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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에서는 지난 6월 27일부터 7월 1일까지 4박 5일간 '2017 대학생 나라사랑 역사탐방'을 실시했습니다. 전국의 역사학과 및 교육대학교 재학생 30명으로 구성된 탐방단은 일본 가나자와·도쿄 지역 일대의 독립운동사적지 등을 둘러보고 한·일 양국의 역사청산과 화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탐방 간 보고 들으며 느꼈던 경험을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기 위해 탐방 수기를 <오마이뉴스>에 연재합니다. – 기자 말

(* 1부에서 이어집니다)

[기사 수정 : 15일 오전 9시 50분]

낯선 이국땅에서 예상치 못한 사과를 받고 감격한 우리들은 모리 의원 등의 배웅을 받으며 다음 장소인 '호국신사(護國神社)'로 이동했다.

호국신사는 야스쿠니 신사와 마찬가지로 일제의 침략전쟁을 수행하다 전사한 전몰장병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는 공간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50여 개 이상이 조성되어 있다고 한다.

침략 사실을 미화하고 있던 '대동아 성전대비'

우리가 방문한 가나자와 호국신사의 경내에는 '대동아 성전대비(大東亞聖戰大碑)'라는 이름의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가까이서 지켜본 비석은 참배객들이 높이 올려다볼 수밖에 없을 만큼 거대한 규모로 조성되어 있었다.

 가나자와 호국신사 경내에 위치한 '대동아성전대비(大東亞聖戰大碑)'
 가나자와 호국신사 경내에 위치한 '대동아성전대비(大東亞聖戰大碑)'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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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석은 2000년 8월 가나자와시의 우익단체인 '일본을 지키는 모임'이 전국적인 모금 운동을 통해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단체는 1995년 당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일본 총리의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한 사과 발표(일명 '무라야마 담화'), 일본 중의원의 '반성 표명' 결의안 발표 등에 위기감을 느끼고 해당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성전(聖戰)이라는 표현에서부터 짐작이 가능하겠지만, 이 비석은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전몰장병들을 '호국영령'으로 떠받들고 있었다. 비의 정면에는 일본의 전통 시(詩)인 와카가 새겨져 있었는데, 해석하자면 다음과 같다.

'일본의 전쟁은 덴노께서 개전 당시 말씀하신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기 위한 전쟁이며, 이 전쟁은 아시아의 미래를 영원히 빛나게 할 모범이다.'

 대동아성전대비 기단에 새겨진 와카(전통 詩). 덴노를 찬양하고 일제의 전쟁범죄를 미화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대동아성전대비 기단에 새겨진 와카(전통 詩). 덴노를 찬양하고 일제의 전쟁범죄를 미화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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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현장 강의를 담당한 다무라 미츠아키 전 호쿠리쿠대학 교수는 이 비석의 철거를 주장하는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 다무라 교수는 대동아 성전대비 앞에 서서 비석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열거하기 시작했다.

비석의 기단에는 수많은 단체와 인명이 새겨져 있었는데, 비석 건립의 취지에 동참해 5만 엔 이상 기부한 이들의 명단이라고 했다. 그러나 다무라 교수는 이 명단이 허위로 작성됐음을 주장했다.

실제로 비석이 건립된 직후 다무라 교수는 명단에 포함된 단체들을 중심으로 비석 건립에 동참한 일이 있는지 일일이 조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단체들은 "비석 건립에 동의한 일이 없다"고 답했단다. 결국, 비석을 세운 이들은 당사자의 허가도 없이 무단으로 이름을 도용하는 불법까지 저지른 셈이었다.

비석에 새겨진 9명의 조선인... 영혼의 '강제연행'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비석에 조선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는 점이다. 다무라 교수가 기단부를 더듬더듬 짚어가며 가리킨 손끝에는 익숙한 이름들이 눈에 띄었다.

'박동훈(朴東薰)·김상필(金尙弼)·최정근(崔貞根)·탁경현(卓庚絃)·이왕은(李王垠)·한정실(韓鼎實)·이현재(李賢載)·이윤범(李允範)·도봉룡(都鳳龍)'

비석은 친절하게도 '조선 출신자'라고까지 그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조선인들도 '대동아 성전'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음을 알리려는 의도임이 뻔히 보였다.

특히 이들 중 7명은 조선인 가미카제 특공대원으로 건립 당시 이미 사망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비석 건립에 동참의 뜻을 보내온다는 것은 모순일 수밖에 없는 상황. 다무라 교수를 비롯한 철거 모임이 이 사실을 지적하자 건립 주체 측은 이듬해 추가로 비문을 새기는 '꼼수'를 부렸다.

'단체명과 개인명은 건립을 지지한 이들이지만, 우리들로서는 존경하고 현창하고 싶은 부대명이나 씨명을 추가하여 새겼다.'

실제로 다무라 교수는 해당 비석에 이름이 새겨진 조선인들의 유족을 찾아 소송을 준비하기도 했다. 어렵사리 한국에서 찾은 이는 비석에 새겨진 최정근(崔貞根)씨의 친동생이었다.

그러나 일본 법률상 직계 후손만 소송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소송 자격을 얻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결국, 우리 일행이 방문했을 당시에도 최정근씨의 이름은 다른 조선인들과 함께 그대로 남아 영혼의 '강제연행'을 증명하고 있었다.

 대동아성전대비 건립 기부 명단에 새겨진 '조선 출신자'들의 명단
 대동아성전대비 건립 기부 명단에 새겨진 '조선 출신자'들의 명단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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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일본의 만행 반복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어"

다무라 교수는 씁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우리에게 말했다.

"결국, 이곳은 야스쿠니 신사와 같은 문제를 갖고 있다. 야스쿠니 역시 영혼의 강제연행이 이뤄지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두려운 것은 이러한 시설들이 결국 과거 침략전쟁을 '성전'으로 미화하고 그곳에서 죽는 것을 '애국행위'로 둔갑시킨다는 것이다. 결국, 야스쿠니 신사나 대동아 성전대비나 앞으로 전쟁이 일어난다면 과거 일본이 자행했던 부끄러운 역사가 똑같이 반복될 것임을 예고하는 길이 되고 있다."

다무라 교수의 우려는 점점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일본 정치권을 중심으로 불고 있는 극우적 광풍의 기세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아베 신조 총리를 주축으로 하는 아베 내각은 집권 직후부터 과거의 침략역사를 정당화하는 발언을 쏟아내고 있으며 평화헌법에 대한 개헌을 통해 자위대를 정식 군대로 합법화하고자 끊임없이 획책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나다 도모미 일본 방위상이 장관이 되기 전 했다는 말은 아베 내각의 극우적 성향이 우려 수준을 넘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일찍이 "야스쿠니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는 자리가 아니라 국가가 긴급한 일을 당할 때 따르겠다고 맹세하는 공간"이라는 망언을 쏟아냄으로써 야스쿠니의 존재를 정당화했을 뿐만 아니라 전체주의적 발상을 고스란히 드러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대동아 성전대비 꼭대기를 장식한 히노마루(일장기)의 태양은 마치 군국주의의 망령이 여전히 살아남아 우리를 조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비석을 관람하고 돌아서는 탐방단 학생들의 표정 역시 한결같이 어둡기만 했다.

 대동아성전대비를 둘러보고 있는 탐방단 학생들
 대동아성전대비를 둘러보고 있는 탐방단 학생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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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이 '마지막 밤' 보낸 가나자와 성

가나자와에서의 2일 차 아침이 밝았다. 이날도 하루 종일 빡빡한 일정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탐방단 일행은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곳 가나자와는 본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측근이었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가문이 대대로 다스리던 영지였다. 지금도 가나자와에는 마에다 가문의 대저택이었던 '가나자와 성(城)'이 남아있다. 그러나 우리가 갔을 때는 여러 차례의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된 탓에 일본 성곽의 웅장함을 느끼기는 힘들었다.

 가나자와성 입구
 가나자와성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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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가 여기에 온 목적은 느긋하게 성곽이나 감상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바로 윤봉길 의사가 마지막 밤을 보낸 구금소가 이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 의사는 1932년 12월 18일, 오사카에서 가나자와로 이송된 뒤 다음 날 아침 육군 작업장에서 순국하기 전까지 이곳 가나자와 성내에 있던 육군 9사단 구금소에서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은 윤 의사가 머물렀던 구금소 건물이 남아있지 않은 탓에, 역사학계에서조차 정확한 위치를 특정 짓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다만 당시 구금소 터가 있었을 것으로 유력하게 추정되는 성내 공중화장실 일대를 비롯해 몇몇 추정 지역들을 둘러보면서 이곳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을 윤 의사를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가나자와성 내에 위치한 공중화장실. 역사학계에서는 윤봉길 의사 구금소 터로 추정하고 있다.
 가나자와성 내에 위치한 공중화장실. 역사학계에서는 윤봉길 의사 구금소 터로 추정하고 있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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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세 청년 윤봉길, 죽음 앞두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 역시 천천히 건물 한 바퀴를 돌며 85년 전 이곳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을 청년 윤봉길을 떠올렸다.

죽음을 앞둔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리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순국 당시 그의 나이 25세. 살아있다면 내 또래였을 나이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치열한 삶을 살아오지도 않았고, 당장 죽음을 앞둔 상황을 겪어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마음을 읽어보려 애썼지만, 그가 느꼈을 감정과 생각을 감히 짐작해내기란 불가능했다.

때마침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바로 윤 의사가 두 아들에게 남겼다는 유언이었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그가 남긴 유언을 통해 비로소 나는 그가 마지막까지 품었던 생각의 일면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당당했다. 조국의 독립이라는 민족적·시대적 과제를 혼자서 짊어진 채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그리고 스스로 불멸의 역사가 됐다.

어쩌면 그가 두 아들에게 남긴 유언은 바로 여기에 서 있는 나, 그리고 우리 청년들 모두에게 청년 윤봉길이 전하는 말일는지도 모른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문득 나의 삶은 그의 삶에 비춰볼 때 부끄럽지 않은가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이곳에서 만난 청년 윤봉길은 "너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고 끊임없이 묻고 있는 것만 같았다.

(* 3부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 <일본 지역 한국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서>, 윤소영(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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