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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시대 청년의 모습을 만화주인공에 비교한 권범철 작가의 만평(한겨레)
 각 시대 청년의 모습을 만화주인공에 비교한 권범철 작가의 만평(한겨레)
ⓒ 부천국제만화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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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좋아한 만화주인공은 누구입니까?'

또래보다 왜소하지만 언제나 당차고 포기를 모르는 명랑아 독고탁(이상무 '달려라 꼴찌' 등), 주변에서는 문제아 취급을 받지만 좋아하는 일에는 누구보다 열정이 넘치는 강백호(이노우에 타케히코 '슬램덩크'), 수수해 보이지만 요리 실력도, 인품도 최고인 완벽남 성찬(허영만 '식객'), 찌질하고 평범해 보이지만 기묘한 정신세계를 가진 조석(조석 '마음의 소리').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정답은 각 시대를 상징하고 당시 청춘들이 닮고 싶어 하는 모습을 담은 만화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독고탁'이 인기를 끌었던 1980년대는 3저 호황(저달러·저유가·저금리)으로 대표되는 높은 경제성장을 기록하던 시기였다. 정치적으로는 암울하고 힘들었지만 프로스포츠가 활성화되고 컬러TV가 보급되는 등 문화적으로는 부흥을 이루던 때였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캐릭터답게 독고탁은 우울한 가정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포기 않고 야구선수로 성공한다.

일본만화의 주인공이지만 빨간 머리의 강백호도 자본주의 황금기 속에서 자기 개성을 표현하기 시작하던 1990년대 한국 사회분위기를 반영한다. 기성세대에 반항하는 X세대의 모습처럼, 강백호는 학교수업에 관심은 없지만 농구, 특히 리바운드에는 누구보다 뜨거운 열정을 보인다.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대중문화가 꽃피던 1990년대, 조던 농구화를 신고 자유롭게 골대를 향해 날아오르던 강백호는 그 시대 한국 청년들의 우상이었다.

인터넷의 시대가 활짝 열린 2000년대, 사람들은 자신만의 미니홈피, 블로그, UCC를 만들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걸 즐기는 시대에서 스스로 만들며 즐기는 시대로 전환점을 맞이한 것이다. 작품 속에서 성찬도 자신의 트럭을 몰고 전국을 누비며 식재료를 모아 자신만의 요리를 만든다. 마치 IT기술을 이용해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거나 관심사를 찾아 떠도는 디지털 유목민 시대를 보여주듯 말이다. 성찬이라는 캐릭터는 각 분야가 점점 개인화되고 전문화되던 당시 사회상을 대변한다.

그렇다면 조석은 어떤 캐릭터인가. 못생기고 평범하고 흔하다. 장점이 잘 보이지 않는다. 특출해 보이는 것은 상황을 방관 하는 능력과 유머감각 뿐이다. 그런데 그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20대들의 모습이 보인다. 학교를 졸업했고, 군대를 다녀왔고, 연애를 했지만, 기대했던 것보다 아름답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어딘가 어설프고 우스워 보이는 우리의 모습이 슬며시 담겨있다. 그래서 이 촌스러운 캐릭터의 어설픈 한마디가 우리에게는 촌철살인의 돌직구가 된다. 남들처럼 살아왔고,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지만, 행복하지 않아서 우스운 우리의 솔직한 모습이다.

"흙수저론, 정유라 사건... 지금 청년들 마음 잘 표현해"

이충호 작가의 <터미네이터>, <영웅본색> 데생
 이충호 작가의 <터미네이터>, <영웅본색> 데생
ⓒ 부천국제만화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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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이야기는 사실 하나의 만평을 길게 풀어서 쓴 것이다. 사실 해당 작품은 지난 19일 막을 올린 부천국제만화축제 전시작 중 하나다. 부천국제만화축제(7월19일~23일)는 스무 번째 행사를 기념해 20대를 주제로 다양한 행사를 준비했다.

청년들의 고민뿐 아니라 사회를 날카롭게 풍자한 <세계시사만화전>, 국내외 만화가 20여 명의 데뷔시절 모습과 작품을 소개한 <청년, 빛나는> 주제전, 열여섯 소녀의 방황과 상처를 그려 제44회 앙굴렘 국제만화축제 '새로운 발견상'을 수상한 앙꼬 작가의 '<나쁜 친구 – 날것 다부진 자화상> 기획전 등 청년의 고민, 꿈, 도전, 가능성을 만화로 표현했다.

청년을 주제로 다룬 다른 축제도 많지만 이번 축제가 특별한 이유는 만화만의 기발함과, 솔직함, 재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모든 전시물들은 청년들을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대다수 사람들이 즐거움을 얻기 위해 만화를 보듯, 모든 것이 시선 가는대로 자연스럽게 읽힌다.

<청년, 빛나는>주제 전에서 마주친 작가들의 수많은 데생과 낙서의 흔적은 그들도 우리처럼 방황과 고민의 시절을 보냈음을 생생히 보여준다. '열심히 살아야한다', '고통 없이 얻는 것은 없다'는 어른들의 귀 따가운 충고보다 좋아하는 인물을 치열하게 모작했던 작가의 빛바랜 종이 한 장이 우리에게 더 큰 울림을 준다.

<세계시사만화전>에서 마주친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슬프지만 재밌고, 재밌지만 슬픈 만화 속에 우리의 삶이 생생히 보인다. 좋아하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해 달려도 기성세대 손바닥 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젊은이의 모습은 우리 시대 청년의 냉혹한 자화상이다. 이곳에 전시된 만평들은 주제는 달라도 모두 쉽게 읽힌다. 이것은 심각한 청년실업을 비롯해 박탈감을 주는 특권층의 행태 등이 21세기 청춘의 삶을 만화보다 더 극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19일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 만난 관람객 민경환씨와 최새아씨
 19일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 만난 관람객 민경환씨와 최새아씨
ⓒ 안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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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장에서 만난 20대 관람객 민경환(27)씨는 "전시물에 많이 공감했다"라며 "취업을 못하는 청년들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흙수저론이나 정유라 사건 등 지금 청년들의 마음을 잘 표현했다"고 말했다. 이어 "글보다 더 명확히 설명이 되고, 시각적으로 더 많은 공감대를 주는 매체"라고 만화를 높이 평가했다.

최새아(29)씨도 "대학교를 졸업했는데 다시 시작으로 돌아가야 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며 "미래를 위해 '대학만 가면', '졸업만 하면'이라는 끊임없이 가정을 되풀이해야 하고 당장 현실의 행복을 외면해야하는 우리 청년들의 이야기에 공감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어릴 때부터 만화를 봐왔고 지금도 웹툰을 많이 본다"며 "위로와 공감을 주는 만화는 20대에게는 생활이다"라고 말했다.

각양각색의 청춘, 그리고 만화

18일 부천국제만화축제에 참가한 조형준씨, 최은빈씨, 서다원씨
 18일 부천국제만화축제에 참가한 조형준씨, 최은빈씨, 서다원씨
ⓒ 안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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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를 위한 축제인 만큼 이날 행사장에서 만난 젊은이의 모습도 다양하고 특별했다.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이날 군복과 군모를 갖춰 입고 모형 총까지 들고 활동하던 조형준씨를 만났다. 스물 두 살 조형준씨는 "평소 이런 축제에 관심이 많아 지인과 함께 참가했다"며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이 커 코스튬 플레이(만화, 애니메이션 등의 등장인물로 분장하는 놀이)를 한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만화를 좋아했는데, 축제 전시물을 보면 추억을 느끼고 부모님 세대의 만화까치 체험해볼 수 있었다"며 "군대를 갈 수 없었던 내가 코스튬 플레이를 통해 만족을 얻는 것처럼, '재현한다'는 것이 만화와 코스튬 플레이만의 매력"이라고 설명했다. 조씨는 "오늘만 해도 50여 명의 사람들이 코스튬플레이에 참가했다"며 "이번 축제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함께하고 싶다"는 희망을 전했다.

그래픽노블 출판사의 인턴사원인 최은빈(24)씨는 "그림체를 보면 작가의 가치관과 삶이 뚜렷하게 전달된다"라며 "만화를 읽다보면 작가랑 대화하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출판사 인턴을 통해 만화축제를 이번에 처음 경험했다는 최씨는 "낯설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다는 것이 신기하다"며 "현장에서 독자와 직접 소통했던 경험이 훗날 좋은 책을 만드는 편집자가 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얘기했다. 또 "20대에게 만화는 너무나 보편화된 장르"라며 "웹툰을 통해 사람들이 만화를 많이 보는 것처럼 만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확실히 높아졌다"고 말했다.

이날 만화축제에 참가한 것은 관람객과 판매자뿐만 아니라 20대의 봉사자도 있었다. 현장 안내도 하고 입장객 수도 세던 스물 한 살의 서다원씨에게 만화축제는 어떤 의미였을까.

서씨는 "20대 입장료가 무료여서 주변 사람들이 많이 온다.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축제 자체가 즐겁고, 코스튬 플레이같이 음지 문화를 크게 열어주는 것 자체가 좋다"며 "만화를 좋아하고, 전공도, 장래희망도 이쪽이라, 이번 축제는 만화를 더 좋아하고 해당 분야에서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20대에게 만화는 '충전'의 의미"라며 "힘들 때 잠들기 전 읽는 만화는 삶을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된다"고 얘기했다.


태그:#부천국제만화축제, #만화, #20대, #청년, #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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