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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거의 20년 전에 신영복 선생님의 <더불어 숲>(신영복의 세계여행)을 처음 접했습니다.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문명과 사람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따뜻한 글과 그림 엽서. 20대 초반의 대학생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는데 큰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이며 그 감동으로 막연하게 세계일주에 대한 꿈도 품게 됐습니다. 인생의 반환점에 이르렀다고 생각되는 2017년, 배낭여행자가 되어 그 꿈을 실행에 옮깁니다. 당신이 보낸 첫 번째 엽서에 적혀있던 '언젠가 나는 당신의 답장을 읽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문구에 무모한 용기를 얻어 여행지에서 편지를 띄웁니다. 이 여행기는 당신 그리고 또 다른 수많은 당신들과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 기자 말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입구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입구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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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BEIT MACHT FREI'(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들어가는 입구에 독일어로 새겨진 이 문구는 나치 독일의 기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흐린 날씨는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들어가라는 신호인 듯 했습니다. 궂은 날이었지만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지 않고서는 입장하기 힘들기 때문에 많은 인파가 강제수용소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다양한 국가에서 온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인류사가 남긴 참혹한 역사의 현장으로 걸어 들어 갑니다. 영어, 독일어, 폴란드어 등 여러 언어로 진행되는 가이드 투어의 행렬은 끝이 없었습니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시작으로 수용소의 주요 시설을 둘러보는 시간 동안의 풍경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침묵'이었습니다. 마지막 관람장소라고 할 수 있는 가스실과 시체 소각장을 나서는 순간에는 학생들이나 어린 아이들도 아무 말을 하지 않을 정도로 모두가 깊은 침묵과 탄식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수용소에 갇혔던 여인들의 머리털로 짠 직물, 이곳이 죽음의 나락인 줄 모르고 챙겨왔던 생활용품이며 가방, 안경, 신발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전시실을 볼 때면 아수라장 같았을 그날의 참혹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인류의 광기가 만든 폭주 기관차, 멈췄다고 말할 수 있을까

돌아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는 빛바랜 신발들은 당시의 참상을 이야기해주고 있었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는 빛바랜 신발들은 당시의 참상을 이야기해주고 있었습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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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각지에서 열차를 타고 강제로 끌려온 유대인들은 이곳에서 내려 노역장과 가스실의 갈림길에 섰습니다.
 유럽 각지에서 열차를 타고 강제로 끌려온 유대인들은 이곳에서 내려 노역장과 가스실의 갈림길에 섰습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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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는 유대인을 비롯하여 폴란드 정치범, 소련군 포로, 집시 등이 주로 수감되었습니다. 흔히 부르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라 함은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와 차로 5분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는 비르케나우 제2수용소를 함께 의미합니다.

비르케나우 제2수용소는 제1수용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규모가 컸습니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더 많은 사람을 더 효과적으로 죽이기 위해 고심했던 나치의 광기를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유럽 각지에서 열차를 타고 끌려온 유대인들이 내렸던 장소가 바로 제2수용소입니다. 여기서 선별과정을 거쳐 노동력으로써 가치가 있어 보이는 남자들은 제1수용소 노역장으로 이동하고 나머지 노인, 여성, 아동 등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 제2수용소 가스실로 보내졌습니다.

나치 스스로 그들의 죄악을 인정이라도 하듯 패전이 임박하자 수용소의 시설을 파괴하고 문서를 폐기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비르케나우 제2수용소에 온전한 건물은 얼마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파괴된 건물의 잔해 앞에 전시된 당시의 기록사진이 방문객들의 상상을 돕고 있었습니다.

제2수용소를 관통하는 기차길 끝에는 강제수용소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가 있었습니다. 희생자들이 주로 사용했던 23개의 언어로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추모비에서 단연 눈에 띄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국기를 몸에 두르거나 유대인 전통 모자 키파를 쓴 사람들이 무리 지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함께 온 사람들이 원을 만들어 기도하고, 어깨동무를 한 채로 노래 부르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비르케나우 제2수용소 철길 끝에 마련된 희생자 추모비.  수많은 유대인들의 참배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비르케나우 제2수용소 철길 끝에 마련된 희생자 추모비. 수많은 유대인들의 참배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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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참배를 보며 여러 감정이 교차했습니다. 피해자가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경구를 실천하는 유대인들의 역사의식이었습니다. 쓰라린 과거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철저한 교육과 문화는 우리에게는 여전히 부족하고 절실하게 요구되는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굴욕적인 2015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에 반발하여 추운 겨울 평화의 소녀상을 지켰던 대학생에게 지난 5월 법원이 200만 원의 벌금형을 내렸던 사건이 아프게 떠올랐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오랜 기간 동안 억압과 차별의 고난을 견뎌야 했고, 2차대전 중에는 수백만 명이 희생되었던 유대인. 그런 그들에게 민족적인 문제를 비판적으로 이야기 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말하기에 앞서 한 번 숨을 고르게 됩니다. 그러나 2차대전 이후 이스라엘과 사실상 미국을 움직이는 슈퍼파워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과 아랍권 국가들에게 보이는 행태는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피해자로서의 기억을 발전적으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가해자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는 그들이 이스라엘 국기를 온몸에 휘감은 모습은 보기에 편하지 않았습니다.

기차길 끝에 조성된 추모비는 '아우슈비츠의 고통은 이제 끝났다'는 것을 기념하여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과연 인류의 아집과 광기가 만들어 내는 폭주 기관차가 멈춰 섰다고 장담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해자가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

베를린 중심부에 위치한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외부에는 콘크리트벽이 숲처럼 세워져 있었습니다.
 베를린 중심부에 위치한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외부에는 콘크리트벽이 숲처럼 세워져 있었습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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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에서 독일로 이동했습니다. 아우슈비츠 방문의 연장선에서 가장 먼저 들렀던 곳은 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이었습니다. 정식 명칭은 '학살된 유럽의 모든 유대인을 위한 기념공간'(Memorial to the Murdered Jews of Europe)입니다.

기념관 외부는 회색 콘크리트벽 수백개가 사람이 걸을 정도의 간격을 두고 빽빽하게 세워져 있었습니다. 바깥쪽은 낮은 높이의 벽이지만 중앙으로 걸어갈수록 벽의 높이가 높아지고 땅은 낮아져서 어두운 중압감을 느끼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강제로 수용소로 끌려가고 가스실로 보내져 죽음에 이르는 과정 동안 얼마나 막막한 두려움을 느꼈을지 경험해보라는 의미에서 디자인된 조형물이라고 합니다. 

조형물의 철학보다 더 인상 깊었던 것은 기념관의 위치였습니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은 베를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브란덴부르크문과 포츠담광장 사이에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가해자가 감추고 싶은 과오를 마지못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베를린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찾고 추모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과거의 잘못에 대한 진실한 사죄의 태도가 잘 드러나 보였습니다.

지하에 위치한 내부 기념관은 입장료도 없었습니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만행으로 피해를 본 유대인들의 역사가 현대적인 첨단설비를 갖춘 전시실에 매우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실은 유럽의 각 도시에서 평범하게 살아 가다가 나치에 의해 고통 받아야 했던 유대인 가정의 이야기를 사진과 함께 가족앨범 소개하듯 꾸며 놓은 코너였습니다. 단순한 피해 숫자의 나열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행복이 어떻게 순식간에 파괴되어 갔는가를 보여줌으로써 방문객들의 공감을 크게 불러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전시관을 돌아 나오며 가해자가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1999년에 독일 연방의회가 설립을 의결하고 착공하여 2005년에 개관되었습니다. 종전 이후부터 국가적인 차원에서 과거사를 반성하고 주변 피해국들에 진심으로 사죄했던 독일은 수도의 한복판에 참회와 추모의 공간을 마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교통사고 합의를 하듯이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윽박지르는 일본의 천박한 역사인식과는 결을 달리 합니다. '불가역'이라는 용어는 이러한 참회의 문장 앞에 쓰는 것이라고 독일은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한편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아픈 기억이었습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해서 우리가 남을 아프게 했던 가해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베트남전쟁 양민학살입니다. 

한국 언론에서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 현충일 추념사 중 일부분이 베트남에서는 논란이 되었습니다. '베트남전 참전용사의 헌신과 희생을 바탕으로 조국경제가 살아났다'는 부분이었는데, 현충일 추념사 전체의 취지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 표현은 베트남인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매우 불쾌했을 것입니다. '한국 경제는 한국 국민들의 희생과 투쟁, 그리고 창조적인 노동 정신으로 일구어진 것이지, 베트남전 참전 덕분은 아닐 것'이라는 베트남 전문가의 비판은 뼈 아픈 울림을 줍니다.

과거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시절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양민학살과 관련하여 개인적인 차원의 유감을 표명한 바는 있었지만, 아직까지 우리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베트남전쟁의 과오에 대한 어떤 메시지를 내놓은 적은 없었습니다. 

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내부 전시실 모습.  평범했던 유대인 가정이 나치 만행에 의해 어떻게 파괴되고 고통받았는지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내부 전시실 모습. 평범했던 유대인 가정이 나치 만행에 의해 어떻게 파괴되고 고통받았는지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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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죄 없는 용서와 책임 없는 사죄는 은폐의 합의입니다."

20년 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를 방문한 후의 심정을 이렇게 남겼던 당신의 메시지를 기억합니다. 이 말은 역사문제를 대함에 있어서 시공을 초월하여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과오에 대한 참회와 반성은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가 집단의 차원으로 옮겨가면 상황은 굉장히 복잡해지기 마련입니다. 집단 내에 수많은 이해관계와 입장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역사의 진실을 규명하고 과거를 반성고자 함에 있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관점은 인류의 보편적 양심과 가치라는 기준입니다. 나치와 일본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동원되었던 독일군, 일본군 병사 개개인을 처벌하기 위함도 아니요,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를 비난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전쟁에 동원되었던 그들도 집단의 번영과 영광이라는 허울 하에 자행된 구조적인 폭력의 또 다른 피해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평범한 공무원이 반인륜적인 학살의 관리인이 되고, 사명감 넘치는 군인이 명분 없는 살육의 당사자가 될 수 있는 비극은 예방되어야 합니다.

홀로코스트 기념관 초입에는 유대인 출신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의 어록이 인용되어 있었습니다. 그 문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에 써있던 나치 독일의 기만적인 문구와 대조를 이루는, 현대 독일의 참회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를 나아감에 있어 모두에게 필요한 생각과 태도에 대하여 일갈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It happened, therefore it can happen again : this is core of what we have to say."(이건 일어났던 일이고, 그러므로 다시 일어날 수 있다 : 이것이 우리가 말해야 할 핵심이다)

[지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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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현재 세계일주 인문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태그:#아우슈비츠, #홀로코스트, #유대인, #수용소, #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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