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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은 강원도 태백시 대덕산 금대봉에서 발원한 남한강과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이 양수리에서 만나 서울을 관통하여 서해로 흐른다. 서울시민들에게 한강은 휴식의 공간인 동시에 강남과 강북을 가르는 경계선이다.
▲ 원효대교 부근에서 바라본 한강 한강은 강원도 태백시 대덕산 금대봉에서 발원한 남한강과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이 양수리에서 만나 서울을 관통하여 서해로 흐른다. 서울시민들에게 한강은 휴식의 공간인 동시에 강남과 강북을 가르는 경계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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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한강을 끼고 형성된 도시다. 한강을 배경으로 수도 서울의 역사는 2천 년 전 시작됐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기원전 18년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하남위례성(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몽촌토성)에 도읍하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비류와 온조는 남행하여 마침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곳을 살펴보았다. (중략) 열 명의 신하들이 간하여 말하기를 '오직 이 강 남쪽의 땅이 북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기름진 벌판을 바라보고 있고 서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어서, 하늘이 내린 험준함과 지리적 이점이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함이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하게 된 이유도 한강과 관련되어 있다. 한양은 한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 통치하기에 유리하였고, 크고 작은 산으로 둘러싸인 지세는 방어에 용이하였다. 한강으로 이어진 수륙교통은 전국에서 걷은 세금을 배로 실어 나르기에 편리한 위치였다.

1900년 한강철교가 건설된 것을 시작으로 마곡철교가 개통된 2010년 12월까지 한강(서울구간)에는 27개의 다리가 놓였다. 동으로는 강동대교로부터 서로는 신행주대교에 이르기까지 한강에 놓인 다리는 지난 세기 서울의 팽창과 발전을 말해준다.본 이미지는 서울데이터베이스(http://data.si.re.kr/node/351), <지표로 본 서울의 변천 2010>에서 캡처했다.
▲ 한강 교량 위치 1900년 한강철교가 건설된 것을 시작으로 마곡철교가 개통된 2010년 12월까지 한강(서울구간)에는 27개의 다리가 놓였다. 동으로는 강동대교로부터 서로는 신행주대교에 이르기까지 한강에 놓인 다리는 지난 세기 서울의 팽창과 발전을 말해준다.본 이미지는 서울데이터베이스(http://data.si.re.kr/node/351), <지표로 본 서울의 변천 2010>에서 캡처했다.
ⓒ 서울시 <지표로 본 서울의 변천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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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은 강원도 태백시 대덕산 금대봉에서 발원한 남한강과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이 양수리에서 만나 서울을 관통하여 서해로 흐른다. 한강의 길이는 497.5km로 서울을 지나는 구간은 42km다. 서울시민들에게 한강은 휴식의 공간인 동시에 강남과 강북을 가르는 경계선이다.

한강에 다리가 놓이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들어서다. 그때로부터 마곡철교가 개통된 2010년 12월까지 한강에는 27개의 다리가 놓였다. 동으로는 강동대교로부터 서로는 신행주대교에 이르기까지 한강에 놓인 다리는 지난 세기 서울의 팽창과 발전을 말해준다.

근대 문명의 총아, 한강인도교

한강에 놓인 최초의 다리는 1900년 7월 5일 완공된 한강철교다. 1896년 조선으로부터 경인선 부설권을 획득한 미국인 사업가 제임스 모스는 용지 매입과 건설 기자재 수입에 대한 면세 혜택에 더해 15년간 경인철도를 독점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이권을 보장받았다. 모스는 공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미국 상인 타운센드와 공동으로 한국개발회사를 설립하고, 1897년 3월 29일 제물포 우각현에서 경인선 기공식을 열었다.

공사를 시작하고 1년여가 지나자 한국개발회사는 재정난에 직면하였다. 모스는 1898년 12월 17일 경인선 부설권을 일본이 설립한 경인철도 합자회사에 양도하였다. 애초 한강철교는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인도를 설치하는 것으로 설계되었다. 그러나 경인선 부설권을 인수한 경인철도 합자회사는 공사비 절감을 이유로 철도전용 교량을 건설했다. 한강철교는 노량진 연안에서 강의 중간 모래톱까지는 9개의 교각을 설치한 철교(鐵橋, 길이 2062피트)였고, 나머지 용산 방면으로는 목교(木橋, 길이 660피트)를 놓아 완공했다.

당시 사람들은 교량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1910년대에 접어들자 사정은 달라졌다. 경성 도심을 오가는 자동차와 우마차의 통행량이 늘어나면서 교량의 필요성이 커지게 된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제1기 치도 사업의 하나로 추진한 한강인도교(한강대교) 건설계획은 이 같은 필요성에 따른 것이었다. 남만주철도회사가 시공한 한강인도교는 1916년 3월 착공되어 1917년 10월 7일 완공되기까지 84만3000원의 공사비가 들어갔다. 일제는 경비 절감을 위해 한강의 모래톱에 언덕을 쌓아 인공섬(노들섬)을 만들고 섬의 남북으로 다리를 건설했다. 노들섬 남쪽과 노량진 사이에는 7경간 440m의 대교를 놓았고, 노들섬 북쪽과 한강로 사이에는 3경간 188m의 소교를 놓았다. 다리 위로는 4.5m의 차도가 지나가고 그 양옆으로는 각 1.6m씩의 인도가 설치되었다.

한강인도교라는 이름은 사람들이 걸어서 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라는 뜻으로 붙여졌다. 나룻배를 이용해 강을 건너던 사람들에게 걸어서 한강을 건넌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 특히 여름밤이면 화려하게 수놓은 전등이 설치되어 산책객을 불러 모았다.

한강인도교는 투신자살의 명소이기도 했다. 1918년 봄 용산 철도병원 간호부가 이곳에서 투신자살한 이래 자살자가 급속히 늘었다. 1935년의 경우 한강 인도교에서 투신자살한 사람은 38명(남자 13명, 여자 25명)에 달했다. 투신자살자가 속출하자 조선총독부는 한강인도교에 '잠깐 기다려라(一村待期, 좃도 오마치)'는 경고 입간판을 세우기도 했다.

장안의 명물이었던 한강인도교도 1925년 한반도를 강타한 을축년 대홍수를 피해 가지 못했다. 그해 여름 대홍수로 노들섬의 둑이 무너지고 용산 쪽 소교가 유실되었다. 노들섬 북쪽과 용산 한강로를 잇는 소교를 건설하기 위한 보수공사는 1927년 5월 시작되어 2년 후인 1929년 9월 완료되었다.

한강에 놓인 최초의 다리는 1900년 7월 5일 완공된 한강철교다. 처음 한강철교는 노량진 연안에서 강의 중간 모래톱까지는 9개의 교각을 설치한 철교(鐵橋, 길이 2,062피트)였고, 나머지 용산 방면으로는 목교(木橋, 길이 660피트)를 놓아 완공했다. 서울도서관 3층에 전시된 사진을 찍었다.
▲ 한국전쟁 당시 폭파되는 한강철교 한강에 놓인 최초의 다리는 1900년 7월 5일 완공된 한강철교다. 처음 한강철교는 노량진 연안에서 강의 중간 모래톱까지는 9개의 교각을 설치한 철교(鐵橋, 길이 2,062피트)였고, 나머지 용산 방면으로는 목교(木橋, 길이 660피트)를 놓아 완공했다. 서울도서관 3층에 전시된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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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가 되자 한강인도교만으로는 늘어나는 교통량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조선총독부는 1934년 8월 3년 계획으로 한강인도교 신교 건설 공사를 시작하여 1937년 10월 지금과 같은 타이드아치형(tied arch)의 교량을 완공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한강인도교는 참사의 현장이었다. 전쟁이 터지고 사흘이 지난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인도교가 폭파되었다. 대통령 이승만이 야반도주하듯 피난을 떠난 상태에서 육군참모장 채병덕은 공병감 최창식에게 한강인도교 폭파를 명령했다.

한강인도교가 폭파되는 순간 4천여 명이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한강인도교의 폭파로 500~800명의 사람들이 죽임당했고, 국군 병력 46%가 한강 이북에 고립되었다. 다리가 끊겨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시민들은 인민군 치하에서 노역에 동원되었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일은 9.28수복 이후 서울로 돌아온 이승만 정부가 부역에 동원된 시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처형했다는 사실이다.

한강의 다섯 번째 다리, 한남대교

1966년 1월 19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과 서초구 잠원동을 잇는 제3한강교(한남대교)가 착공되었다. 한강철교, 한강대교(제1한강교), 광진교, 양화대교(제2한강교)에 이어 건설된 제3한강교는 ‘유사시 서울시민들의 도강용’이라는 드러나지 않은 목적을 가진 다리였다.
▲ 한남대교 1966년 1월 19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과 서초구 잠원동을 잇는 제3한강교(한남대교)가 착공되었다. 한강철교, 한강대교(제1한강교), 광진교, 양화대교(제2한강교)에 이어 건설된 제3한강교는 ‘유사시 서울시민들의 도강용’이라는 드러나지 않은 목적을 가진 다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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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이후 한강에 건설된 첫 번째 다리는 양화대교(1965. 1. 25)이다. 북한의 남침에 대비하여 군사용으로 건설된 양화대교는 평상시에는 여느 다리와 차이가 없지만, 유사시에는 한강 이남에서 서부전선으로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는 군사전용 다리였다.

1965년 서울의 인구는 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 비해 두 배 이상 증가한 347만 명이었다. 급격한 인구 증가에도 한강에 신축된 다리는 양화대교뿐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1966년 1월 19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과 강남을 잇는 제3한강교(한남대교)가 착공되었다. 한강철교, 한강대교(제1한강교), 광진교, 양화대교(제2한강교)에 이은 다섯 번째의 교량인 제3한강교는 '유사시 서울시민들의 도강용'이라는 드러나지 않은 목적을 가진 다리였다.

공사가 시작될 무렵 강남은 전기는 물론 공중전화나 전신전화취급소도 없는 한적한 시골이었다. 제3한강교 건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사안이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신문에는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다리가 불러올 파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의 저자 손정목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이 교량이 이른바 '말죽거리 신화'로 불리는 광적인 지가(地價) 앙등의 요인이 되었고 오늘날 강남개발의 계기가 되었으며 경부고속도로의 기점이 된다는 것을 안 사람은 오직 하느님 하나뿐이었고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도, 윤치영 시장도, 공사를 담당했던 현대건설도,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 손정목, <서울도시계획 이야기3>, 75쪽

처음 제3한강교는 너비 20m의 4차선으로 설계되었다. 그런데 공사를 시작한 지 3개월이 지났을 무렵 건설부에서 교량을 26m로 넓히라고 지시했다. 그즈음 평양 대동강에 너비 25m의 다리가 건설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육군대령 출신의 건설부 국토보전국장 서정우는 그것보다 1m라도 넓어야 한다는 이유로 그 같은 지시를 내렸다. 공사를 책임진 서울시 담당 공무원들과 현대건설 직원들은 마뜩찮았지만 반공이 국시인 나라에서 입도 뻥끗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제3한강교 건설공사는 한동안 예산 문제로 짓는 둥 마는 둥 했다. 1966년과 1967년 서울시 예산에 편성된 건설비는 각각 1억 원이었다. 재정 압박에 시달리던 서울시장 김현옥은 경제기획원을 향해 건설비를 "국고에서 부담해 주지 않는다면 서울시에서는 부득이하게 공사를 중단해버릴 수밖에 없다"고 으름장을 놓기까지 했다.

지지부진하던 공사는 1967년 4월 29일 제6대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박정희 후보가 경부고속도로 건설 공약을 발표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했다. 대선에서 승리한 박정희는 그해 11월 14일 정부 여당 연석회의를 개최하고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결정했다. 회의에서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 기간 고속도로 건설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 1일 착공했다. 대통령 박정희는 공사를 독려하기 위해 헬기를 타고 건설 현장을 수시로 시찰하였다. 이렇게 되자 서울시장 김현옥은 제3한강교 공사를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69년 12월 25일 길이 915m, 너비 27m(차도 23m, 보도 4m)의 제3한강교가 착공 3년 11개월 만에 완공되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영동토지구획정리사업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데 가장 큰 문제는 노선 확정과 건설재원의 확보였다. 428km에 이르는 노선은 서울 서초구 제3한강교 남단에서 부산 금정구에 이르는 구간으로 확정되었고, 건설비는 300억 원으로 책정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1968년 2월 5일 열린 제8차 경제장관회의에서 휘발유 세율 인상, 95억 원의 도로국채 발행, 대일청구권자금 27억 원, 통행료 15억 원 등을 재원으로 충당키로 했다. 동시에 고속도로 부지를 무상으로 확보하기 위한 구획정리사업을 시행키로 했다.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는 남서울 일대에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처음 기획된 때는 1966년 9월 19일이었다.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통해 이 지역에 도로, 주거, 공원 등 공공용지를 마련해 두겠다는 서울시의 사전 포석이었다. 건설부는 1966년 12월 28일자 건설부 고시 제3008호를 통해 서울시가 요청한 남서울 일대의 약 800만 평의 부지를 '서울시 토지구획정리 예정지'로 결정했다.

막연했던 토지구획정리사업은 경부고속도로가 착공되자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사업 대상 지역은 경부고속도로 주변으로 제3한강교에서 남쪽으로 7.6km에 이르는 지금의 서초구 일대 386만 평이었다. 사업의 주된 목적은 9만2천평에 달하는 고속도로 부지를 무상으로 확보하는 데 있었다.

영동토지구획정리사업은 경부고속도로 부지 확보에 주안점을 두고 진행된 나머지 도로, 학교, 공원 등 공공용지 확보가 어려웠다. 이 때문에 영동토지구획정리사업(영동1지구)은 몇 차례에 걸쳐 대상 지역이 확대되어 500여만 평이 되었다. 1971년에는 영동토지구획정리사업(영동2지구)이 추가로 진행되어 압구정동, 논현동, 신사동, 역삼동, 삼성동 등 현재의 강남구 일대의 300여만 평이 구획정리 대상 지역에 포함되었다.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다. 총연장 428km의 고속도로를 건설하는데 연인원 9백만 명의 노동자가 동원된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였다. 선 개통, 후 보완이라는 속도전으로 건설된 경부고속도로는 공사 기간은 단축했지만 77명의 노동자가 사망하는 희생을 치러야 했다. 개통 후에는 보수공사로 몸살을 앓았다. 1970년부터 1990년까지 경부고속도로를 보수하는데 투입된 비용는 1527억 원으로 건설비 430억 원의 4배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자동차시대가 개막되었다. 전국을 하루에 오갈 수 있는 일일생활권 시대가 열리면서 사람들의 왕래가 크게 늘었고,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로 인구 집중이 두드러졌다. 경제개발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던 상황과 맞물려 엄청난 양의 물류가 전국 각지로 이동하는 통로가 되었다.

무엇보다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은 강남 개발을 촉발시켰다. 도로 부지를 무상으로 확보할 목적으로 영동토지구획정리사업이 추진되면서 제3한강교에서 양재동에 이르는 강남대로를 비롯하여 영동대로, 테헤란로 등의 간선도로가 격자형으로 신설되었다. 또한, 택지와 공원 등 도시 기반 시설이 정비되면서 강남 개발은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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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봉 시민기자는 <오마이뉴스>에 매달 1만원 이상씩 자발적으로 후원하는 10만인클럽 회원입니다.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 주십시오. 휴대폰 010-3270-3828로 전화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끝까지 취재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전상봉 시민기자는 서울시민연대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그:#강남 개발, #한남대교, #제3한강교, #영동지구, #경부고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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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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