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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월 토지를 매입할 당시, 숙지원이라는 이름을 갖지 못한 땅의 가운데에 한 그루 그리고 길옆 울타리 쪽에 한그루의 자두나무가 우리보다 먼저 자리 잡고 있었다. 울타리쪽 나무도 밑동이 굵었지만 가운데 자리 잡은 자두나무도 북쪽으로 기운 모습에 두 갈래로 자란 굵은 몸통은 나이 먹은 티를 풍기고 있었다. 마른 넝쿨식물이 감고 있어 걷어냈더니 제법 멋스럽게 보였으나 그다지 좋아했던 자두가 아니었기에 특별히 귀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거의 버림받은 꼴로 서있던 자두나무가 피운 하얀 꽃과 향기는 단번에 아내와 나의 눈과 코를 넘어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더구나 당시 숙지원에는 나무가 거의 없었는데 가운데 자리 잡은 자두나무는 우리에게 큰 그늘을 제공했다.  

자두나무 그늘에 작은 쉼터를 만들고 얼마나 다행으로 여겼는지 모른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두나무를 응원했던 덕분이었는지 그해 탐스러운 자두가 많이도 열렸는데 맛없는 과일이라는 자두에 대한 기존의 오해가 미안할 정도로 맛도 좋았고 또 수확량도 많았다. 많은 이웃들과 나눔도 하고 그래도 남아 김치냉장고에 저장해두고 8월까지 먹었다. 정원과 텃밭의 경계에 자리 잡은 자두나무는 우리의 각별한 관심을 받는 인연의 나무였다.

아직 정원과 텃밭의 공간 분할도 되기전 숙지원을 지켜주었던 자두나무의 모습이다.  파란 비닐로 덮인 것은 우리가 쉼터로 활용했던 평상이다.
▲ 2008년 봄 자두나무의 모습 아직 정원과 텃밭의 공간 분할도 되기전 숙지원을 지켜주었던 자두나무의 모습이다. 파란 비닐로 덮인 것은 우리가 쉼터로 활용했던 평상이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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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렇게 만난 지 5년쯤 되면서 자두나무들은 변하기 시작했다. 먼저 바깥 울타리의 자두나무가 마르기 시작했다. 2013년에는 꽃도 많이 피지 않았고 열매도 예전 같지 않게 잘았다. 퇴비를 듬뿍 주고 삭힌 오줌을 뿌려주는 등 성의를 보였지만 기대와 달리 2014년에는 마른 가지는 더 늘었고, 열매는 들쑥날쑥 크기가 고르지 못했고, 그 양도 이웃과 나눌 것이 없을 정도였다.

아쉬운 마음으로 자두나무를 쳐다보고 서있는데 지나가던 마을 노인은 "늙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요."하면서 옛날에는 동네 사람들이 자두나무를 많이 심어 자두를 시장에 내다팔기도 했다면서 자두나무에 관한 설명이 길었다.

나무의 종류에 수명이 같지 않고, 사과 배 등 유실수도 수명이 다르다. 같은 유실수도 토질 강수 기온 바람 등 기후요인에 수명이 좌우된다. 통상적으로 자두나무는 수명이 3, 40년이라고 하는데 아마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세상에는 천년을 산다고 하는 나무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유실수 중에서도 수명이 짧은 편이다. 

마을 노인의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속지원의 자두나무들이 50살 정도의 나이로 짐작했다. 아쉬웠지만 그 정도라면 평균 수명을 넘겼다고 위로하면서 2015년 여름 길옆 울타리 쪽의 자두나무는 베어냈다. 더 이상 나무가 회생하고 열매가 풍성해지는 기적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무를 베어낸 자리에는 철쭉과 남천을 심었으며 주변에 돌다리도 놓고 나무들 사이에 징검다리 길을 내었다.

그런데 2015년부터는 숙지원의 가운데 있어 [랜드마크]로 자랑했던 자두나무도 마르기 시작한 것이다. 아주 오래전 지금은 제목도 잊은 책에서 나무도 외부 요인에 반응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자기 몸에 칼을 댄 사람이 가까이 가면 나무의 미세하지만 격렬한 반응이 파장으로 나타나는 실험의 결과를 소개했던 글이었는데 개인적으로 상당한 충격이었다. 나무가 어떤 이들의 믿음처럼 과연 영물(靈物)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나무들에게도 정령(精靈)이 있다는 옛 사람들의 주장이 전혀 근거 없는 설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의 형태나 크기, 열매의 모양과 빛깔과 향기와 맛이 다르고 열매의 약성도 다르다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나무도 정서적인 혼을 가진 생명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특히 몇 나무를 실험적으로 삽목하여 키운 경험도 작용했다. 잘라서 버리면 금세 말라버릴 가지에서 뿌리가 나고 잎이 나오고 하나의 생명체로 모습을 갖추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던 경험은 비약일지라도 나무들도 희노애락의 감성이 있고 나무들 상호간에 교감능력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키웠다.

그래서 멀쩡했던 자두나무 가지가 말라가는 것을 보면서 살아있는 유기체라면 모두가 겪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과정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두 그루의 자두나무가 약간의 시차를 두고 늙어가는 현상을 보면서, 서로 마주보며 정이 들었던 두 나무였는데 한 나무가 사라지자 남은 나무도 슬픔으로 먼저 간 나무를 뒤따르는 것 아니냐는 동화적인 상상으로 마음을 달랬다.

물론 비현실적이고 근거 없는 상상일 수 있다.  하지만 비록 상상일지라도 나무를 보는 사람의 정서와 태도 그리고 나무를 보는 가치관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각박한 세상에 신선한 산소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런 상상으로 만들어진 전설을 죄 되지 않으리라고 본다.

숙지원에는 자두나무 말고도 유실수로는 보리수 뽕나무 매실 개복숭아 아로니아 감 대추 석류 모과 등이 있고, 관상수로는 소나무, 동백나무, 철쭉, 남천, 호랑가시나무 등이 어우러져 있다.

일부 철쭉은 직접 삽목을 하여 키웠으나 대부분 나무 시장을 돌며 구입했고 내가 자리를 잡아 심은 나무들이다. 나무는 인간의 관점에서 특히 인간의 척도로 가치를 정해서는 안 된다. 나무들을 사람이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할 귀한 손님이라는 마음으로 만나야 한다.

비록 현실의 법으로 사람과 나무의 관계는 배타적인 소유와 피소유의 관계로 볼 수 있으나 실제로 사람과 나무는 공존 공생해야 할 관계라는 마음으로 정성껏 심고 가꾸어야 한다.
그런 마음에 내가 죽은 후에도 오래도록 다음에 올 세대에게 기쁨을 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담았다.

그러나 사람도 나이가 들면 면역력이 떨어져 걸핏하면 감기에 걸리는 것처럼, 나무 역시 늙으면 병충해에 대한 방어능력도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숙지원의 자두나무도 다가오는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나무에 수액 주사를 놓는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람은 새로운 생명을 맞이할 수는 있으나 가는 생명을 붙잡을 수 없는 법. 살아있는 생명체의 생과 사는 자연의 순리일 것이다. 결국 남은 가지라도 좀 더 오래 살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두나무의 마른 가지를 잘라주었다. 2017년 7월 10일의 일이었다.

가지가 많이 잘리고 옆으로 기운 모습은 날개쭉지를 잃은 새를 연상시킨다. 정원과 텃밭이 정비되어 쉼터의 기능을 잃었다지만 아쉬움은 크다.
▲ 2017년 7월 현재 자두나무의 모습 가지가 많이 잘리고 옆으로 기운 모습은 날개쭉지를 잃은 새를 연상시킨다. 정원과 텃밭이 정비되어 쉼터의 기능을 잃었다지만 아쉬움은 크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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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낯선 모습의 자두나무. 담담하게 보려고 해도 가슴에 피어나는 아쉬움까지 지울 수 없다. 하지만 함께 살았던 10년의 세월, 자두꽃 향기에 취하고 자두를 옷에 쓱쓱 닦아 먹으며 다음해를 기약했던 즐거움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늘에 평상을 펴고 누워 심신을 쉬었던 순간들도 평화로운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런 기억속의 자두나무는 아무리 늙는다고 해도 착하고 선한 모습으로 남을 것이다.

늙음은 죄가 아니다!
죽음은 벌이 아니다!  

지금은 자두나무에게 그 말을 해주고 싶다. 

2017.7.13.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 블로그 등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자두나무, #생로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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