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 후'

▲ 영화 '그 후' ⓒ 전원사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홍상수 감독의 신작 영화 <그 후>를 어제 보고 왔다. 극장에서 홍상수 영화를 보게 된 건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이후 2년 만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홍상수 감독 대부분 영화의 줄거리는 지질한 남자가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그의 작품들을 두고 '홍상수 영화는 한 작품의 변주 그리고 연속성'이라고 보통 친구들에게 소개하는데, 친구들은 이 때문에 내가 홍 감독의 작품을 보고, 다른 감독들의 작품에 비해 더욱 공감하는 거라고 덧붙인다. '아, 그래. 나 지질이다. 고맙다. 친구들아'

사실 영화감상은 본인 감상의 결과물을 타인과 공유하고 토론할 때 진짜 빛을 발하는 법이라 진짜 훌륭한 영화는 반드시 동반자를 구해서 같이 감상해야한다. 같은 장면이라도 서로 다른 해석이 부딪히기 마련인데 그 속에서 영화에 대한 올바른 감상 즉, 창조적이고 주체적이며 적극적인 감상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홍상수의 영화를 보러 갈 때 최소한 1명 이상의 동반자를 구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마침 친한 대학 동기가 예술의 전당 한가람 디자인 미술관에서 '모리스 드 블라맹크' 전시회를 가자고 물어본 터에 전시회를 조금 늦게 가고 홍상수 감독의 신작을 보러가자고 물어봤다.

"야, 영화 <그 후> 보러 가자."
"후?, 영화 이름이 후야? 한 글자?"
"뭔 강아지 소리야. 그 후, 애프터!"
"아 애프터. 누구 나오는데?"
"김민희."
"김민희? 김민희? 그 김민희?"
"그럼 김민희가 그 김민희지 다른 김민희가 있냐?"
"음, 무슨 내용인데?"
"어떤 남자가 나오는데, 사랑에 빠져 부하직원이랑."
"김민희랑?"
"음 그건 아니고, 아무튼 유부남이 사랑에 빠지는 거야."
"아, 그래 그럼 예당 앞으로 4시까지 와."

이 녀석, 생각보다 단호하다. 평소 성적자기결정권을 들먹이며, 본인의 자유로운 연애방식을 설명하던 녀석이라 당연히 예스할 줄 알았는데. 보기보다 이거 보수적이네. 하긴 뭐, 영화 작품을 보고 안 보고의 문제는 관객의 전적인 자유니까. 근데 하 혼자보기 좀 그런데.

"영화 <그 후>, 11시 50분, 성인 1명이요."

영화가 시작하고 여느 외국영화들처럼 배우 이름이 스크린 속에 크게 떠오른다. 오호. 문득 며칠 전 친구와 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부끄러워졌다.

"한국영화는 그게 문제야. 그 있잖아. 내가 문화체육관광부 홍보 영상 보러 온 것도 아닌데, 꼭 영화 시작할 때 항상 문화체육관광부 제작지원 투자총괄 이런 게 왜 그렇게 앞에 나오는 거냐. 심지어 배우 감독 제작자 등 영화를 만든 사람보다 영화 제작비를 지원해준 사람이 왜 우리나라만 우선인거냐고. 이런 황금만능주의사고에 빠진 대한민국."
"다큐 자제 좀. 무슨 <썰전> 찍냐?"

인상적인 인트로 시퀀스. 실제 부부 사이인 배우 권해효와 조윤희는 마치 그들의 일상을 엿보는 것 같은 느낌을 관객들에게 놀랍도록 부드럽게 전달한다. 롱테이크로 촬영된 그들의 밥상 대화는 홍상수 전작 속에서 쉽게 살펴볼 수 있는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항상 밥을 앞에 두고, 진지하고 속 깊은 이야기를 풀어놓는 홍상수의 스타일은 변하지 않았다. 다행이다. 정말 영화란 우리 삶의 이야기인 거니까. '자기 여자 생겼지?' 라고 물어보는 아내의 예리한(하지만 터무니없이 비논리적이다. 흔히 육감이라고 표현하는 그것) 질문에 어이없다는 듯 조소. '아니다. 저건 썩소지 썩소.' 아무튼 어물쩍 넘어가는 봉완의 모습은 실제 커플들 사이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인 만큼 효과적으로 현실적인 감흥을 전달한다.

이후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교차해가며 봉완이 창숙이라는 부하여직원과 불륜을 저질렀던 기억들을 여러 편의 조각들처럼 보여준다. 이는 우리가 보통 과거를 떠올릴 때, 특히 현재의 고통을 기반으로, 예를 들면 실연이라든가 하는 홀연히 어떤 매개체에 의해 떠올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과거 불륜의 기억을 현재의 장소에서 떠올리게, 그것도 흑백으로 컷 인 아웃하는 감독의 연출력은 가히 인간적이어서 인상적이다. 근데 어떻게 이렇게 잘 아냐고? 그거야 당연히….

하지만 모든 불륜이 그렇듯, 결국 떠나가 버린 창숙의 빈자리는 아름이라는 새로운 직원으로 채워진다. 사실 영화에서 이 아름이라는 존재의 역할은 엄청나다. 불륜의 당사자가 아닌 아름이라는 존재가 영화에서 이토록 빛이 나는 건, 영화 <그 후>가 사람들의 생각처럼 단순히 불륜을 합리화하고 상품화하는 영화가 아니라는 아주 강력한 증거다.

진짜 의미

점심시간. 햇살이 정말 예쁘다며, 감탄하는 아름. 평범한 일상인데. 밥상에 볕이 드는 게 뭐가 예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앉아있는 봉완. 그리고 계속되는 아름의 햇살 감상. 보다 못한 봉완은 무엇이든 질문해보라고 이야기를 건넨다. 정말 무엇이든 질문해도 되냐고 당돌하게 되묻는 김민희. 아니 아름.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봉완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왜사냐고 '사장님 왜 살아요?' 라고 물어보는 아름.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 봉안이 무안할 만큼 진지하다.

"우리가 왜 태어났다고 생각해? 거기에는 어떠한 합당한 이유가 없어. 그냥 태어난 거지. 사는 것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저는 무언가를 믿기 위해 살아요."
"뭘 믿는데?"
"그냥 제가 살아있다는 걸 믿어요. 잘 살고 있다는 거. 사장님은 뭘 믿으세요?"
"나?, 난 안 믿어. 믿는다는 건. 실체적 진실과 다른 거거든. 둘은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거야. 완전히."
"에이."
"진짜라니까."
"비겁하다. 그건 아니에요. 사장님. 그건 사장님이 무언가를 믿기 두려워한다는 증거에요."
"사랑이나 이런 거? 난 그걸 왜 믿어야하는 지 모르겠어."
"사랑을 못 믿으세요? 그걸 왜요? 누군가에게 사랑을 느끼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마음으로 느껴지는 거. 그렇다면 믿을 수 있는 거죠."

역시 롱테이크로 찍은 이 장면은 홍상수 영화가 단순히 남녀 간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시시콜콜한 연애영화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도대체 어떤 감독이 실체적 진실에 관해 이야기하는 대사를 영화 속에 집어넣을 수 있을까. 그리고 관객으로 하여금 진실과 증거, 믿음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철학적인 고민을 하게 할까. 좋은 영화란 자고로 관객이 본인의 가치관과 생각을 영상물로 구현된 영화감독의 가치관과 생각을 비교하며, 정교하게 다듬고, 가꾸어나가게 하는 영화다. 이런 점에서 <그 후>는 매우 좋은 영화다. '친구야 보고 있냐. 블라맹크 전시회보다 사실 네가 봐야하는 건 <그 후>였다.'

사무실로 돌아온 봉완과 아름에게 다짜고짜 찾아와 화를 내는 봉완의 아내. 그가 내민 쪽지는 봉완이 창숙을 생각하며 쓴 밀회의 증거다.

"어? 내 말이 맞지? 내 말이 틀려?"
"뭐가. 왜 또 그래."
"이 여자야? 이 X이지? 이리와."
"아 왜 그래요? 미쳤나봐. 저 아니에요."
"뻔뻔한 거 봐. 미친X."
"당신 왜 그래 진짜. 이 사람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 사람이지. 이 사람이야.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거야 도대체? 나 한심하게 만들지 마. 당신."
"일단 진정해."

아무리 설명해도, 본인의 생각을 굽히지 않는 봉완의 아내. 본인의 추론이 완벽하다는 생각아래 처음 본 여자에게 사람이 최대한으로 할 수 있는 정도의 무례함을 보인다. 롱테이크로 촬영된 이 대화 역시 본인의 믿음과 증거를 실체적 진실과 혼동하여 인간의 가장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감정인 진정성을 기반으로 무례함을 저지르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믿음으로써 실체적 진실과 가까워질 수 있다는 종교철학과 그 성찰에 자신 있게 반기를 든 셈이다.

이후, 일을 그만두려는 아름에게 공은 공이고 사는 사라며 사직을 만류하는 봉완. 그리고 그 날 밤. 아름과의 회식자리에서 잠시 밖에 나온 봉완은 뜻밖에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창숙을 만난다. 집에 가려는 아름에게 할 말이 있다며, 사무실로 가자는 봉완. 그 자리에서 봉완은 뻔뻔하게 그리고 지질하게 일을 그만뒀으면 좋겠다고 아름에게 이야기한다. 마치 우리들처럼.

모순

"사장님? 말씀해보세요. 사장님께서 저 그만둔다고 말했을 때 뭐라고 했어요?"
"응? 음. 잘 생각해보라고."
"아니죠. 말은 똑바로 하셔야죠. 사장님 정확히 뭐라고 했어요?"
"아 몰라."
"사장님 똑바로 말하세요. 뭐라고 했어요?"
"아이, 그만두지 말라고 했어."
"그만두지 말라고 했죠? 일은 일이고 사는 사다. 분명히 그렇게 말했죠? 제가 먼저 그만둔다고 했죠? 근데 지금 도대체 뭐하시는 거예요? 뭐예요?"

결국 아름이 주섬주섬 책을 챙겨 나가고, 창숙과 둘이 남은 봉완. 울부짖는다. 불륜 남성이 짊어지어야하는, 책임져야하는 것들. 자존심 구기기. 원칙 깨버리기.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하는 그런 사자후. 인상적이다. 대사 없이 울부짖음만으로 이를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건 전적으로 배우 권해효의 힘이다.

이후 이어지는 택시 안에서의 아름의 시퀀스 역시 철학적이고, 아름다운데 이 경우는 배우 김민희가 가진 개인 역량 즉, 아름다운 얼굴보다는 감독의 엄청난 연출력에 기인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부당하게 해고당한 아름에겐 부당한 해고로 오는 고통과 슬픔은 택시 밖으로 보이는 일상적인 설경 앞에 눈 녹듯 없어진다. 인간이 겪는 고통이라는 감정은 일상에서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잊을 수 있고, 잊어야한다는 감독의 메시지가 이 불과 5초 정도의 짧은 창밖을 바라보는 하나의 장면에 오롯이 담겨있다.

<그 후>, 다시 말해 그(불륜으로 빚어진 일련의 사건들) 후, 머리스타일이 사뭇 다른 아름이 사무실 앞에 선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는 걸 알려주는 건 바뀐 아름의 머리스타일 뿐이다. 너무나도 평화롭고 고요한 사무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한 이곳에, 상 받으신 걸 축하드리려고 찾아왔다는 아름을 마치 처음 본 사람처럼 대하는 봉완. 처음 만났을 때 주고받았던 대화와 동일한 내용의 대화를 계속하다, 저 기억 못하시죠? 대뜸 물어보는 아름. 역시 홍상수의 영화에서 여자주인공은 항상 똑 부러지고 당돌하다.

"아, 기억나요. 기억나요. 근데 우리 반말했었나요?"
"기억 안 나요."
"반말했었던 것 같은데요 그쵸?"
"기억 안 나요. 잘 모르겠어요."
"그런가요. 우리 반말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글은 얼마나 쓰고 있어요?"

이 장면에서 우리는 봉완에게 뜨거웠던 불륜의 기억들이 어느 새 기억 저 편으로 사라진 지 오래라는 걸 눈치 챌 수 있다. 봉완이 그것들을 기억하기에는 너무 늙었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봉완이 그토록 사랑하고 아파했던 에로스의 감정은 아가페 등 다른 종류의 사랑과 다르게 이토록 무상하고, 쉽게 잊히는 속성을 가지기 때문일 것이다. 한참을 이야기 한 후 소세키의 소설 <그 후>를 선물로 주는 봉완. 그렇게 영화는 막을 내린다.

단순하지만 단순하지 않은

사실 영화 <그 후>는 단순히 불륜 이야기만 다루는 영화가 아니다. 물론 전체적인 플롯은 불륜 이야기다. 하지만 단순히 이 영화를 홍상수 개인사와 결부시켜 자신의 불륜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영화로 인식되고 소비되기엔 이 영화가 가진 매력이 너무나 많다. 특히 아름과 봉완의 대화에서는 본능적으로 남녀 사이가 어떻게 구조되고 진행되는 지가 잘 표현된다. 이게 홍상수의 특기 중 하나다.

과거에 이 남자와 반말을 했었는지 여부는 사실 아름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이 여자는 단지 나를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이 남성이 다짜고짜 확신하지도 못하는 사실로 그것도 지질하게 우물쭈물 본인에게 친근감을 표현하는 것에 거부감이 들 뿐이고, 앞으로 친해져야지 그러니까 반말할게라며 말을 놓은 후, 그날 바로 자신을 해고했던, 그리고 그 사실을 기억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형편없는 상대 남성과 말을 놓기 싫은 것뿐이다. 여성의 언어란 이토록 압축적이고 함축적이며, 고차원적인 것이라는 걸 늘 그렇듯 이 영화에서도 남성들에게 홍상수는 일깨워준다.

하지만 홍상수의 색깔이 강하다는 게 <그 후>에선 오히려 흠으로 다가온다. 홍상수의 작품이기에 빛나는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홍상수의 작품이기에 빛이 바랜다. 아름다움에서 따와 이름이 아름인 인물은 집착과 번민, 괴로움 가득한 봉완의 삶에서, 가장 인간다운 것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는 역할을 한다. 바로 아름다움이다. 따라서 영화감독 홍상수가 이 작품을 만들며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아름 역할에 김민희라는 배우를 캐스팅한 건 자연스럽지만 동시에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선택이다.

물론 김민희라는 배우가 정말 예쁜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이를 의식한 감독이 아름의 대사를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비판하고, 자조 섞인 목소리로 수많은 시퀀스들에서 이야기를 내미는 건 이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 다시 말해 불륜을 합리화시키는 감독의 도구일 뿐이라는 세간의 평가에 감독 스스로가 응답한 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영화에 대한 전적인 몰입을 방해하게 된다. 영화를 보면서 그 어떤 사람이 김민희를 김민희가 아닌 아름이라고 인식할 수 있었을까.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영화는 기본적으로 서사와 개연성이 중요한 예술 문학 작품이다. 현실에서도 있을 법한 개연성 말이다. 하지만 그 개연성은 현실에서 실제 존재한다는 믿음과 그 증거로 가득할 때, 역설적으로 설득력을 잃게 된다. 실체적 진실이 믿음과 그 믿음을 뒷받침하는 증거와는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올해 한국영화의 수작으로 뽑을 수 있는 이유는 이 모든 것을 감독이 영화를 통해 성공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촬영 분량을 하루단위로 쪼갠 후 배우 각각에게 일일단위 각본을 써서 주는 홍상수 특유의 작업방식은 역시 이번에도 배우들의 역량을 충분히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즉흥적으로 배우와 이야기하며 대사를 만드는데 참고하는 스토리텔링 기법 역시 이 영화의 리얼리티를 한층 끌어올리는데 성공했다. 또한 감독 특유의 연출력 역시 마치 그 자리에서 해당 당사자와 이야기하는 듯 관객들에게 현장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데 주효한 역할을 한다.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 대화할 때 홍상수의 익스트림 숏 클로즈업처럼 시선을 어느 한 곳에 분별없이 집중시켜 이야기를 듣고, 다시 집중하고 그러니까.


영화 그 후 칸 영화제 홍상수 김민희 권해효 클레어의 카메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학에서는 세무학과 경제학을 공부했습니다. 신입생 첫 수업 과제로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읽고 감명 받은 바람에, 회계사, 세무사, 공무원이 되어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다른 동기생들과 다르게 프랑스로 떠나, 바게뜨와 크로와상만 주구장창 먹고 있습니다. 그래도 위안인 점은 프랑스 빵이 정말 맛있다는 점과 토마 피케티를 매일 본다는 점입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