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리왈샤의 한낮은 원숭이들 세상이다. 인도 신화 속의 대장군 하누만과 서유기의 손오공 모두가 원숭이 였다.
 리왈샤의 한낮은 원숭이들 세상이다. 인도 신화 속의 대장군 하누만과 서유기의 손오공 모두가 원숭이 였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6월 하순. 리왈샤의 밤은 침낭을 사용해야 할 만큼 싸늘하지만 한낮은 조금만 걸어도 땀이 날 정도로 무덥다. 원숭이들이 한낮의 더위를 식히기 위해 호숫가 저만치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다. 녀석들은 긴 팔을 이용해 축축 늘어진 버드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가 호수에 풍덩 풍덩 뛰어들고 있다.

무더운 한낮에는 호수 주변을 도는 순례자들 또한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사람들 뿐 아니라 제 영역 순찰 돌듯 어슬렁거리는 개들조차 호수 주변 어딘가의 그늘 밑에 축 늘어져 있다. 원숭이들만 이 나무 저 나무 옮겨 다니고 있다. 한낮은 원숭이 세상이다.

이곳 리왈샤의 원숭이와 개들은 서로 원수처럼 으르렁거리는 견원지간이라기보다는 견원평화조약을 맺은 것처럼 보인다. 원숭이와 개들은 마주보고 있지 않는 이상 싸움질을 하지 않는다. 한낮의 원숭이들은 상가 주변이나 호숫가 할 것 없이 사람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쓰레기통을 뒤져 이것저것 주워 먹거나 사람들로 부터 얻어먹는다.

늦은 오후가 되면 호숫가 나무 그늘 밑에서 퍼질러 잠들어 있던 개들이 어슬렁거리며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한다. 한낮의 개들은 원숭이들이 설쳐대도 상관하지 않는다. 원숭이와 개들 사이에 나름의 질서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도시 사람들은 밤과 낮 모두를 지배하려 한다. 이곳 리왈샤 사람들은 열시가 넘으면 거의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지만 자본을 생명처럼 여기는 도시에서는 늦은 밤까지 불야성처럼 불을 밝히고 뭔가로 욕망을 채우려 한다.

그렇다고 원숭이와 개들이 영역 다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원숭이는 원숭이들 끼리 개들은 개들끼리 서로 나름대로의 영역이 있어 보인다. 어느 놈이 어느 놈인지 구별이 쉽지 않은 원숭이와는 달리 개들은 주둥이가 길거나 뭉뚝한 놈, 흰털, 노랑 털, 검정 털을 두르고 있어 쉽게 구별 할 수 있다.

개들의 영역은 호수를 중심으로 너른 공터와 상점들이 즐비한 두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상점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녀석들을 보면 늘 그 녀석들이 그 녀석들이다. 공터 주변을 영역으로 삼는 녀석들도 마찬가지다. 바라나시에서 만났던 녀석들이 그랬듯이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녀석이 있으면 떼거리로 몰려들어 영역 밖으로 쫒아낸다. 더러 절름발이 개들이 보이는데 녀석들은 영역 다툼에서 상처 입은 녀석일 것이었다.

리왈샤 호숫가에 늘어져 있는 개들.
 리왈샤 호숫가에 늘어져 있는 개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인도 개들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금방 알아차린다. 내가 머물렀던 숙소의 방문 앞에 누워 있는 개들.
 인도 개들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금방 알아채린다. 내가 머물렀던 숙소의 방문 앞에 누워 있는 개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한국에서는 거의 모든 개들이 묶어 있지만 리왈샤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는 거의 모든 개들이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 하고 있다. 한국 개들보다는 인도 개들과 사귀기가 수월하다. 나는 어려서부터 늘 개들을 곁에 두었다. 인도 여행길에서도 늘 내 곁에 개들이 있어 왔다.

북인도 코사니에서는 산속에서 무릎이 심하게 다쳤을 때 옆에서 지켜 줬던 녀석이 있었고 문시아리에서는 무시무시하게 생긴 양치기 개들과 친구가 되어 놀기도 했다. 안나푸르나를 머리맡에 이고 있는 네팔 란드룩에서도 그랬듯이 이곳 리왈샤에서도 숙소 앞에 진을 치고 누워 있는 녀석들이 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자유로운 생명은 너그럽다. 철장에 갇혀 있는 개가 자유롭게 활보하는 개를 향해 짖어 대는 것처럼 억압된 구조 속에 살아가는 사람 또한 다른 누군가에게 적대적이기 마련이다. 인도나 네팔에서 자유롭게 활보하는 개들 중에 사람들에게 적대적으로 이빨을 드러내는 녀석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없었다.

개와 소들이 어슬렁거리는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티베트 승려들
 개와 소들이 어슬렁거리는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티베트 승려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축구 시합을 하고 있는 시크교인들과 티베트 사람들.
 축구 시합을 하고 있는 시크교인들과 티베트 사람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순례자들 그리고 개와 원숭이와 함께 누리는 리왈샤에서의 일상은 반복의 연속이었다. 오전에는 동갑내기 멕시코 사내 래미와 함께 파드마 삼바바의 동굴 수행지에서 명상을 하고 더위가 한 풀 꺾이는 늦은 오후가 되면 티베트 사원이며 시크교 사원을 둘러보거나 순례자들과 더불어 염주를 굴려가며 호수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래미와 나는 오늘도 침묵 수행자처럼 호수 주변을 걸었다. 둘 중 누군가 멈춰 서면 덩달아 멈춰 서서 같은 시선으로 무엇인가를 바라보았다. 호수 주변에는 주차장 겸 운동장으로 쓰이고 있는 너른 공터가 있다. 늦은 오후가 되면 티베트의 어린 승려들이 이 운동장에서 개나 말, 소들과 뒤엉켜 축구공을 찬다. 우리는 늘 그래왔듯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운동장 부근에 적당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늘은 머리에 터번을 둘러쓴 시크교인과 티베트 사람들이 축구시합을 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머릿수가 적은 시크교인들 편에 두서너 명의 티베트 청년들이 합류하고 있다. 거기에 누구 편도 아닌 개들도 뒤섞여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다. 개 때문에 공을 놓친 덩치 큰 시크교인이 개를 쫒아내다 말고 껄껄껄 호탕하게 웃는다. 공을 차던 선수들, 그리고 나와 래미를 비롯한 구경꾼들 할 것 없이 모두에게서 유쾌한 웃음을 와르르 쏟아낸다.

그 어떤 적대감 없이 종교와 종교, 사람과 동물이 한데 뒤엉켜 평화를 수놓고 있는 리왈샤의 오후는 종교의 힘으로 다가온다. 본래 종교가 추구하는 바가 이러할 것인데 불행하게도 지구촌 곳곳에서 너 죽고 나 죽자는 비명소리, 종교의 다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본래 종교의 의미를 상실하고 권력이나 탐욕에 사로잡혀 서로를 증오하고 살생까지 일삼고 있다.

래미와 나는 이 평화로운 풍경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운동장을 누비고 다니는 저 개와 소들을 서울 시내 한 복판에 풀어 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나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저 소들을 멕시코시티 한복판에 풀어 놓고 싶다는... 사람들은 혼잡한 도시를 활보하는 소들을 보는 순간 저마다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흘러나오겠죠."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잠시나마 모든 일손을 멈추고 느린 걸음의 소를 바라보고 있는 상상만 해도 기분 좋은 일이지요."

그렇게 나와 래미는 소와 개, 그리고 사람이 뒤엉켜 있는 운동장을 바라보며 평화롭고도 행복한 상상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렇게 사흘째 아침저녁으로 만나고 있는 래미와의 소통은 눈빛과 몇 마디의 말로도 충분했다.

래미와의 관계가 그렇듯이 인도와 네팔을 여행하면서 평화로운 순간들은 언어와 상관없이 찾아오곤 했다. 이럴 때마다 내가 영어를 깊이 있고 현란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현란한 언어나 말들이 소통보다는 갈등의 도구로 전락할 될 때가 더 많기 때문이다.

리왈샤 호수의 잉어들. 수많은 잉어들이 서로 상처 입히지 않고 먹이를 받아먹고 있다.
 리왈샤 호수의 잉어들. 수많은 잉어들이 서로 상처 입히지 않고 먹이를 받아먹고 있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우리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힌두사원 근처에 거대한 소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었고 사원 바로 앞 호수 가에서는 팔뚝만한 잉어들이 사람들의 발밑까지 몰려들고 있었다. 그 앞에서 흰 옷을 입은 힌두교 노인이 잉어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고 원숭이 한 마리가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녀석은 계단 가까이로 몰려든 잉어들을 노리는 듯 했다. 하지만 녀석은 저리 가라는 노인의 손짓에 별 성과 없이 군침만 흘리고 돌아선다.

물고기에게 먹이를 던져 주고 있는 힌두 노인에게서 문득 인도의 창조신 마누의 자비심에 은혜를 갚은 물고기가 떠올랐다. 인도의 창조 신화에 보면 마누에게 세상의 종말로부터 살아남을 방도를 알려준 존재가 바로 물고기라 전해져 오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 리왈샤에서 처럼 오래된 힌두사원 근처에는 살이 포동포동한 잉어의 연못을 종종 볼 수 있다. 저 힌두 노인은 물고기들에게 자비를 베풀게 되면 그만한 대가를 받을 것이라는 창조 신화 속의 믿음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잉어는 한국의 사찰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찰의 목어들 대부분이 잉어의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당나라 때 불경을 구해 인도에 다녀와 기행문 '대당 서역기'를 남긴 현장법사. 현장법사에게는 수많은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중에 다음과 같은 목어 이야기가 있다.

현장법사가 인도 순례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도중 어느 한 집에 머무르게 된다. 때마침 그 집에 큰 우환이 있었다. 새로 맞이한 아내가 남편이 사냥을 떠난 틈을 노려 전처소생의 갓난아기를 강물에 던져버렸던 것이다. 남편인 집 주인은 이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 채 죽은 아들을 극락으로 인도할 천도재(薦度齋)를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집 주인은 현장법사가 천도재를 도와줄 것으로 믿고 온갖 음식으로 대접했다. 하지만 현장법사는 단지 물고기가 먹고 싶다며 강에서 큰 물고기를 잡아오라고 했다. 집 주인이 잡아온 물고기의 배를 가르자 잃어버린 아들이 나왔는데 신기하게도 그 때까지 살아있었던 것이다. 물고기가 아기를 보호 했던 것이다.

집 주인은 자신을 희생하고 아들을 살려준 물고기에게 은혜 갚을 방도를 현장 법사에게 물었다. 현장 법사는 "나무로 물고기 모양을 만들어 달아 두고 재를 올릴 때마다 두드리시오."라고 말했다. 그 주인은 현장법사가 일러주는 대로 했고 그것이 목어의 유래라고 한다.

리왈샤의 잉어들은 밤에는 좀 더 깊은 호수 안쪽으로 들어가 펄떡펄떡 수면위로 뛰어오르곤 한다. 낮에는 사람들 곁으로 다가와 입을 뻐금거린다. 노인이 먹이를 던져 줄 때마다 수많은 잉어들이 뒤엉켜 달려들고 있지만 비닐이 심하게 벗겨져 있거나 상처 입은 녀석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먹이를 받아먹겠다고 입을 쩍쩍 벌리고 달려들고 있지만 사람과는 달리 서로에게 날카로운 지느러미를 세워 상처를 입히지 않고 있다. 만약 다른 동료들을 헤쳐 가며 모두가 자기 자신만 배불리 먹겠다고 날카로운 지느러미를 곧추 세우고 달려든다면 서로 깊은 상처를 입게 될 것이었다.

나는 이곳 리왈샤에 오기 전 북인도 코사니 근처의 중세기 때 지어진 힌두사원 앞에서 자맥질하고 있는 큼직한 잉어들을 보면서 낚시의 손맛을 떠올렸었다. 나는 오랜 세월동안 낚시를 즐겨왔다. 낚시 바늘에 물려 파닥거리며 몸부림치는 물고기의 쾌감을 느껴왔다.

낚시 바늘에 걸려 나오는 팔뚝만한 잉어의 쾌감을 떠올리는 순간, 내면에서 질책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입버릇처럼 폭력을 거부하고 평화와 자비를 말하고 있지만 너야말로 평화와 자비를 논할 자격이 없다. 네가 낚시를 통해 쾌감을 느낀다는 것은 폭력을 즐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네 안에는 낚시 바늘에 걸린 물고기들의 비명소리로 가득 차 있다. 살생의 악업이다. 다른 생명의 고통을 즐겼던 그 폭력적인 악업이 너무 많이 쌓여 있어 그동안 네가 어리석고도 탐욕스런 분노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나의 쾌감을 위해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한 수많은 뭇 생명들의 증오심이 내 안에 가득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악업은 나를 해치고 나와 가까운 누군가를 알게 모르게 해칠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유 없는 살생을 쉽게 멈추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악업이 깊기 때문이었다.

다시 내면의 소리가 들려왔다.

"낚시 바늘에 걸려 고통에 몸부림치는 물고기로부터 쾌감을 느껴가며 기어코 손아귀에 쥐고 싶은 것이 탐욕의 속성이다. 그 탐욕을 움켜쥐는 순간 악업이 뒤따라오는 법, 하지만 뭇 생명의 소중함을 저버리지 않고 자비를 베풀면 그 만큼 고통에서 벗어나 네 안에 평화가 깃들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너의 악업은 하나 둘 소멸 될 것이다."

래미와 헤어져 숙소로 돌아오는데 리왈샤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거대한 불상, 파드마 삼바바가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너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는 악업들은 탐진치(탐욕스럽고 분노하고 어리석음)의 결과물인 것이다.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면 고통의 수레바퀴는 계속해서 굴러갈 것이다."

이곳 리왈샤 마을 사람들을 괴롭혀 왔던 악귀, 요괴들을 물리쳤다는 성자, 파드마 삼바바. 어쩌면 그가 물리쳤다는 요괴는 고통의 원인, 탐진치 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파드마 삼바바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이곳 마을 사람들에게 탐진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설파했을 것이었다.

상처 입은 리왈샤 원숭이에게서 인도 신화속 원숭이 신인 하누만과 서유기의 손오공을 떠올렸다.
 상처 입은 리왈샤 원숭이에게서 인도 신화속 원숭이 신인 하누만과 서유기의 손오공을 떠올렸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래미와 헤어져 저녁 식사꺼리로 바나나와 빵을 사들고 숙소에 돌아보니 담장 위에 원숭이 한 마리가 멍 때리며 앉아 있었다. 녀석의 다리에 깊은 상처가 보였다. 한바탕 세력 싸움을 벌인 모양이다. 영광의 상처는 없다. 세력 싸움에 승리한 상처라 하여도 고통스러운 상처일 따름이다. 영광의 상처를 운운하는 것은 권력자들의 농간에 불과하다.

저 녀석은 분명 다른 영역을 침범했거나 세력 싸움에 밀린 것이 틀림없다. 사람이든 원숭이든 권력을 장악한 놈들 곁에는 늘 따르는 무리들이 있기 마련이다. 상처 입은 원숭이를 지켜보다가 뜬금없이 서유기의 손오공과 함께 조금 전 빵가게에 걸려 있던 그림 사진, 고대 인도의 신화 속 인물 하누만이 떠올랐다.

인도에는 중국의 손오공이 나오기 훨씬 이전부터 손오공과 흡사한 하누만(Hanuman)이 있어 왔다. 하누만은 중국의 손오공처럼 인도에서 아주 유명한 고대 신화 속의 인물이다. 인도의 힌두 사원에서 어렵지 않게 원숭이의 형상을 볼 수 있는데 그가 바로 하누만이다.

하누만은 힌두교의 대서사시 '라마야나(Rmyaṇa)'에 등장한다. 바람의 신과 요정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하누만은 원숭이들의 왕이다. 손오공처럼 엄청난 도력을 지닌 그는 히말라야 산으로 날아가 약초의 산을 통째로 옮겨와 전쟁에서 다친 라마의 군사들을 치료해주고 인도와 실론(스리랑카) 사이의 해협을 단 한 번의 도약으로 건너기도 한다.

손오공이 삼장법사를 도와 불법을 수호하며 요괴를 물리치는 용맹한 원숭이라면 하누만은 라마 신을 도와 악마군대를 물리치는 용맹한 원숭이 신인 것이다. 거기다가 손오공의 손에 들려 있는 여의봉은 하누만의 손에 든 쇠망치와 흡사하다.

두 인물의 이력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손오공은 수보리 존자에게 배운 신통으로 천상의 복숭아 연회를 망쳐놓고 난동을 부리다 결국 돌산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하누만 또한 천상계에 살면서 태양신을 괴롭히다 인드라 신에 의해 땅으로 추방된 인물이다.

인도에서 쉽게 볼수 있는 인도 고대 신화 속에 나오는 하누만 그림 사진. 서유기의 손오공은 하누만을 닮아 있다.
 인도에서 쉽게 볼수 있는 인도 고대 신화 속에 나오는 하누만 그림 사진. 서유기의 손오공은 하누만을 닮아 있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하누만은 서유기의 손오공 보다 몇 천 년 앞선 신화 속 인물이다. 그러다보니 서유기의 손오공은 하누만의 신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오고 있다. 어느 신화가 원조인가는 그리 중요치 않다. 나는 다만 서유기에 숨겨져 있는 불법의 깊이에 놀라곤 한다.

서유기의 삼장법사는 실제로 당나라 때 인도에서 불경을 구해온 현장법사를 모델로 삼았다. 삼장법사는 세 제자인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과 함께 오묘한 진리를 담은 불경을 구하기 위해 인도로 떠난다.

삼장법사의 세 제자들은 모두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 반면에 원숭이들의 대왕, 손오공은 분노의 화신처럼 난폭한 면이 있고 돼지, 저팔계는 탐욕스러우면서 편협하고 하천의 괴수였던 사오정은 물고기처럼 어리석은 면이 있다. 이들 세 인물의 면면에서 탐진치를 떠올리게 한다. 하여 이들이 부처님의 나라 인도로 향하는 것은 불법을 깨달아 고통의 원인인 탐진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삼장법사 일행은 불법을 구하러 가는 길목에서 중생들을 괴롭히는 요괴들을 물리친다. 이 대목에서 '티베트 죽음의 서'의 저자인 파드마 삼바바의 행적과 겹쳐진다. 파드마 삼바바의 본업 중에 하나가 요괴를 물리치는 주술사였기 때문이다.

현장 법사는(玄奘, 602년 ~ 664년) 7세기 사람으로 알려져 오고 있지만 파드마 삼바바의 출생과 입적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8세기에 탄트라 불교를 부탄과 티베트에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이 살다간 시기가 동시대는 아니지만 길게 잡아도 100년 차이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서유기의 삼장법사와 파드마 삼바바의 행적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중생들을 괴롭히는 요괴를 물리쳤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요괴들은 어떤 존재였을까.

요괴는 기괴한 그 어떤 존재라기보다는 상징물에 불과할 것이었다. 요괴는 중생들을 어리석음으로 몰고 가는 삿된 믿음이나 중생들을 괴롭히는 삿된 인간들, 그리고 중생들 저마다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탐욕스럽고 분노하고 어리석은 마음, 탐진치가 아니었을까싶다.

자신을 괴롭히고 결국에 가서는 타인을 괴롭히게 되는 탐진치야 말로 요괴인 것이었고 또한 고통의 원인인 요괴로부터 벗어나는 길이야 말로 불법이 아니었을까. 그 요괴들은 내 마음 속에도 있다. 어쩌면 나는 내 마음자리에 박혀 있는 탐진치라는 요괴들을 물리치기 위해 고행 길을 나서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태그:#인도 리왈샤, #하누만, #손오공, #탐진치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