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카멜리아 여객선 타고 일본 문화기행 나서다

문화기행? 맞습니다. 남이 가지 않는 곳, 패키지 관광이라면 발길을 옮기지 못할 곳을 몇 군데 다녀왔습니다. 2박 3일이라고도 할 수 있고, 1박 2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7월 13일(木) 밤 10시 넘어 부산항을 떠난 Camellia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7월 14일 종일 후쿠오카(福岡) 시내를 정탐하듯 돌아다녔습니다.

​후쿠오카가 두 번째 방문이라고 하지만 첫 번째 방문은 큐우슈우(九州) 전체를 관광하는 것이어서 그야말로 주마간산(走馬看山)이었습니다. 단체 관광에서 개인의 심미안은 많은 제한을 받게 되잖아요. 자유로움을 맘껏 누리는 여행을 꿈꾸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해외 관광에 많은 노하우를 갖고 있는 하나투어 김천전판점 이정인 대표가 동행해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카멜리아 갑판 위에서(오른쪽부터 김성현 시인, 필자 이명재 목사, 하나투어 김천전판점 이정인 대표)
 카멜리아 갑판 위에서(오른쪽부터 김성현 시인, 필자 이명재 목사, 하나투어 김천전판점 이정인 대표)
ⓒ 이명재

관련사진보기


처음 배편을 예약하기는 다인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옹골찬 관광을 위해서는 숙면을 취할 필요가 있다며 4인1방 침대칸으로 바꾸는 게 어떻겠냐고 이 대표가 물어왔습니다. 1인당 3만원씩을 더 부담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의 없이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상하 2단으로 된 침대에서 우린 잠을 푹 잤습니다. 습관대로 새벽 5시에 일어나 몸을 씻고(선내 목욕탕 오전 5:30 개장) 하루를 준비했습니다.

​후쿠오카 항 국제여객선터미널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6시가 조금 넘어서입니다. 1시간 정도 여유를 부린 뒤 7시20분부터 하선(下船)이 시작되었습니다. 공항 또는 부두를 통과할 때마다 느끼는 것입니다. 여권 대조 담당 직원들의 불친절, 이건 만국 공통이란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후진국일수록 그 정도가 심한데요, 선진국이라고 하는 일본도 별 수 없더군요.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데서 비롯되는 거겠지만 기분 상하는 일임이 분명합니다.

피콜로하카타에서 하카타역까지 거닐며 일본을 살피다

​수속을 끝내고 나니 긴 터널을 빠져 나온 기분이었습니다. 숙소인 피콜로 하카타(PICOLO HAKATA)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습니다. 오전 8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어서 호텔 직원이 출근하기 전이더군요. 방 키가 없으면 들어갈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마침 나오는 손님이 있어서 1층 로비까지 들어갔습니다. 체크인을 해도 오후 3시 이후에나 예약된 방 입실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네 사람의 여행용 캐리어를 밧줄로 묶어 보관소에 넣고 숙소를 나왔습니다.

​그야말로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하카타역(博多驛)까지 도보로 10분 거리라고 했습니다. 시내 구경도 할 겸 걷기로 했습니다. 많은 것이 우리와 흡사했습니다. 우리가 일본을 닮아 가는 거겠지요. 함께 간 김성현 시인은 외국에 온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일제 36년의 문화 잔재가 지금도 살아서 이어져 내려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중에도 우리와 다른 것은 선전 홍보 간판에 영어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거였습니다. 문화의 주체성이라고 할까요.

하카타역에서 모스버거로 아침식사를 때우다.
 하카타역에서 모스버거로 아침식사를 때우다.
ⓒ 이명재

관련사진보기


하카타역에 도착했습니다. 역 청사는 하나의 상업타운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아침 식사는 간단하게 때우기로 했습니다. 수제 모스버거(モスバ-ガ)는 이 지역의 명품 요리라고 합니다. 이국(異國)에서의 첫 식사입니다. 하루 몸과 정신을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든든한 음식물 섭취가 필요합니다. 모스버거가 나왔습니다. 우리의 일정을 위해 간단하게 기도를 했습니다. 영양가에 더해 맛이 이 정도면 손님들이 다시 찾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카타역 광장으로 갔습니다. 하카타기온야마카사(博多祗園山笠)은 후쿠오카(福岡)의 유명한 축제입니다.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을 뿐 아니라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일본인 개개인은 친절하고 어떤 때는 나약하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런 축제에서 보여주는 단결력은 엄청난 에너지원이 됩니다. 그것이 선하게 활용되면 좋겠지만 그릇되게 사용될 땐 인류에 큰 해악을 끼칠 수도 있겠지요.

후쿠오카의 축제 하카타기욘야마카사(博多祗園山笠)

​하카타야마카사(博多山笠)에서 그런 면을 보았습니다. 모두 17번(十七番), 번외로 쿠시다신사(櫛田神社) 등 총 18번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매년 7월 1일부터 15일까지 보름동안 진행되는 이 축제에서 지역 공동체의 단결된 힘을 읽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이 지역 축제에 협조하지 않는 자는 '왕따'시켜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에 큰 타격을 입힌다고 합니다. '집단 따돌림'의 일본말 '이지메(いじめ)'가 여기서 나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카타역 광장에는 휘황찬란하게 꾸민 카자리야마(飾り山, 장식 가마)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하카타역(博多驛) 상점연합회 나가레(流)에서 제작한 것입니다. 마지막 날인 7월 15일 오전 5시에 시작되는 오이야마(追い山)로 하카타의 7개 나가레(流, 일종의 지역 자치체)에서 전통 복장을 한 장정 26명이 육중한 가마를 메고 5.5 km를 달리며 그 빠르기를 경쟁한다고 합니다. 그 출발 지점이 우리가 방문할 쿠시다신사(櫛田神社)입니다.

하카타역 광장에 세워져 있는 하카타 기욘야마카사(博多祗園山笠) 장식가마
 하카타역 광장에 세워져 있는 하카타 기욘야마카사(博多祗園山笠) 장식가마
ⓒ 이명재

관련사진보기


두런두런 거리 구경을 하면서 가다 보니 시간이 예정한 것보다 많이 걸렸습니다. 곁눈질하지 않고 걸으면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30분이 걸렸으니까요. 쿠시다신사 입구, 즉 가미가와바타(上川端) 상점가 입구에도 10번(十番) 천단중앙가(川端中央街) 카자리야마가 서서히 시동을 걸고 있었습니다. 상가를 돌며 필승의 의지를 다질 때, 격려와 함께 상점들은 이들에게 찬조금을 전달한다고 합니다.

쿠시다신사(櫛田神社)와 그 주변들

​쿠시다신사(櫛田神社)는 후쿠오카를 대표하는 신사입니다. 757년에 건립되었다고 전하는 하카타(博多)의 수호신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참고로 '신사(神社)'는 일제시대를 겪어 온 우리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일제는 1938년 중일전쟁을 치르면서 우리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했습니다. 1939년 '조선민사령'을 개정하여 조선인에게 일본식 성씨를 강요, 민족의 정기를 꺾으려 했습니다. 일제는 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국가 의식으로 종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했습니다(신사비종교론). 그러나 기독교를 중심으로 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일본 신을 섬기는 것으로 종교일 수밖에 없다며 강력히 반대합니다(신사종교론).

신사 계단을 오르는데 야릇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후쿠오카를 대표하는 신사여선지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습니다. 차, 얼음과자, 기념품을 판매하는 코너가 마련되어 있었고 한쪽에선 노인 차림을 한 젊은이가 손금을 봐 주고 있었습니다. 때마춰 쿠시다신사 혜비수회관(惠比須會館)에서는 후쿠오카현 화도대표작품전(華道代表作品展)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인공 화초를 예술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이었고, 그 정교함은 예술의 한 영역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듯했습니다. 방문록에 "한국 김천시 이명재 목사"라고 기록하니 외국인이냐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후쿠오카현 화도(華道) 대표작품 전시장에서
 후쿠오카현 화도(華道) 대표작품 전시장에서
ⓒ 이명재

관련사진보기


신사 안쪽에는 축제를 위해 준비된 야마카사(山笠) 카자리야마가 우뚝 서 있었습니다. 크기로는 하카타역(博多驛)의 상점연합회 것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그 카자리야마를 향해 두 손을 모으고 연신 절을 하였습니다. 나오면서 하카다역사관(博多歷史館)엘 들리려 하다가 발길을 돌렸습니다. 300엔의 입장료가 있었고, 또 제가 관심을 두고 있던 명성왕후(민비)를 살해한 낭인의 칼은 전시되어 있지 않다는 안내판이 입구에 붙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준 있는 복합상가 캐널시티(canal city)

​다음 목적지는 캐널시티입니다. 캐널(canal)은 '운하'를 뜻하는 말이잖아요. 소개의 말에 의하면, 약 43,500 평방미터의 부지에 180m의 운하(canal)가 물길을 열고 5개의 존(zone)으로 나누어 각 건물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있다는 군요. 누구의 설계인지 모르겠지만 캐널시티는 건물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주머니가 가벼운 사람들이어서 아이쇼핑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3층에 올라가서 서성이다 보니 서점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른 시각이어선지 한적했습니다. 책을 한 권 뽑아 의자에 앉아 쉼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100엔 동전으로 뺀 원두커피를 마시면서…. ​

​일본의 복합상가에는 서점이 반드시 입점해 있습니다. 책의 나라 일본이라고 하지만 수지타산을 따진다면 책보다는 다른 소비재를 판매하는 것이 투자 효용이 높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책을 판매하게 할까요. 인류 역사는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 이끌어가야 한다는 정책의 반영이 아닐까요. 이전 점에서 우리는 그들로부터 반면교사(反面敎師)의 교훈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몇 평 이상의 상가에는 반드시 서점을 입점케 해서 국민의 정신 함양에 이바지하게 하면 좋겠습니다. 서점으로 손실을 보는 것은 정부가 보전해 주는 한이 있더라도 책 읽는 나라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스마트폰이 책을 대신하는 시류(時流)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이기도 합니다.


캐널시티(canal city)는 하나의 예술 작품
▲ 캐널시티에서 필자 부부 캐널시티(canal city)는 하나의 예술 작품
ⓒ 이명재

관련사진보기


캐널시티에서 여러 그룹의 단체 여행객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룹의 단위도 컸습니다. 여행객들은 손에 손에 버거울 정도로 짐들을 들고 있었습니다. 중국 사람들이었습니다. 동행한 이정인 대표는 서울 명동 거리를 다니며 쇼핑을 할 사람들이 사드 여파로 발길을 일본으로 돌리고 있다며 혀를 끌끌 찼습니다. 위정자의 우둔함이 국가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 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것입니다.

​정오가 다 되어 갑니다. 일본의 음식 값은 매우 비쌉니다. 간단하게 하자고 했지만, 이 대표는 후쿠오카에 왔으니 회전 초밥은 한 번 맛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 회전 초밥집, 온갖 회로 옷을 입은 회 초밥들이 손님이 있든 없든 관계치 않고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네요. 초밥 한 쌍(두 개)이 놓여 있는 그릇에 200엔에서 400엔까지 가격표가 달려 있습니다. 조개를 넣은 된장국을 마지막으로 해 치우고 문을 나섰습니다. 8,000엔의 음식 값은 하나투어 이 대표가 계산했습니다. 상호를 보니 '회전수사 평사랑(廻轉壽司 平四郞)'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회전수사(廻轉壽司) 평사랑(平四郞)에서 회전초밥으로 점심 식사를 하다
 회전수사(廻轉壽司) 평사랑(平四郞)에서 회전초밥으로 점심 식사를 하다
ⓒ 이명재

관련사진보기


대중교통으로 후쿠오카 형무소 찾아가다

​우리 네 사람은 짝을 이루어 두 팀으로 나누었습니다. 적은 숫자도 이렇게 나눌 수가 있군요. 이정인 대표와 아내(박성숙)는 시내 투어를 하기로 하고, 김성현 시인과 저는 후쿠오카 형무소와 키노쿠니아(紀伊國屋) 서점을 방문지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두 팀이 니시진역(西新驛) 근처에 있는 초저가 대형 슈퍼마켓인 돈키호테(ドンキホ-テ)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후쿠오카 형무소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할 작정이었습니다. 지도를 살펴보니 지하철로 하카타역에서 공항선을 타고 후지사키역(藤崎驛)에 내리면 걸어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하카타 지하철 역을 찾는 데에도 몇 사람에게 길을 물어야만 했습니다. 겨우 지하철 역 자동발매기 앞에 섰습니다. 역 이름을 찾기도 쉽지 않았고 설령 찾는다고 해도 요금이 얼마인지 막막했습니다. 옆의 젊은 여인에게 물으니 지기도 홍콩 사람이라 잘 모른다고 했습니다. 한 남성에게 또 묻습니다. "와카리마센(모르겠는데요)"하며 걸음을 재촉합니다. 선한 인상을 가지고 있군요. 연인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스마트폰 검색까지 하면서 친절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300엔 티켓 두 장을 뽑았습니다. 에스컬레이터 타고 지하 2층으로 내려 가서 2번 레일로 오는 지하철을 타면 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꽤 붐볐습니다. 금요일 오후 이른 시각인데도 말입니다. 지하철 상황은 우리나라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다른 것은 우리의 경우는 남녀노소 구별 없이 지하철 내에서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지요. 그것에 비해 일본의 지하철에선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후쿠오카 형무소를 간다고 하니까 초행길인 만큼 택시 탈 것을 이 대표가 권했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큰 부담이 될 뻔 했습니다. 하카다역에서 형무소까지 지하철로도 한참을 가야 했으니까요. 가장 더울 시간대인 오후 1시30분에 후지사키역에 내렸습니다. 역에서 후쿠오카 형무소까지는 채 1 km도 안 될 거리입니다. 많이 걸은 탓으로 피로감도 몰려오고 또 작열하는 태양도 피할 겸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 기사가 후쿠오카 교도소면 걸어가도 되는 거리인데… 라며 말끝을 흐렸습니다.

후쿠오카 형무소 앞에서. 시인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이곳에서 옥사했다.
 후쿠오카 형무소 앞에서. 시인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이곳에서 옥사했다.
ⓒ 이명재

관련사진보기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윤동주의 체취를 찾으려 했으나….

형무소 정문 300 m 전방에서 하차했는데도 정복을 갖춰 입은 서너 명의 교도관들이 우리를 살피며 눈을 부라렸습니다. 일제 때의 형무소 간수들도 저러지 않았을까 언뜻 생각했습니다. 사진 찍을 엄두는 아예 접어야 했습니다. 모퉁이를 돌아 교도관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둑 사진을 찍는 서러움! 앞서 이곳을 방문한 한 한국인은 사진을 찍다가 제지당해 심하게 다투었다고 합니다. 고생하며 여기까지 온 발걸음이 아까워서 형무소 건물을 휘둘러보기로 했습니다.

​우리의 경우 1962년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감옥의 명칭도 형무소에서 교도소로 바뀌었습니다. 일본의 경우는 잘 모르겠습니다. 후쿠오카 형무소는 규모를 대폭 줄여 후쿠오카 구치소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옛 형무소 넓은 터의 일부는 주택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구치소란 확정 판결을 받기 전의 죄인들을 수감하는 기관이잖아요. 5층 규모의 새 건물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어서 일제 말 이곳에서 옥사(獄死)한 윤동주의 체취를 느끼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다만 죽음의 의미만 되새겨 볼 뿐….

​윤동주는 1917년 연변 용정 출생입니다. 간도의 민족사학 대성중을 졸업하고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합니다. 일본으로 유학 동경도(東京都) 릿쿄대(立敎大)에 입학했다가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편입, 공부하다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을 구실 삼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됩니다. 고종사촌 형인 송몽규와 20여 일 시차를 두고 옥사하게 되는데, 여러 사람들의 증언은 그들이 생체 실험 주사를 맞고 죽어 갔다고 합니다. 일본의 이중성이 여과 없이 드러납니다. 미국의 인류학자 루드 베네딕트(Ruth Benedict)는 이런 일본인의 속성을 '국화와 칼'로 표현했지요.

후쿠오카 구치소를 뒤로 하고 다음 장소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갈 때는 택시를 탔지만 돌아올 때는 후지사키역까지 걸었습니다. 섬나라 무더위는 바닷바람이 많이 가라앉혀 줄 것으로 생각했지만 체감하기엔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더위도 식힐 겸 일본 사람들의 풍속도도 지켜볼 겸 역 근처 롯데리아에 들어갔습니다. 콜라를 마시면서 김 시인과 교통편 궁리를 했습니다. '배(카멜리아)-택시-지하철'을 타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대중 교통수단에 속합니다.

시내버스 타고 키노쿠이아 서점으로 - 10엔의 기적?

​왔던 길로 되돌아가면 길 잃을 염려는 줄어들 것입니다. 올 때까지만 해도 지하철로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김 시인에게 제안했습니다. 타지 않은 시내버스 편으로 가자구요. 의기투합한 우리는 텐진역(天神驛) 가는 버스를 타기로 했습니다. 다음 목적지 키노쿠니아(紀伊國屋) 서점은 텐진역 근처에 있습니다. 버스 탈 때부터 반복해서 물어 보았습니다. 텐진역을 가는 버스인가, 거기까지 버스 요금은 얼마인가? 요금은 성인 한 사람 당 260엔, 내릴 때 계산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버스 운전석 위 안내판에 "次は 天神驛です(다음은 텐진역입니다)"라는 문장이 떴습니다. 잔돈이 준비되지 않아서 미리 운전석으로 갔습니다. 두 사람 요금을 내기 위해서요. 운전기사에게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며 "니닌(ににん, 2人)"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지폐 투입기를 가리키며 넣으라고 했습니다. 나름 준비를 철저하게 한다고 접어 주머니에 넣어 둔 것이 사달이 나고 말았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 기계가 계속 토해내는 거예요. 진땀이 났습니다.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지폐를 넣었는데 고맙게도 받아들이더군요. 260엔 × 2인 = 520엔, 1천 엔 지폐를 냈으니까 거스름돈으로 480엔이 기계에서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느낌이 우선 묵직했습니다. 작은 액수의 동전임을 감안해도 양이 꽤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내에서 길 안내를 해 준 중년 여성은 하차, 건물이 보이는 교차로까지 와서 우리의 목적지를 가리켜 주었습니다.

후지사키 역에서 키노쿠니아 서점까지는 시내버스를 탔다. '10원의 기적'을 가져다 준 버스
▲ 후지사키역에서 텐진역까지 타고 온 시내버스 후지사키 역에서 키노쿠니아 서점까지는 시내버스를 탔다. '10원의 기적'을 가져다 준 버스
ⓒ 이명재

관련사진보기


길을 걸으면서 거스름돈으로 받은 동전을 세어 보았습니다. 100엔, 50엔, 10엔짜리가 골고루 섞여 있었습니다. 합 990엔! 1천 엔 지폐를 내고 990엔을 받다니…. 김 시인은 옆에서 '10엔의 기적'이라면서 후지사키역에서 텐진역까지 두 사람이 10엔, 한 사람씩 따지면 5엔에 온 것은 기적 이외의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이 기적의 증거물을 숙소로 돌아갈 때 택시비로 쓰자며 사안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준쿠도 서점에서 책향(冊香)에 취하다

​키노쿠니아 서점으로 가는 길목에 준쿠도(ジュンク堂) 서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로 꽤 붐비는 대형 서점이었습니다. 지하 1층, 지상 4층 총 5층 규모였는데, 책이 분야별로 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기독교 관련 서적을 물어 보니 3층으로 가시라고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습니다. 제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여직원이 함께 움직이며 끝까지 안내하는 정성을 보였습니다. 복음선교회에서 출간한 요미다 이사무(米田 勇)의 <나까다 쥬지 전(中田重治傳>이 혹 있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나온 지가 너무 오래 되어 절판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준쿠도서점 3층 기독교 코너에서 직원과 책에 대해 대화하고 있는 필자
▲ 준쿠도서점에서 책을 찾다 준쿠도서점 3층 기독교 코너에서 직원과 책에 대해 대화하고 있는 필자
ⓒ 이명재

관련사진보기


일본의 인쇄술과 제본 기술은 세계적이라고 합니다. 거기에 비례해서 책값도 비쌌습니다. 학술서적은 괜찮다 싶으면 5천엔(우리 돈으로 5만 원 정도)을 상회했습니다. 한 시간 반을 책의 요람 속에 파묻혀 있다가 그냥 나오기가 미안해서 신조문고(新潮文庫) <어린왕자(星の王子さま)>(소비세 포함 518엔)와 일본어 <新約聖書>(소비세 포함 702엔) 두 권을 샀습니다. 소비자가 물어야 하는 일본 도서의 세금은 8%라고 합니다. 

​1층 카운터에서 계산을 해야 했습니다. 금요일 오후인데도 사람들이 줄을 서서 계산했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일본인들, 일본이 경제 대국으로 불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대동아전쟁' 운운하며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들과 한 판 승부를 벌이려는 계산에는 책으로 무장한 국민이 든든한 무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일본의 한국학 연구자가 우리와 버금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일종의 두려움을 느낀 것은 저만의 현상일까요.

평일인 금요일 오후인데도 서점 안은 손님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책을 좋아하는 국민임을 알 수 있었다.
▲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평일인 금요일 오후인데도 서점 안은 손님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책을 좋아하는 국민임을 알 수 있었다.
ⓒ 이명재

관련사진보기


키노쿠니아 서점엔 왔다 간다는 신고만 했습니다. 몸이 피곤한 게 주 이유였지만 책 순례가 중복되는 것도 작용했습니다. 준쿠도에 없는 책이 키노쿠니아엔 간혹 있긴 하겠지만 그것들을 변별하며 즐길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정인 대표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돈키호테에서 철수, 숙소로 돌아와 있다구요. 택시를 타고 피콜로 하카타(숙소)로 가자고 했습니다. 14일 밤, 하카타기온야마카사 축제 전야입니다. 길이 몹시 막혔습니다. 배테랑 운전기사는 골목을 요리조리 골라 오긴 했지만 1천 엔 미만 나올 택시요금이 1천6백 엔 가까이 나왔습니다. 버스비 '10엔의 기적'은 이렇게 해서 몇 시간 만에 사라졌습니다.

라면을 먹으면서 일본을 토론하다

저녁 식사는 라면입니다. 여행사 대표답게 이정인이 라면과 김치 그리고 고추장을 준비해 왔습니다. 이국에서 먹는 라면 국물이 싫지 않았습니다. 없어서가 아니라 절약하기 위해 먹는 라면이어서 심적 위로가 되었습니다.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합니다. 그 나라 나름의 장점과 단점이 있을 것입니다. 장점을 무조건 배척할 일도 아니며 단점은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으면 될 일입니다. 우린 라면을 먹으면서 일본이란 나라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열띤 토론을 펼쳤습니다. 창밖으로 비치는 도로에는 소형 자동차가 줄을 지어 달리고 있었습니다.

하루의 문화 기행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라면을 먹으면서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토론했다.
▲ 이국에서 라면으로 저녁 식사를 대신하다 하루의 문화 기행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라면을 먹으면서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토론했다.
ⓒ 이명재

관련사진보기


이 글의 제목을 '후쿠오카 문화기행'이라고 했습니다. 처음 계획한 곳 중 여러 기관을 둘러보지 못했습니다. 아카렌가문화관(赤煉瓦文化館), 후쿠오카시미술관(福岡市美術館), 후쿠오카박물관(福岡市博物館), 후쿠오카문학관(福岡文學館), 세이난가쿠인대학(西南學院大學) 등은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요. 함께 동행함으로 자유 여행의 묘미를 풍성하게 해 준 김성현 시인과 하나투어 김천전판점 이정인 대표 그리고 아내(박성숙)에게 다시 한 번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태그:#후쿠오카, #문화기행, #자유여행, #하카타기욘야마카사, #후쿠오카형무소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