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제작한 <만다라>를 통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우뚝 선 임권택 감독. 그는 1984년 당대 최고의 촬영 감독 정일성, <짝코>(1980)와 <만다라>를 집필한 시나리오 작가 송길한, 그리고 시대의 명배우 김지미와 의기투합해 불교 사상을 기반으로 둔 한 편의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임권택을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한 <만다라>가 소승(수행을 통한 개인의 해탈을 추구)적 관점에서 불교를 다루었다면, 김지미를 주인공으로 한 <비구니>(1984)는 대승(널리 인간 전체를 구제하여 부처의 경지를 이르는 것을 추구)적 관점에서 불교 영화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원래 각본 중 1/5가량 촬영이 진행됐을 때 <비구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스님들의 반대로 제작 중단되었다. 그로부터 33년 뒤, 미완성작으로 남은 <비구니>는 지난 5월 열린 제18회 전주국제영화제(아래 JIFF)와 한국영상자료원의 합작을 통해 부분 복원판으로 세상에 공개됐다.

 제18회 전주국제영화제 첫 공개 이후 지난 29일부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리는 '매혹의 배우, 김지미' 회고전에서 상영한 <비구니> 부분 복원판 한 장면

제18회 전주국제영화제 첫 공개 이후 지난 29일부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리는 '매혹의 배우, 김지미' 회고전에서 상영한 <비구니> 부분 복원판 한 장면 ⓒ 한국영상자료원


송길한 특별전 일환으로 진행된 JIFF의 '<비구니> 프로젝트'는 부분 복원판을 공개하기에 앞서, 당시 <비구니>에 참여했던 주역들의 인터뷰를 통해 <비구니>가 제작 중단될 수밖에 없었던 뼈아픈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그들의 말을 대략 요약하자면, <비구니> 프로젝트가 중도에 무산된 가장 큰 배경에는 '10.27법난' 등 전두환 정권과 불교계 간의 갈등이 있었다. 그에 대한 자세한 내막까지는 쉬이 알 수 없지만, 당시 스님들은 비구니(김지미 분)가 외간 남자에게 몸을 팔고, 전라의 상태로 물속에 뛰어든다는 장면을 문제 삼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남아있는 필름의 디지털 복원판을 눈으로 확인해보니, 스님들이 <비구니>의 완성된 결과물을 보고 이 영화에 대한 판단을 내렸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든다. 스님들을 격분하게 했던 문제의 그 장면, 즉 비구니가 외간 남자와 정사를 나누는 설정은 불교 수행자에게 절대적으로 금하는 오욕락(물질욕, 수면욕, 식욕, 성욕, 명예욕) 중 하나인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고아들을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주는 조건으로 하룻밤을 원하는 트럭 운전사(김희라 분)의 요구에 할 수 없이 응한 비구니는 이후 계율을 어겼다는 자책감에 괴로워하다가 육신의 더러움을 씻어 내리기 위해 엄동설한에 전라의 상태로 찬 물에 뛰어든다. 이 장면 역시 관객들의 음욕을 자극하는 외설이라기보다 중생들을 위해 계율을 어기고 온몸으로 괴로워하는 비구니 스님의 고뇌가 강조된다.

33년 만에 세상에 공개된 불멸의 미완성작

지금까지 남아있는 필름만으로 확신하기는 어렵겠지만 장담컨대, 만약 <비구니>가 제대로 완성만 되었다면 최소 <만다라>를 뛰어넘는 대작이 되지 않았을까. <만다라> 또한 온갖 어려움을 뚫고 부처가 되고자 하는 인간을 그린 훌륭한 불교 영화이지만, 개인적 차원의 해탈을 초월하여 중생 구제를 목표로 하는 대승적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자 했던 <비구니>의 울림이 더 크게 다가온다. <비구니>가 다루고자 했던 세계관은 차치하더라도, 사운드 없어도 미간 근육의 움직임만으로 관객들을 숨죽이게 하는 김지미의 열연, 전쟁 신만 놓고 봐도 한국 영화사에서 한국 전쟁(6.25)을 다룬 최고의 장면으로 꼽을 만큼 빼어난 완성도를 자랑한다. 미완성작으로 끝난 <비구니>가 두고두고 아쉬운 이유다.

 제18회 전주국제영화제 첫 공개 이후 지난 29일부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리는 '매혹의 배우, 김지미' 회고전에서 상영한 <비구니> 부분 복원판 한 장면

제18회 전주국제영화제 첫 공개 이후 지난 29일부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리는 '매혹의 배우, 김지미' 회고전에서 상영한 <비구니> 부분 복원판 한 장면 ⓒ 한국영상자료원


<비구니>는 여타 1970·1980년대 한국 영화들처럼 정부 검열 당국에 의해 제재를 받았다기보다, 정부와 종교계 간의 갈등 때문에 제작이 중단된 특이한 케이스이다. 그런데도 부당한 간섭과 탄압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피땀 흘려 만든 결과물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는 안타까운 역사는 더 이상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박근혜 정부의 문화 예술인 블랙리스트 탄압에 대한 후유증이 쉬이 가시지 않는 요즘, 전두환 독재 정권의 희생양으로 수장된 원조 블랙리스트 <비구니>의 복원이 새삼 고맙고 반갑다.

지난 제18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송길한 특별전 일환으로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한 <비구니> 복원판은 지난달 29일부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리는 '매혹의 배우, 김지미' 회고전에서 관객들과 만난 바 있다. 김지미 회고전은 12일까지 계속되지만, <비구니> 복원판은 앞으로 언제 어떻게 관객들과 만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특별 상영형태로 기획되고 만들어진 <비구니> 복원판이 정식 극장 개봉을 통해 관객들과 만나는 방식은 요원해 보인다. 그러므로 한국영상자료원이 운영하는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내 VOD 서비스, 그게 여의치 않다면 DVD 제작, 아니면 상영회를 통해 후대 영화인, 관객들이 이 영화를 접할 기회가 종종 만들어졌으면 한다. 다시는 '문화 예술계 블랙리스트'와 같은 충격적인 사건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각성제 차원에서라도 불멸의 미완성작 <비구니>가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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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금 여기에서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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