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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경기를 하는양 날씨가 무덥다. 얼음 듬뿍 넣은 아메리카노를 마셔야 열기가 가라 앉는다. 에어컨 밑에서 여름나고 싶은 요즘이다. 시원한 풍광이 펼쳐지는 낙원으로 숨는게 좋다. 별천지 경남 하동의 매력을 찾아 여름 추억 여행을 7월 15일 떠났다.

섬진강 바라보며 바람 타고 걷는 길이 좋다, 좋아!

하동군 하동읍에서 발자국 두 개가 걸음을 멈췄다. 합천 율곡으로 120.8km, 화개27.0km, 국도 2호선과 19선으로 가는 이순신장군 백의종군로 표지석이다. 갈림길은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섬진교 앞에서 섰다. 섬진교 회전 교차로다. 진주와 순천, 광양, 남해로 가는 길이 어디로 가야할 지 망설이게 한다.

옛 섬진교가 있다. 비록 옛 섬진교는 철거되었지만 ‘섬진교’라 적힌 옛 다리 앞에는 투명 아크릴판으로 한창때를 떠올리는 그림이 새겨져 있다.
 옛 섬진교가 있다. 비록 옛 섬진교는 철거되었지만 ‘섬진교’라 적힌 옛 다리 앞에는 투명 아크릴판으로 한창때를 떠올리는 그림이 새겨져 있다.
ⓒ 김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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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교 옆에는 옛 섬진교가 있다. 비록 옛 섬진교는 철거되었지만 '섬진교'라 적힌 옛 다리 앞에는 투명 아크릴판으로 한창때를 떠올리는 그림이 새겨져 있다. 그 아래로는 섬진강 변을 거니는 산책로가 초록 물결 사이로 보인다. 섬진강 100리 테마로드다.

섬진강 100리 테마로드다.
 섬진강 100리 테마로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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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물결에 정신을 놓고 있는데 오가는 자동차가 바람을 가르며 지나는 덕분에 고개를 들었다. 하동읍에서 화개면으로 가는 길을 걸었다. 자동차가 다니는 길옆으로 섬진강을 길동무 삼아 걷기 좋은 나무테크로 꾸며진 산책로가 있다.

자동차가 다니는 길옆으로 섬진강을 길동무 삼아 걷기 좋은 나무테크로 꾸며진 산책로가 있다.
 자동차가 다니는 길옆으로 섬진강을 길동무 삼아 걷기 좋은 나무테크로 꾸며진 산책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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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변을 걷는 동안 나무의 시원한 그늘이 나를 편안하게 한다. 산책로에서 만나는 들꽃과 벌레들이 정겹다. 마을 쪽에 커다란 바위 두 개가 포개진 곳 옆에 오룡정유지비가 서 있다. 오룡정(五龍亭)이라는 정자 터가 있던 곳이다.

하동 오룡정 터
 하동 오룡정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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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정은 손시가 건립했다. 부친이 8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생원과 진사가 되어 당시 사람들이 팔룡(八龍)이라 불렸고 팔룡의 한 사람인 손약의 다섯 아들이 또한 생원과 진사가 되었기에 이를 기려 오룡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소설 <토지> 속에서  읍내 장터에 주막을 열었던 월선이가 행여나 그리운 용이가 와줄까,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바라보고 바라보던 나루터가 바로 이곳이
 하동나룻터다.
 소설 <토지> 속에서 읍내 장터에 주막을 열었던 월선이가 행여나 그리운 용이가 와줄까,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바라보고 바라보던 나루터가 바로 이곳이 하동나룻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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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을 지나자 하동 나루터가 나왔다. 소설 <토지> 속에서 읍내 장터에 주막을 열었던 월선이가 행여나 그리운 용이가 와줄까,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바라보고 바라보던 나루터가 바로 이곳이다.

굽이굽이 하동포구 80리 물길은 이곳에 이르러 천혜의 절경을 빚어냈다. 한때는 수백 척의 상선이 이곳에 정박하기도 했다고 한다. 동학혁명의 소용돌이 속에는 하얀 백사장이 핏빛으로 물들었고, 섬진강이 지리산 빨치산 대원의 활동 통로가 되면서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한다.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바라보던 나룻터

'하동포구 팔십 리에 물새가 울고/ 하동포구 팔십 리에 달이 뜹니다/~' 하동포구 노래비가 돌에 새겨져 있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찬찬히 읽었다. 노래비 앞에는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 행로지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 정유년(1597년) 5월 27일 당시 원수부가 있던 합천 초계 권율 도원수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고 쌍계동(화개면 탑리)를 지나 두치 최춘룡의 집에 늦게 도착하여 유숙하고 이종호와 유기룡을 만나 이튿날 하동현(고전면 주성)을 가기 위해 늦게 떠난 곳이라고 한다. 충무공이 지나간 길옆에는 하얀 무궁화가 피어 넋을 기린다.

하늘빛과 물빛이 어우러진 섬진강을 보았다. 여름이 시원하다. 유쾌하다.
 하늘빛과 물빛이 어우러진 섬진강을 보았다. 여름이 시원하다. 유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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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터 한쪽에는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소설 <산하> 중 일부가 새겨진 이병주 문학비도 서 있다. 나루터 빈 의자에 잠시 앉았다. 하늘빛과 물빛이 어우러진 섬진강을 보았다. 여름이 시원하다. 유쾌하다.

서해량 회전 교차로에서 걸음을 멈췄다. 집채보다 큰 바위의 갈라진 틈새로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는 시원한 폭포수가 보인다. 착각이다. 폭포 벽화다.
 서해량 회전 교차로에서 걸음을 멈췄다. 집채보다 큰 바위의 갈라진 틈새로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는 시원한 폭포수가 보인다. 착각이다. 폭포 벽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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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량 회전 교차로에서 걸음을 멈췄다. 집채보다 큰 바위의 갈라진 틈새로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는 시원한 폭포수가 보인다. 착각이다. 폭포 벽화다. 벽화 속 풍경에 잠시 샤워한 듯 개운하다.

섬진강 바라보며 바람 타고 걷는 길이 좋다, 좋아! 하늘빛과 물빛이 어우러진 섬진강 변에서 여름을 즐겼다.
 섬진강 바라보며 바람 타고 걷는 길이 좋다, 좋아! 하늘빛과 물빛이 어우러진 섬진강 변에서 여름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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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바라보며 바람 타고 걷는 길이 좋다, 좋아! 하늘빛과 물빛이 어우러진 섬진강 변에서 여름을 즐겼다.

별천지 경남 하동에서도 호리병처럼 생긴 악양면으로 들어서는 길은 내내 마주한 구름 안은 산이 둘러싼다.
 별천지 경남 하동에서도 호리병처럼 생긴 악양면으로 들어서는 길은 내내 마주한 구름 안은 산이 둘러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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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 너머로 바람도 솔솔 드나드는 평화가 드리운 -하동 조씨 고택

별천지 경남 하동에서도 호리병처럼 생긴 악양면으로 들어서는 길은 내내 마주한 구름 안은 산이 둘러싼다. 다시 차를 몰아 악양면으로 향했다. 소설 <토지>의 무대인 평사리 들판을 지나 악양면 사무소에서 이르고도 멈추지 않았다.

하동 상신마을
 하동 상신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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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으로 1km 가량 가면 정서리 상신마을이 나온다. 고샅길 사이로 마른 장작이 담처럼 빙 둘러 쌓인 집이 보인다. 옆으로 소나무와 초가가 정겹게 그려진 벽화가 그려진 집이 나온다. 벽화를 지나 돌아가자 흙과 돌이 버무려진 고즈넉한 돌담이 나온다.

하동 조씨 고택 돌담
 하동 조씨 고택 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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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이 품은 세월을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조씨 고택'이다. 조선 개국공신 조준(趙浚,1346~1405)의 직계 손인 조재희(趙載禧)가 낙향하여 16년에 걸쳐 지은 집이다. 흔히 '조부자집'으로 알려진 조선 후기 상류층 주택이다. 옛 영화는 아쉽게도 동학혁명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사랑채와 행랑채, 후원에 있던 초당, 사당 등이 불타 없어지고 안채와 방지(方池)만 남아 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전통적인 ‘천원지방(天圓地方)’을 표현한 네모반듯한 방지(方池) 형태의 연못이 먼저 반긴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전통적인 ‘천원지방(天圓地方)’을 표현한 네모반듯한 방지(方池) 형태의 연못이 먼저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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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토지>을 쓴 박경리 선생이 진주여고 재학 중일 때 조씨고택에 살았던 친구 집으로 자주 놀러갔었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악양 평사리 들판을 눈여겨본 박경리 선생에 의해 소설 <토지> 속에 평사리 들판이 주 무대로 나오고 조씨고택은 최참판댁 실제 모델이 되었다.

하동 조씨 고택 안채
 하동 조씨 고택 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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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전통적인 '천원지방(天圓地方)'을 표현한 네모반듯한 방지(方池) 형태의 연못이 먼저 반긴다. 둥근 하늘과 네모난 땅 사이에 있는 사람들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연못은 묵묵히 들려준다.

하동 조씨 고택
 하동 조씨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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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을 지나쳐 오른편으로 살짝 고개를 들자 경사진 길 따라 하늘 높이 솟아오른 안채가 보인다. 언덕진 길 따라 오르면 'ㄱ'자 모양의 팔작지붕이 인상적인 안채에 들어섰다.

옹기들이 담 너머에 펼쳐진 악양 풍경과 함께 정겨워

마침 92세의 증손인 조한승 어르신이 우리를 맞았다. 연세보다 너무 정정하다는 말에 어르신은 "6살부터 8년 동안 세끼마다 보약을 먹은 탓이다"라고 들려주신다. 툇마루에 앉은 우리는 어르신의 살아온 구한말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거렸다.

조선 개국공신 조준(趙浚,1346~1405)의 직계 손인 조재희(趙載禧)이 지은 하동 조씨 고택을 지키는 증손인 92세의 조한승 어르신.
 조선 개국공신 조준(趙浚,1346~1405)의 직계 손인 조재희(趙載禧)이 지은 하동 조씨 고택을 지키는 증손인 92세의 조한승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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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살에 종에 업혀 인근 초등학교에 등하교 다녔다. 주위에서 부잣집 아들이라고 따돌려 학교 가기 싫었다. 부모님께 떼쓰기도 했다"라는 말씀에 학교 가기 싫었던 내 어린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안채에서 마당을 가로질러 장독대에 눈은 멈췄다. 옹기종기 다양한 크기의 옹기들이 담 너머에 펼쳐진 악양 풍경과 함께 정겹다.

밤이면 은은한 옛이야기가 새어들듯 문살이 정겹다.
 밤이면 은은한 옛이야기가 새어들듯 문살이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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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뒤편으로 후원 석축에 굴뚝이 붙어 있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는 후원에는 녹차밭이 꾸며져 있다. 후원을 나와 사랑채로 걸어가자 구석진 곳에 파란색 슬리퍼 2짝이 세워져 있고 옆에 층층이 신발들이 들어서 있다. 어디론가 떠날 그 날을 기다리는 모양새다.

안채 뒤편으로 후원 석축에 굴뚝이 붙어 있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는 후원에는 녹차밭이 꾸며져 있다.
 안채 뒤편으로 후원 석축에 굴뚝이 붙어 있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는 후원에는 녹차밭이 꾸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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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면 은은한 옛이야기가 새어들듯 문살이 정겹다. 나도 몰래 귀를 살며시 붙였다. 3개의 자연석 돌계단을 오르면 나무 문짝이 붙은 뒷간이 나온다. 모든 근심을 날려버릴 것 같은 해우소다.

사랑채를 돌아 돌담을 걸었다. 돌담 아래로 괭이밥이 노랗게 피었다. 돌담 너머로 바람도 솔솔 드나든다. 한결 편안하고 차분해진다. 고택을 중심으로 평화가 드리웠다. 평안을 얻는다.

마음 울린 동편제 명창-'유성준‧이선유'기념관

상신마을을 나오자 다시금 하늘은 잔뜩 구름을 머금었다. 언제 비가 내려도 좋은 날이다. 악양면 중대리에서 버스는 멈췄다. 차에서 내려 노란 장미가 아름다운 정원 한쪽에 고풍스러운 깜찍한 승합차가 천막 아래 쉬고 있는 집을 지났다. 밭에는 무얼 심었는지 검은 천에 구멍이 쑹쑹 뚫려 있다.

동편제 명창 '유성준,이선유 기념관'가는 길
 동편제 명창 '유성준,이선유 기념관'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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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준‧이선유기념관으로 가는 이정표가 걸음을 재촉하게 한다. 하동 블로그기자단으로 활동하는 '악양왕언니농원' 간판이 개망초 사이로 솟아 보인다. 마을 개울을 따라 걷다가 시멘트 농로를 접어 들어 폐가를 지나자 판소리 기념관이 나온다.

유성준,이선유 기념관으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높게 솟은 2층 문루가 반긴다.
 유성준,이선유 기념관으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높게 솟은 2층 문루가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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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서는 입구에서 높게 솟은 2층 문루가 반긴다. 문루를 지나 흙과 돌이 어우러진 돌계단을 하나하나 밟아 올라가자 기념관 마당이 나온다. 기념관으로 가지 않고 옆으로 난 오솔길을 10여m 걸었다.

‘국창 유성준 선생 추모비’가 서 있는 옆으로 선생의 묘소가 자리 잡았다.
 ‘국창 유성준 선생 추모비’가 서 있는 옆으로 선생의 묘소가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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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창 유성준 선생 추모비'가 서 있는 옆으로 선생의 묘소가 자리 잡았다. 세습 예인 집안 출신의 유성준(劉成俊, 1873-1944) 선생은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에 활동한 판소리 명창으로, '근대 판소리 5대 명창' 중 한 분이다.

잠시 묵례로서 예를 올리고 지나온 기념관으로 들어갔다. '하동이 낳은 명창, 세상을 울린 절창'이라는 글귀가 먼저 반긴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마음에 쌓아두고 오랫동안 삭이고 삭인 곰삭은 소리, 칼칼하고, 널널하고, 텁텁한 명창의 수리성, 밑으로는 바닥 모를 심연이요, 위로는 하늘을 닿는다. ~하동이 낳은 동편제의 명창, 유성준과 이선유'라 적혀 있다.

오랫동안 삭이고 삭인 곰삭은 소리의 뿌리를 찾아

왼편으로 들어가자 근대 판소리 5대 명창이자 동편제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국창 유성준(1873~ 1949)은, 이선유(1873~ 1949) 선생의 영정사진이 한눈에 들어온다.

근대 판소리 5대 명창이자 동편제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국창 유성준(1873~ 1949)은, 이선유(1873~ 1949) 선생의 자료를 전시한 기념관
 근대 판소리 5대 명창이자 동편제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국창 유성준(1873~ 1949)은, 이선유(1873~ 1949) 선생의 자료를 전시한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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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은 동갑내기에 출신지가 같다. '지리산과 섬진강을 경계로 그 동편에서 큰 소리 맥을 이룬 송홍록 집안에서 나온 소리를 '동편제'라 하며, '그 서편의 소리 맥을 이룬 박유전 소리'를 '서편제'라 한다.

명창 유성준 선생
 명창 유성준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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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준 선생의 제자로는 1980년대 광고에서 들었던 "제비 몰러 나간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고 외치던 명창 박동진(朴東鎭, 1916-2003)을 비롯해 임방울(林芳蔚, 1904-1961), 김연수(金演洙, 1907-1974), 정광수(丁珖秀, 1909-2003), 박록주(朴綠珠, 1909-1979), 신숙(申淑, 1911-1970?), 강도근(姜道根, 1918-1996), 박귀희(朴貴姬, 1921-1993) 등이다.

선생의 제자를 가르치는 방식이 엄격해서 만약 만일 소리를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다른 견해를 제기하면, 목침을 집어 던지거나 소리 교습을 중단했다고 한다.

명창 이선유 선생
 명창 이선유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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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유 선생은 '1872년 하동 악양에서 태어나 일생 대부분을 보낸 진주시 장대동에서 1949년 세상을 떠났다. 10살 때부터 소리 공부를 시작해, 15살 때 송우룡을 찾아가 3년간 공부했다. 김세종의 지침을 받아 성공했다. 진주 권번의 '소리 선생'으로 있었다.

제자로는 인간문화재 김수악, 박봉술 씨와 신숙, 오비치 명창 등이 있다. 1933년 김택수의 채록으로 최초로 인쇄된 판소리 창본 <오가전집>을 출판했다. 이선유는 '수궁가'를 장기로 삼았는데, '수궁가','심청가', '적벽가' 중에서 몇몇 대목이 유성기판으로 전해진다. (진주문화연구소에서 펴낸 <명창 이선유> 중에서>)'

이선유 선생은 딸딸이 아빠였다. 그냥 딸딸이가 아니라 딸딸딸딸! '나그네 설움'과 '단장의 미아리고개' 등 수 많은 애창곡을 작곡한 '한국의 슈베르트'라는 별명을 가진 이재호 선생을 양자라 들였다.
하동 유성준,이선유 기념관에서 오랫동안 삭이고 삭인 곰삭은 소리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
 하동 유성준,이선유 기념관에서 오랫동안 삭이고 삭인 곰삭은 소리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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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너머로 회색빛 머금은 하늘은 물방울을 떨군다. 잠시 처마에 앉았다. 떨어지는 빗소리에 장단 맞추듯 툭툭 소리치는 메마른 흙 내음에 귀를 기울였다. 바람을 품에 안고 소리가 기념관을 맴돈다.

덧붙이는 글 | 하동군 블로그
개인블로그 <해찬솔일기>



태그:#하동여행, #유성준이선유기념관, #하동 조씨 고택, #섬진강 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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