엇일 것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내일이면 작별 인사를 나눠야 할 소년이었기에 차마 봉지 안의 내용물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30분이 다 지나도록 그녀는 오지 않았다. 소년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사라지고 눈망울은 불안하게 베란다 저만치 마을길을 훑고 있었다. 내가 방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무렵 소년은 축 쳐진 어께로 이층 계단을 내려서고 있었다.

식당 앞에서 짝사랑하는 마리아와 뭔가 얘기를 나누고 있는 티베트 소년 승려.
 식당 앞에서 짝사랑하는 마리아와 뭔가 얘기를 나누고 있는 티베트 소년 승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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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무렵, 다른 음식에 비해 값이 저렴한 만두 종류인 모모와 국수 종류인 자오민을 즐겨 먹던 식당 앞에서 두 사람을 보았다. 마리아는 스케치북에 소년이 얘기하는 뭔가를 부지런히 받아 적고 있었다. 마리아가 소년에게 내일 아침 라다크로 떠난다는 사실을 얘기한 것일까. 소년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다음날 아침 마리아는 배낭을 꾸려 버스 시간에 맞춰 라다크로 떠났다. 그녀가 나와 시크교인에게 작별 인사를 나누고 떠날 무렵 티베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 한 시간 쯤 지나서야 소년이 찾아왔다. 공연히 숙소 앞을 오락가락한다. 그녀가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 것일까. 소년의 얼굴이 무겁다. 그녀가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소년은 살포시 열려 있는 마리아가 사용했던 방문을 열어본다. 소년의 마음처럼 텅 비어 있을 것이다. 소년의 아픔이 내 먼 전생에 있었던 아픔처럼 다가온다.

그녀와 만난 시간은 나흘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소년에겐 평생 잊지 못할 시간일 것이었다. 첫 사랑을 그것도 짝사랑을 경험한 소년에게 처음 만났을 때의 그녀는 사랑과 자비가 담긴 불교 경전이나 다름없을 것이었다.

'잘 가시게 사랑하는 친구' 라는 인사말도 건네지 못했을 소년은 이제 이성간의 사랑에는 고통이 뒤 따른다는 말씀이 담긴 경전을 접하게 될 것이었다. 한동안 소년은 그 경전을 멀리하고 고통으로 몸부림 칠 것이었다. 그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승복을 벗게 될지도 모른다. 도시로 나가 사원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겠노라 작심할지도 모른다. 

세파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사랑의 상처가 치유될 무렵에는 고통의 원인이 어디서부터 오는 지를 체득하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는 부처님의 말씀에 한 걸음 다가가게 될 것이고 다시 사원으로 돌아와 진정한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날 밤, 천둥 번개가 내리치고 비가 억수같이 퍼부어 댔다. 나는 딱딱한 침대에 손을 놓고 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리왈샤의 첫날밤에 마주쳤던 천둥번개는 공포 그 자체였다. 하지만 공포심이나 두려움도 익숙해지면 더 이상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다만 세상에 홀로 존재하고 있는 듯 숨 막히는 외로움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래미와 마리아 그리고 시크교인과 티베트 순례객들, 리왈샤에서 일주일을 보내며 하루 이틀 사흘 안면을 익힌 숙소 친구들은 하나 둘 본래 없었던 존재들처럼 천둥 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인도에 온 지 얼마나 되었을까. 족히 4개월 쯤 된 것 같은데 내가 걸어왔던 시간들, 가야할 길이 점점 오리무중이다. 어디로 갈 것인가. 어느 순간 백치가 된 기분이 든다. 머릿속이 텅텅 비어 간다. 내가 가야할 곳이며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일까?. 자문하고 또 자문해 보지만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천둥소리와 번개가 우르릉 번쩍 들리고 보일 뿐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반가부좌를 풀고 침대에 몸뚱이를 뉘일 무렵 비 그치고 천둥 번개가 사라졌다. 좀 더 예민하게 열린 내 귓속으로 영역 다툼을 하는 개 짖는 소리 뿐 아니라 수면 위로 뛰어 올라 근질근질한 비닐을 비벼대는 물고기들의 자맥질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려온다. 머릿속이 근질거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내 존재감처럼.

그 근질거리는 존재감은 이곳 리왈샤에서 부터 좀 더 깊숙한 북인도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익숙해져 가는 것들로부터 이별하고 좀 더 낯선 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리왈샤에서 만난 친구들을 다 떠나보내고 홀로 남은 나처럼 혼자서 놀고 있는 어린 티베트 승려.
 리왈샤에서 만난 친구들을 다 떠나보내고 홀로 남은 나처럼 혼자서 놀고 있는 어린 티베트 승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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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인도 리왈샤, #티베트 소년 승려, #러시안 미술학도, #짝사랑,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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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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