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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소유 소련제 탱크가 시가지를 누비고 있다. ⓒ NARA
전차의 위력

한국전쟁 발발 초기 전차의 위력은 '절대적'이었다. 전쟁 발발 사흘 만에 북한 인민군이 남한 수도 서울에 진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몰고 온 T-34 탱크 때문이었다. 또 전쟁 발발 한 달 남짓 만에 낙동강 전선까지 파죽지세로 남침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도 인민군 T-34 탱크 때문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게다.

당시 북한은 소련제 T-34 전차(탱크)를 242대나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국군은 단 한 대도 없었을 뿐더러, 대 전차 방어무기도 전무했다.

소련제 T-34 전차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전차군단을 무력화시킨, 소련이 개발한 육상 최대의 무기였다. 태평양 전쟁 종전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한반도 38선 이북을 분배받은 소련은 이에 불만을 품고 후일을 대비했다.

그들은 언젠가 한반도를 통째로 자기네 판도에 넣고자 북한 군부에 전쟁물자와 장비 등을 대폭 지원했다. 1947년 북한군은 소련이 원조해 준 T-34 전차로 제115전차여단을 창설했다.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기술 지도를 받은 결과, 그 이듬해에는 북한군 스스로 전차여단을 운용할 만큼 괄목 발전했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기갑부대의 사열장면 ⓒ NARA
이런 정보를 입수한 당시 남한의 신성모 국방장관은 1949년 10월, 북한군 T-34 전차에 대항할 수 있는 미제 M26 전차를 지원해달라고 미 군사고문단에 요청했다. 그러나 미군은 "한반도 지형은 전차 운용에 부적합하고, 소련이 북한에 공급한 전차는 그리 많지 않다"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당시 소련이 북한을 아끼지 않고 지원했던 것과는 달리, 미국은 남한의 군사지원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이유는, 시시때때로 공공연히 '북진통일'을 주장해온 이승만 정부의 호전적인 태도 때문이었다(사실 그 실상은 허장성세였다).

미국 측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38선 일대에서 수시로 무력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고, 또 당시 남북한 간의 긴장상황을 고려할 때, 남한 당국에 새로운 무기를 공급한다는 건 아이에게 화약을 주는 셈으로 여겼을 듯하다. 불안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 결과, 한국전쟁 발발 후 북한군은 당시로서는 무소불위인 T-34 전차를 앞세운 채 남으로, 남으로 밀고 내려왔다. 국군은 그 전차의 맹위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북한군의 전차에 한국군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당시 국군 제6사단이 방어한 춘천 홍천지구 말고개 전투의 육탄 용사 무용담에서 대응 방식을 알 수 있다. 이 작전을 지휘한 제19연대장 민병권 중령은 특공조 투입 전에 다음과 같이 교육했다고 한다.

"적 전차의 해치(상단 뚜껑)가 열려 있을 경우는 수류탄과 화염병을 그 속에 투입한다. 해치가 닫혀 있다면 81mm 박격포탄을 전차 궤도 밑에 밀어 넣어 기동력을 마비시킨다. 만일 박격포 포탄이 불발될 경우 연막으로 시계를 막아 해치의 개방을 유도해 공격하고, 그래도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경우에는 화염병을 엔진실 상단 덮개 위에 투척한다." 
1950. 9. 4. 미 전투기의 공습에 불타고 있는 인민군 탱크. ⓒ NARA
영원한 것은 없다

실제로 이런 방법으로 적 전차를 공격·파괴해 대한민국 최고의 태극훈장을 받았다는 6사단 7연대 심일 소대장과 육탄 5용사의 무용담도 이제는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라는 노랫말처럼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한국전쟁 초기 무소불위를 떨치던 T-34 북한군 전차도 인천상륙작전 이후로는 전과 같은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 까닭은 미군이 본격 투입한 M26 전차와 함께, 대전차 방어용으로 보급된 신형 3.5인치 로켓포 그리고 미 공군 전투기의 공습 때문이었다. 그동안 한반도를 주름잡던 북한군 전차는 이들 무기의 집중 공격으로 7할 정도가 파괴됐다고 한다.

나는 현역 시절 전방 보병사단에서 3.5인치 로켓포 교관을 한 바 있었다. 2인 1조의 휴대용 3.5인치 로켓포 개인무기가 거대한 전차를 공격한다는 건 참으로 놀라웠다. 게다가 미 공군 전투기는 북한군 전차를 발견하는 족족 폭탄세례를 퍼부어 저승사자 노릇을 단단히 했다.

한국전쟁 초기 무서웠던 전차가 전장에서 부서진 이후, 전차는 고철덩어리로 전락해 아이들 놀이터가 되기도 했다. 한반도를 주름 잡던 탱크의 종말 치고는 초라했다. 영원한 절대 강자도, 영원한 절대 약자도 없는 게 세상사다. 그래서 세상사는, 특히 역사는 재미있는 것이다.

이번 기사는 한국전쟁 초기에 맹위를 떨쳤던 북한군 T-34 전차와 미군 전차 그리고 마침내 아이들 장난감으로 변한 전차들의 사진으로 꾸며 봤다.

(* 이 기사에 실린 사진들은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직접 검색하여 수집한 것으로 스캔한 원본대로 게재합니다.)
1950. 7. 24. 경북 예천. 전차가 마을로 진입하고 있다. ⓒ NARA
1950. 9. 17. 탱크 앞의 시신들. ⓒ NARA
1950. 9. 3. 미 전차부대가 낙동강 전선에서 인민군 진지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 ⓒ NARA
1950. 11. 1. 원산. 유엔군들이 탱크를 앞세우고 원산시가지로 진입하고 있다. ⓒ NARA
1951. 5. 26. 공포의 전차가 고개를 넘어 마을로 들어오고 있다. ⓒ NARA
953. 7. 1. 미 해병 기갑병이 자신의 탱크를 정비하고 있다. ⓒ NARA
1953. 6. 25. 중부전선에서 탱크가 적진으로 이동하고 있다. ⓒ NARA
1951. 5. 28. 38선 부근 6마일 남쪽 마을에서 전차포소리에 귀를 막는 아이들. ⓒ NARA
1951. 4. 4. 춘천. 북한강 유역에 전차를 몰고 온 유엔군과 아이를 업고 있는 할아버지. ⓒ NARA
1950. 10. 11. 서울 교외에서 아이들이 부서진 전차에 올라 놀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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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0.31. 원산. 헐벗고 굶주렸지만 웃음은 떠나지 않는 아이들. ⓒ NARA
1950.9. 한 지아비가 시각장애인 아내를 지게에 진 채 피란길을 떠나고 있다. ⓒ NARA
1950.10. 서울 은평. 한 소녀가 동생을 돌보며 불타버린 야외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 NARA
1953.2.19. 전란 중이지만 설빔을 차려 입은 천진난만한 소녀들이 민속놀이의 하나인 널뛰기를 하고 있다. ⓒ NARA
1950.10. 옹진전투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한 국군 특무상사가 목발을 짚은 채 침통한 표정으로 철조망 앞에 서 있다. ⓒ NARA
기자의 저서. 왼쪽부터 <카사, 그리고 나>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약속> <항일유적답사기>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 박도
태그:#한국전쟁, #북한, #북한군, #탱크, #T-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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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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