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 마디, 표정 하나로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배우. 넋 놓고 보다가 어느새 울거나 웃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적 있으시죠? <오마이스타>는 작품의 꽃인 배우 한 명 한 명을 조명하고자 합니다. [배우열전]은 시민-상근기자가 함께 쓰는 기획입니다. 관심 있는 여러분의 참여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어떤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 사람과 어릴 적에 조금이라도 안면이 있는 A와 B의 일반적인 대화는 대충 이러하다. "그 친구, 요만할 때부터 내가 용돈 쥐어주면서 눈여겨 봤지, 성공할 줄 알았어." "내가 업어 키우다시피 한 친구라네. 젖먹이 때부터 참 똘똘했지." 허나 막상 성공의 당사자는 자신에게 용돈을 주고 업어 키웠다는 A와 B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한다.

유명한 누군가와 어떻게든 연을 맺으려는 사람들의 심리는 허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사람의 성공 과정에 미약하나마 자신도 한 몫 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부심. 본인의 예상과 기대가 실현되는 것을 먼발치에서 지켜볼 때의 대리만족. 한 단계씩 성장하는 인간승리의 과정을 보며 느끼는 인류애. 뭐 이런 것들이 뒤섞이며 야릇한 감동을 자아내고 그것에 도취되다 보니 그 혹은 그녀와 예전부터 잘 알고 지낸 사이라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대학로 공연에서 눈에 띈 배우

나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배우다. 지금은 톱스타의 반열에 오른 배우, 바로 정재영이다. 물론 나보다 나이가 많으므로 업어 키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괜히 그런 소리했다가는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기 쉽다. 그저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다 보니 영혼의 유대관계로 연결된 느낌이랄까? 나는 그와 지근거리에서 두 번이나 마주한 인연이 있다. 그는 당연히 기억 못 하겠지만.

'듀얼' 정재영, 있는 그대로! 배우 정재영이 31일 오후 서울 영등포의 한 웨딩홀에서 열린 OCN드라마 <듀얼> 제작발표회에서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듀얼>은 선과 악으로 나뉜 두 명의 복제인간과 딸을 납치당한 형사의 이야기를 그린 복제인간 추격 스릴러 작품이다. 6월 3일 오후 10시 첫 방송.

배우 정재영 ⓒ 이정민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이십년 전 대학로 연극 공연에서였다. 당시 장진이라는 젊은 연출가가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 장진의 작품 <매직타임>에서 정재영 그를 처음 만났다. 쟁쟁한 연극배우들 틈에 신하균, 정재영(당시 이름은 정지현), 두 명의 신인배우가 눈에 띄었다. 아! 이 배우들 느낌이 좋다. 둘 중 정재영이라는 배우 쪽에 더 관심이 갔던 것은 어눌하면서 톤이 약간 높은 독특한 억양 때문이었다.

꽃미남 형의 배우도 아니고 평범하다 못해 약간 투박한 인상을 풍기는 사나이. 짙은 눈썹에 부리부리한 눈을 가지고도 다양한 코믹 연기를 보여주는 젊은 시절의 정재영을 보며 마음 속으로 '저 배우 정말 잘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이후로 간간이 다른 영화 속에서 작은 역할이나마 그를 만나게 되면 너무 반가웠다. 점차 넓어지는 연기의 스펙트럼은 잘 되리라는 기대를 확신으로 만들었다.

대학로에서 연극으로 내공을 쌓았던 배우들 중에 송강호나 설경구는 그래도 무명의 기간에 비하면 수직 상승한 편에 속한다. <넘버3>의 송강호와 <박하사탕>의 설경구는 한방의 임팩트로 일찌감치 주연급으로 올라섰다. 반면 정재영은 한 계단씩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며 자신의 입지를 넓힌 배우다.

<박봉곤 가출 사건>(1996)과 <초록물고기>(1997)에 얼굴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단역으로 출연했던 그가 내 눈 앞에 다시 나타난 건 장진의 영화를 통해서다. <기막힌 사내들>(1998)로 스크린에 데뷔한 장진의 다음 작품인 <간첩 리철진>(1999)에서 정재영은 택시강도 4인방 중 한 명으로 나와 신 스틸러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이십년 가까이 흐른 지금에도 영화의 줄거리보다 수배를 피하기 위한 택시 강도 4인방의 삭발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간첩 리철진>

<간첩 리철진> 속 신 스틸러 정재영 ⓒ 시네마서비스


대사가 점점 늘어나고 엔딩 자막에서 이름의 위치가 위로 상승하던 그를 두 번째로 마주친 것은 <실미도>(2003) 촬영 현장에서였다. 실미도의 야외 촬영 상당 부분이 전북 부안에서 이루어졌는데, 그 당시 기자가 공중보건의로 부안군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바로 보건지소 관사 앞 사거리에서 촬영되었다.

세트장 만든다고 옆에서 밤새 뚝딱거리는 소리에 잠을 설쳐도 좋았다. 어떻게든 길거리 캐스팅이라도 되어볼까 촬영 현장을 기웃거리며 설렜다. 물론 배우들 얼굴이라도 한번 보겠다는 사심도 컸다. 캐스팅은커녕 카메라에 잡힌다고 스태프들에게 쫓겨나기도 했지만, 마침내 영화의 엔딩 신 촬영 현장에서 그와 마주쳤다.

설경구 사인 받으려다 다시 만난 배우

실제로는 설경구 사인을 받을 요량이었는데, 설경구는 생각보다 체구도 작고 의외로 평범하게 생겨서 못 알아보고 지나갔다. 그런데 그 뒤로 다부진 몸매와 검게 그을린 피부의 정재영이 떡하니 서 있는 게 아닌가. 그 시골에서 나만 첫눈에 알아볼 수 있는 배우. 하마터면 오빠라고 크게 외칠 뻔했다.

<실미도>를 통해 그는 나뿐 아니라 천만 대한 국민이 알아보는 배우로 발돋움 한다. 설경구와 경쟁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의리를 지키는 한상필 역을 맡아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극장에서 스크린 속의 그를 바라보며 감격의 눈물까지는 아니었지만 흐뭇한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 영화로 그는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한다.

 <실미도>

정재영에게 남우조연상을 안긴 영화 <실미도> ⓒ 시네마서비스


그리고 그 다음해, 장진 감독의 <아는 여자>(2004)부터 주연급의 대열에 합류한다. 그 전까지 강한 이미지의 역할을 주로 맡았다면 이때부터 그는 코믹과 멜로 등 달달하고 청량한 역할도 거침없이 소화해 낸다. 가뭄 끝에 장마를 맞은 물고기처럼. '요즘 누가 고리뗑뗑 입냐?' 같은 주옥같은(?) 명대사를 남긴 <아는 여자>의 '동치성'은 정재영이 빚어낸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그 후로 다양한 작품들에 출연했지만 <나의 결혼원정기>(2005)와 <김씨표류기>(2009)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배우 정재영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을 입은 작품이 아닐까 싶다. <피도 눈물도 없이>(2002)나 <이끼>(2010)에서의 악역도 몸서리 칠 정도로 연기해 내지만, 사슴도 울고 갈 만한 커다란 눈망울을 지닌 순박한 시골 노총각이 더 잘 어울린다. 선과 악을 냉탕과 온탕 오가듯 쉽게 움직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우가 바로 정재영인 것이다.

 <아는여자>

<아는 여자> 속 한 장면. 정재영은 악역도 몸서리 칠 정도로 연기해 내지만, 사슴도 울고 갈 만한 커다란 눈망울을 지닌 순박한 시골 노총각이 더 잘 어울린다. ⓒ 시네마서비스


오래오래 살아서 끝까지 지켜보고 싶은 배우

그의 최근작 중에서는 홍상수 감독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가 단연 돋보인다. 누가 그만큼 극 중 함춘수의 역할을 해낼 수 있었을까? 영화 속 두 명의 함춘수는 다른 듯 같은 인물이다. 정재영은 그 미세한 차이를 제대로 표현하면서도 과장되지 않은 생활 연기를 펼쳤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그렇게 많이 웃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요즘 그는 <듀얼>이라는 드라마로 사랑 받고 있다. 연기 신, 믿고 보는 배우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그의 존재감은 이제 확고해졌다. 코믹, 멜로, 악역, 생활 연기 등등 그에게 주어진 어떠한 역할도 자연스럽게 소화해 내는 배우. 10원 한 개 보태준 적 없고, 밥 한 끼 사준 적 없으나, 그의 연기생활 20년을 꾸준히 옆에서 지켜봤다는 것만으로 괜히 친한 느낌이 드는 배우, 그가 바로 정재영이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의 한 장면. 오래오래 살아서 그를 끝까지 지켜보고 싶다. ⓒ (주) 영화제작전원사


앞으로도 연기의 신을 넘어서 국민배우의 애칭을 얻을 때까지 그는 변신하고 노력할 것이다. 흥행이나 평론보다 그저 연기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는 훌륭한 배우로 남아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의 변신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어쩌면 이제 막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래오래 살아서 그를 끝까지 지켜보고 싶다.

정재영 실미도 듀얼 간첩 리철진 아는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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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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