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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밤, 산골집 냉장고에 마지막으로 남은 국산 캔맥주 세 개를 동내며 가네코 후미코를 만났다. 그이가 남긴 옥중 수기, <나는 나>(산지니)를 보면서. 새벽 한 시 넘어 책을 덮고 누우려는데 가슴 한 켠이 시큰하게 애달프다. 그리움이 밀려온다. 스물세 살 나이에 옥에서 삶을 마친 한 여자, 가.네.코.후.미.코.

요즘 영화 <박열>이 한창이라는 소문이다. 인터넷 여기저기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많다. 재미있다, 재미없다 평은 갈리는 듯한데 영화 속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느낌들은 큰 틀에서 비슷해 보인다. 박열보다 가네코 후미코가 더 잘 보인다는 글이 주로 많은 걸 보면.

가네코 후미코의 옥중수기, <나는 나>. 시릿하게 애달픈 마음을 맥주로 달래며 단숨에 읽었다.
 가네코 후미코의 옥중수기, <나는 나>. 시릿하게 애달픈 마음을 맥주로 달래며 단숨에 읽었다.
ⓒ 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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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코 후미코를 연기한 배우 최희서. 배역을 맡고 나서 먼저 이 책부터 보았단다. 문경에 있는 가네코 후미코 무덤에 찾아가 인사도 드렸다고 한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가네코 후미코, 아니 최희서가 보았다는 바로 이 책 <나는 나>.

옥중 수기지만 자서전과 다름없다. 태어나서부터 박열과 만나는 순간까지 살아온 시간들이, 그 끈적이게 아픈 흔적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1903년에 태어났으니 한참 옛날이다.

일본 여자 가네코 후미코가 조선 남자 박열과 함께 일본에 맞서는 반제국주의 운동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그 때문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지 않았다면, 지독하게 어렵고 힘들던 그 시간들은 어쩌면 우리 어머니들의 어머니들도 겪었을 법한 가슴 아픈 개인사로만 여겼을지도 모른다.

"나는 가난했고 지금도 가난하다. 그 때문에 나는 돈을 가진 자로부터 혹사당하고 괴롭힘을 받았으며 들볶였고 억압당했다. 또한 자유를 빼앗겼으며 착취당하고 지배당했다. 이런 나는 힘을 가진 자들에 대해 항상 마음속 깊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 내 마음속에 타오르고 있던 반항심과 동정심은 순식간에 사회주의 사상에 의해 불이 붙어버렸다. 아아, 나는 우리와 같은 불쌍한 계급을 위해, 나의 모든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투쟁하고 싶다."_300쪽

'무국적자'라는 말보다 더 낯선 '무적자'로, 일본과 조선을 오가며 가네코 후미코가 살아온 시간들은 그이를 역사의 수레바퀴에 올려놓았다. 사회주의를, 반제국주의를, 아나키즘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만든 밑거름이 되어버렸다. 무엇인가 해야 한다, 하고만 싶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으나 무엇을 해야 할지, 하고 싶은지 갈피를 잡을 수 없던 가네코 후미코. 어느 날 우연히 박열이 쓴 시를 보았다.

"참으로 강한 힘이 느껴지는 시였다. 구절, 구절 읽을 때마다 마음이 떨려왔다. 끝까지 읽고 나서는 황홀경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내 가슴속 피는 춤을 추었고, 알 수 없는 어떤 진한 감동이 나의 모든 생명을 고양시켰다."_324

저 문장을 눈으로 따라가는데, 그때 그 순간 가네코 후미코의 감정이, 그 환희가 꼭 내 안에서 살아 숨 쉬는 것만 같았다. 그 느낌, 그 감동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시에 푹 빠져든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한테 먼저 만나자는 이야기를 건넸고 다행히(?) 박열이 받아들이면서 둘의 만남이 시작된다. 그러면서 옥중 수기도 마무리 된다. 박열에 대한 글은 더는 다룰 수 없었다고 한다. 옥중에서 쓴 것이었으니 그랬을 테지.

"기다려주세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학교를 졸업하면 곧바로 우리 함께합시다. 그때는 내가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결코 당신을 병으로 힘들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죽는다면 함께 죽읍시다. 우리, 함께 살고 함께 죽어요."_343쪽

가네코 후미코가 박열과 헤어지던 어느 날, 마음속으로 기도하듯 중얼거렸다는 저 간절한 외침을 끝으로 옥중 수기도 끝이 난다. 아, 서럽다. 함께 살고 함께 죽자고 했던 이는 왜 먼저 목을 매야만 했을까. 박열은 그 뒤로도 오랫동안 살아 있었다는데(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가네코 후미코를 연기한 배우 최희서. 배역을 맡고 나서 먼저 이 책부터 보았단다. 문경에 있는 가네코 후미코 무덤에 찾아가 인사도 드렸다고 한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이 책도, 최희서의 연기도.
 가네코 후미코를 연기한 배우 최희서. 배역을 맡고 나서 먼저 이 책부터 보았단다. 문경에 있는 가네코 후미코 무덤에 찾아가 인사도 드렸다고 한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이 책도, 최희서의 연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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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간지럽다. 그 뒤가, 그 뒷이야기가 너무나 궁금해서. 이 책을 먼저 본 사람은 꼭 나처럼
영화 <박열>을 보고만 싶을 것이다. 최희서의 연기를 통해서라도 이 수기에서 못다 만난 가네코 후미코를, 그이의 마지막 생의 시간을 만나기 위해서라도(산골 사는 내게 이 영화가 막을 내리기 전 극장에서 만날 시간이 과연 올 수 있을까. 이백만을 코앞에 둔 이 영화, 개봉일이 길게 이어진다면, 어쩌면 기회가 생길지도!).

영화 <박열>을 본 사람들도 이 책 <나는 나>를 보고만 싶을 것이다. 일본 사람으로서, 판사 앞에서 천황을 "기생충"이라 당당히 말하는 가네코 후미코를.

"내가 비록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나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면 그것은 삶에 대한 긍정일 것이다."

이렇게 가슴을 후려치는 말을 내지르는 가네코 후미코의 지나온 삶이 궁금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터이니.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나 자신도 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단지 나의 반생을 여기에 펼쳐놓고 싶었다. 마음이 있는 독자라면 이 기록으로 충분히 알아줄 것이다. 나는 그럴 거라고 믿는다."_344쪽

<나는 나> 맺음말에 나오는 가네코 후미코의 마음. 이 글을 보면서 나, 감히 말하고 싶어졌다. 90년도 더 전에 옥에서 삶을 마친, 그 이름조차 이제야 알게 된, 지금 이 순간 내 눈에 눈물자욱 남게 만든 가네코 후미코, 바로 당신한테.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당신이 남긴 반생의 이 기록으로 조금은, 어쩌면 충분히 알 수 있을 것도 같다고. 이렇게 '생명이 있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겨 주어서 참으로, 참으로 고맙다고."

책을 읽으면서 시리고 애달픈 마음 달랜답시고 국산 맥주 세 캔을 마셨다. 어젯밤 책 읽은 마음을 되돌아보면서는 또 맥주 세 캔을 비웠다. 이번엔 일본 맥주.

영화 박열을 본 사람들도 이 책 <나는 나>를 보고만 싶을 것이다. 판사 앞에서 천황을 기생충이라 당당히 말하는 가네코 후미코의 지나온 삶이 궁금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터이니.
 영화 박열을 본 사람들도 이 책 <나는 나>를 보고만 싶을 것이다. 판사 앞에서 천황을 기생충이라 당당히 말하는 가네코 후미코의 지나온 삶이 궁금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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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산골을 벗어나 외지로 출타 나간 옆지기한테 '네 개 만 원짜리' 편의점 맥주 아무거나 사오라고 부탁했더니, 무려 여섯 개에 구천구백 원이라는 일본 맥주를 들고 왔다. 기막히게 때가 들어맞았다.

아마도 아나키스트일 거라 짐작되는 가네코 후미코는 좋아할 이야기가 아닐 테지만, 마음에 담아 둔 이 책 이야기를 풀어내는 날에 일본 맥주가 은근히 어울린다.

이 책을 맥주로 시작해 맥주로 끝을 내긴 했지만 가네코 후미코는, 그이의 삶은, 맥주 여섯 캔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적어도 나한테는!

책으로 만난 가네코 후미코. 문경에 있다는 그이의 무덤가든, 영화 <박열>이든, 또 다른 무엇을 통해서든 다시 만날 기회가 또 있으리. 있어야만 하리. 그이의 육체는 사라졌지만 정신은 영원히 살아 꿈틀거린다는 사실을, '마음이 있는 독자'라고 감히 생각했던 나부터 입증하고만 싶으니까.

"곧 이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는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현상은 현상적으로 없어질 뿐, 영원의 실제 속에서는 존속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지금 평안하고 냉담한 마음으로 이 조잡한 수기의 펜을 놓는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에 축복이 있기를!"_344쪽

책 한 권으로 단숨에 나를 흔들어 놓은 가네코 후미코. 나는 지금 조금은 서럽고 뜨거운 마음으로 이 조잡한 후기를 마친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었다는 것이 죄가 되어, 옥에서 삶을 마쳐야 했던 가네코 후미코. 당신의 영혼에 진심으로 축복이 있기를!


나는 나 - 가네코 후미코 옥중 수기

가네코 후미코 지음, 조정민 옮김, 산지니(2012)


태그:#가네코 후미코, #최희서 , #나는 나, #아나키스트, #박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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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기타 치며 노래하기를 좋아해요. 자연, 문화, 예술, 여성, 노동에 관심이 있습니다. 산골살이 작은 행복을 담은 책 <이렇게 웃고 살아도 되나>를 펴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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