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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하는 커뮤니티의 페미니즘 토론방에 낯선 이가 게시물을 올렸다. 성매매에 관한 것이었고, 성 판매자가 자발적으로 성 노동을 판매하는 경우에도 성매매를 하면 '나쁜' 것인지를 묻고 있었다. 질문에 내가 답해야 할 의무는 없었지만, 그냥 무시하자니 영 꺼림칙해 아는 대로 달았다가 곧 후회했다. 수년 전 잠시 공부했던 내용을 요약했을 뿐이었고, 그마저도 가물가물해 스스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간 나는 성매매라는 주제 자체를 회피해왔다. 내가 속하지 않은 문제이니 생각하지도 말자고 선을 그었다. 성매매 이슈를 이론적 교착 상태라고 파악하여, 스스로 멀리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뭐가 됐든 성매매에 대한 내 태도는 게으름과 관망, 오만이었다.

별거 아닌 글에 댓글을 달면서 계속 마음이 불편했던 건 나 자신이 갖고 있는 문제적인 태도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누가 뭐라 하진 않았지만 스스로 괴로움에 시달리다가 어떻게든 이 마음을 해결하고 싶어 책을 찾았다. 그러다 읽게 된 책이 바로 <은밀한 호황>이었다.

<은밀한 호황>은 <한겨레21> 기자들이 성매매에 대해 취재한 내용을 담은 '대한민국 성 산업 보고서'다. 책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 산업의 규모는 한 해에 무려 6조6258억 원에 달한다. 6조가 어느 정도인지 감이 오지 않아 검색해봤더니 2017년 기준 성인 커피 시장 규모가 6조4041억이라고 한다. 아침에 모닝 커피 한 잔, 회의할 때도 다 함께 커피 한 잔씩 - 우리나라의 커피 문화는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되었는데도 커피 산업이 성매매 산업을 뛰어넘지 못한다니 놀랍다.

'자발적 성 노동'이라는 물음

<은밀한 호황> 책 표지
 <은밀한 호황> 책 표지
ⓒ 이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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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매매를 말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화두는 '자발적 노동'이다. 최근의 성매매 업소에서는 예전처럼 성 노동자 여성을 물리적 감금하는 형태는 아니지만 지금도 '감금'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금전적인 빚을 떠안겨 빚을 해결하기 전까지 절대 성매매를 그만두지 못하게 하는 형태다.

성매매를 위하여 드는 부가적인 비용들(헤어, 메이크업, 홀복 등)은 온전히 성 노동자의 몫이고, 성 노동자를 통해 먹고 사는 유흥업소 주변의 헤어 메이크업 숍, 간식 아줌마들 등은 다시 성 노동자 여성에게 물건을 판매하는 동시에 그녀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빚을 다 갚고도 여전히 업소에 남아있는 성노동자들도 있다. 책에서도 관련하여 다수의 인터뷰가 등장한다. 업소에서 빚을 갚고 겨우 빠져나왔지만 또다시 갈 곳이 없어 결국 다시 업소로 들어가게 된다는 사례가 많았다. 책에서 인터뷰한 성매매 여성 상담소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저희하고 상담할 때는 굉장히 (탈성매매에 대한) 의지가 높으세요. 근데 가서 보니까 당장 생활비가 필요하잖아요. 당장 필요한 생활비, 움직이려면 교통비가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다시 업소 뛰면, 언니들 입장으로서는 가장 편하게 잘할 수 있는 거잖아요."(140쪽)

그녀들은 당장 필요한 돈 때문에 성매매를 그만둘 수 없다. 사실 이 내용을 읽으면서 지금 '자발적'으로 회사에 출근하는 직장인이 얼마나 되는지도 묻고 싶어졌다. 당장 주변만 둘러봐도 회사를 원해서 다니는 사람은 손에 꼽는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월급이 끊어지면 어떻게 될지 알기에 퇴사를 선택할 수 없는 직장인도 부지기수인데, 성 노동자 여성에게만 유달리 '자발적 성매매'인지 아닌지 캐묻는 이유는 대체 뭘까.

책에는 다양한 통계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청소년 성매매 관련 조사는 잊지 못할 자료로 남았다. 책에 따르면, 가출과 성매매 경험이 있는 10대 중 절반을 넘는 56.3%의 여성이 (가출 전) 성폭행 피해 경험이 있었다.

인터뷰 가운데에는 가정 폭력의 피해자인 경우도 있었다. 폭력을 피해 도망쳐 온 이들에게 잘 곳을 제공하겠다고 한 따뜻한 손길이 인신매매로 이어지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이들이 10대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녀들의 성을 사겠다는 남성들은 너무나도 많았다.

이외에도 책은 우리나라 성 산업의 역사(양공주, 기생 관광 등 정부에서 주도하여 키워 온 성 산업), 성매매 종사자들에 대한 인터뷰, 청소년 성매매 문제, 한국인 포주 주도의 해외 성매매, 외국인 성매매 등 성매매 산업을 다각도에서 분석한다.

해외에서 12~13살밖에 되지 않은 10대 청소년을 한국인 남성들이 집단적으로 성매매를 한다는 사실은 알려졌지만, 그러한 관광을 주도하는 포주들 역시 한국인 남성이라는 사실은 많이 밝혀지지 않았다. 세계 곳곳에서 한국인 남성들은 저마다 포주로, 성 구매자로 성 산업에 앞장서고 있었다.

성매매는 여성 문제의 총집합

우리나라 여성의 노동은 늘 불안정하다. 당장 비정규직 노동자의 성별 통계만 봐도 여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비정규직 이슈에서 가장 굵직했던 문제는 KTX 여성 승무원, 이랜드, 홍익대 청소노동자, 급식 노동자 파업 등으로 여성 노동자의 문제인 경우가 많았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폭력은 또 얼마나 많은가. 2016년 기준 강간 피해자는 여성 5117명, 남성 31명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 신고된 건수만 그랬으니 신고되지 않은 건은 더 많을 것이다.

어쩌면 성매매는 이러한 여성 문제들이 집대성된 총체일지도 모른다. 성매매를 대신하여 선택할 수 있는 노동의 폭은 터무니 없이 좁고, 노동을 한다해도 저임금에 시달려야 한다. 그런 반면 성매매로 끌어당기는 손길은 너무 신속하게 다가온다. 일각에서는 성노동자 여성들을 '쉽게 많은 돈을 버는 노동'이라고 질타하지만, 이 책에서 관찰하는 성노동은 더없이 위험하고 괴로운 일이다.

"한 시간, 두 시간 동안 나는 내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고나면 10만 원이 나와요. 이렇게까지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것을 표현할 수 없어요. 그런 티를 내면 (성구매자가) 그냥 가버리니까. 그러면 나는 밥을 먹을 수 없으니까요."(163-164쪽)

성매매를 둘러싸고 합법화 여부에 대한 여러 의견이 분분하다. 합법화나 비범죄화에 대한 논의는 성산업 문제를 다루는 데에 있어 매우 중요하지만 이 이상으로 더 많은 영역에서 동시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 성매매는 결국 여성을 둘러싼 사회 전반의 문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최저임금 인상, 노동 안정화, 성폭력 처벌 가중 등 여러 방면에서 사회적 안전망이 확보되어야 한다. 여기에 비추었을 때 '자발적으로 성노동을 제공하는 경우에 성매매가 나쁜 것이냐'는 물음은 현실적인 고통들을 외면하려는 나쁜 '낭만'에 가깝다. 문제가 되는 현실과 쟁점들을 모두 도외시하고 윤리적인 죄책감을 벗어버리는 말이다.

책에 나오는 모든 말들이 괴로웠지만, 무엇보다도 10대에 청소년 성매매를 경험한 경미씨의 말은 책을 덮은 이후에도 계속 마음에 남았다.

"나는 인형이다. 인형일 뿐이다. 나는 기계고,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사람이 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밥을 먹고 편히 잘 수 있다. 그러니 나는 인형이다. 이렇게 다짐을 하죠."(164쪽)

사람이 (인형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은밀한 호황>은 너무나 많은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읽을수록 더욱 괴롭지만, 이 책에 담긴 이야기는 '성매매 공화국'의 일원으로서 우리가 절대 외면하지 말아야 할 목소리들이다.


은밀한 호황 - 불 꺼지지 않는 산업, 대한민국 성매매 보고서

김기태.하어영 지음, 이후(2012)


태그:#성매매, #은밀한호황, #성산업, #성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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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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