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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에서는 지난 6월 27일부터 7월 1일까지 4박 5일 간 '2017 대학생 나라사랑 역사탐방'을 실시했습니다. 전국의 역사학과 및 교육대학교 재학생 30명으로 구성된 탐방단은 일본 가나자와·도쿄 지역 일대의 독립운동사적지 등을 둘러보고 한·일 양국의 역사청산과 화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탐방하는 동안 보고 들으며 느꼈던 경험을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기 위해 탐방기를 <오마이뉴스>에 연재합니다. – 기자 말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는 내게 일본은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가봐야 할 나라였다. 일본 내 독립운동 사적지들과 일본 우익세력의 역사왜곡의 실체를 두 눈으로 꼭 보고야 말겠다는 욕구가 마음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공부하는 것이라 믿는 나로선 더욱 그랬다.

'올해도 결국 일본 한 번 가보지 못하고 졸업하나...'

아쉬움을 느끼던 차에, 독립기념관에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일본 탐방단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접했다. 드디어 오랜 숙원을 풀 기회가 온 것이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한 줄 한 줄 지원서를 작성해나가기 시작했다.

"저는 역사는 외우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하고 그 의미를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진정한 공부가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졸업을 코앞에 두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책 속에 함몰된 채 죽은 지식만을 외우고 있는 게 아닌가 두렵습니다. 이번 답사를 통해 역사적 현장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두 발로 걸으며 그들의 정신을 어떻게 되새길 것인지 답을 찾고자 합니다."

진심이 통했던 걸까. 탐방단의 일원으로 선발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때부터 정신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부랴부랴 참가비를 마련하고, 여권을 만들고, 여비를 엔화로 환전하기 바빴다. 군 전역 후 몇 년 만에 가는 해외인지라 내심 그런 분주함을 즐기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마침내 공식 탐방 일정이 시작되는 6월 27일이 밝았다. 사전교육이 이뤄지는 천안 독립기념관으로 향했다. 이번 탐방에 함께 할 학생들이 저마다 배낭 하나씩을 짊어지고 캐리어를 끈 채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표정 역시 일본 여행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 차 있는 듯했다. 초면의 어색함을 뒤로한 채 우리는 교육장으로 이동해 탐방 일정과 주의사항, 방문 지역에 대한 사전교육 등을 받았다.

탐방 전 우리에게 부여된 묵직한 화두

 독립기념관에서 실시한 '2017 나라사랑 역사탐방' 자료집과 명찰
 독립기념관에서 실시한 '2017 나라사랑 역사탐방' 자료집과 명찰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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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적인 탐방에 앞서 학생들이 '이번 탐방에서 무엇을 보고 배울 것인가'에 대해 발표하는 모습
 본격적인 탐방에 앞서 학생들이 '이번 탐방에서 무엇을 보고 배울 것인가'에 대해 발표하는 모습
ⓒ 한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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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측은 '미래 강단에서 역사를 가르칠 예비 교원들에게 독립운동 사적지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고 나라사랑 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번 탐방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생각할 때 여기 참여한 학생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과 목적을 갖고 탐방에 임하고 있었다. 나 역시도 그럴 듯한 목적의식을 담아 지원서를 제출했지만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생애 첫 일본여행에 대한 기대로 더 부풀어 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 까닭에 사전교육이 마무리될 때쯤 '이번 탐방에서 무엇을 보고 배울 것인가'라는 화두가 과제로 부여되자 깊은 고민에 빠졌다. 뭔가 거창한 답을 찾아야만 할 것 같은 중압감이 두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4박 5일의 여정은 내게 부여된 묵직한 화두에 대해 어떻게 답해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과 함께 시작됐다.

설레는 마음으로 비행기에 몸을 싣다

이튿날 새벽 4시 30분,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난 우리는 출국 시각에 맞추기 위해 일찌감치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다. 바뀐 잠자리로 잠을 설친 터에 새벽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느라 모두들 비몽사몽이었다.

그러나 공항에 도착해 티켓을 받고 출국심사를 마친 후부터는 얼굴에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한국의 대학생을 대표해 독립운동 사적지를 답사하러 간다는 경건하고 엄숙한 명분도 해외여행을 앞둔 젊은 대학생들의 설레는 마음을 덮을 수는 없었다.

1시간 반 가까이 하늘을 난 끝에 비행기는 무사히 일본의 고마츠공항에 착륙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는 곧장 첫 답사코스가 위치한 이시카와(石川)현 가나자와(金澤)시로 향했다.

일본 열도의 최서쪽에 위치한 가나자와는 넉넉한 시골인심이 인상적인 작은 마을이었다. 민속공예 등 전통문화가 잘 보존된 지역으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인들에게만큼은 마냥 따뜻한 공간으로만 기억되는 곳은 아니었다. 바로 이곳에서 윤봉길 의사가 생의 마지막 숨을 거뒀기 때문이다.

윤봉길 의사가 마지막 날을 보낸 가나자와

 1932년 12월 19일, 윤봉길 의사의 순국 직후 장면을 촬영한 사진. 미간의 관통 자국이 선명하다.
 1932년 12월 19일, 윤봉길 의사의 순국 직후 장면을 촬영한 사진. 미간의 관통 자국이 선명하다.
ⓒ (사)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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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4월 29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애국단 소속 단원이던 윤봉길 의사는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일제의 천장절(天長節, 덴노의 생일) 기념행사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거사를 준비한다.

오전 11시 40분께, 윤 의사가 기념식장 연단에 물통 폭탄을 던지자 기념식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윤 의사의 의거로 상하이 점령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를 비롯한 일본 육군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등 일본군의 고위 장성과 정부 요인들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

윤 의사는 일제에 의해 곧장 체포됐고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곧바로 사형이 이뤄지지는 않았다. 일제는 윤 의사를 일본의 오사카로 데려갔다가 다시 가나자와로 옮겼다. 윤 의사는 가나자와로 이송된 지 하루 만인 12월 19일, 미쓰코지야마(三小牛山)의 육군 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25세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게 된다.

육군 묘지 쓰레기장에서 발견된 윤봉길의 유해

일제는 윤 의사가 죽은 뒤에도 철저하게 보복했다. 윤 의사의 유해를 아무도 모르게 매장한 뒤 위치를 숨겼다.

1945년 해방을 맞아 환국한 김구는 가장 먼저 해외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를 봉환하는 일에 착수했다. 김구의 지시에 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해발굴단'이 조직됐다. 유해발굴단은 1946년 3월 2일 가나자와에 도착해 현지의 한인 청년 50명을 모아 노다야먀(野田山) 육군 묘지로 향했다.

며칠 밤낮에 걸친 발굴 작업 결과, 이들은 육군 묘지 가장자리의 쓰레기장에서 윤 의사의 유해를 식별할 수 있었다. 1미터도 채 파지 않은 상황에서 관과 함께 윤 의사를 묶었던 형틀이 나왔다. 곧바로 양복과 구두도 식별됐다. 마침내 수습된 유해는 그해 5월 이봉창·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여전히 찾지 못한 7점의 유해... 윤 의사의 '분묘'나 다름없어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노다야마 공동묘지 한 켠에 마련된 '윤봉길 의사 암장지적비'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노다야마 공동묘지 한 켠에 마련된 '윤봉길 의사 암장지적비'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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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처음 방문한 지역이 바로 윤 의사가 암장돼 있었던 노다야마 공동묘지였다. 현재 이곳에는 윤 의사의 암장지였음을 알리는 작은 '암장지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우리는 비석 앞에 헌화하고 한국에서 준비해 온 소주 한 잔을 부어 올리며 낯선 타향에서 오랜 세월 고통 받았을 윤 의사의 넋을 위로했다.

마침 그곳에는 윤봉길의사암장지보존회 박현택 회장이 우리의 방문 소식을 듣고 마중나와 있었다. 그는 윤 의사 유해 발굴에 참여했던 고 박인조씨(2009년 작고)의 조카로 작은아버지의 뒤를 이어 암장지적비 보존 운동에 앞장서고 있었다.

박 회장은 "발굴 당시 아무리 파도 유해가 나올 기미가 없었다"라며 "육군 묘지를 관리하던 승려를 추궁한 끝에 정확한 위치를 안내받을 수 있었다"라고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또 "발굴단이 발굴하다 지친 나머지 걸터앉았던 자리가 바로 유해가 매장돼 있었던 자리였다"라면서 하마터면 눈앞에서 윤 의사의 유해를 찾지 못할 뻔 했다고 말해 설명을 듣는 우리들로 하여금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다.

그의 작은아버지 박인조씨는 윤 의사의 유해가 고국으로 봉환된 뒤에도 꾸준히 이곳을 찾아와 윤 의사를 추모했다고 한다. 발굴 당시 208점의 뼈 중 7점의 뼈를 끝내 찾지 못한 탓에 이곳 역시 윤 의사의 유해가 남아있는 '분묘'나 다름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박씨는 1987년부터 본격적으로 암장지를 사적지로 정비·보존하는 운동을 추진했다. 가나자와시의 평화운동단체들이 이에 호응한 결과 마침내 1992년 12월 19일, 윤 의사 순국 60주기가 되던 날 지금의 비석을 세울 수 있었다.

극우단체의 방해 끝에 어렵사리 세워진 '암장지적비'

박 회장과 함께 마중나온 이들 중에는 가나자와 지역의 시의원인 모리 가츠토시 의원(일본 사회민주당)도 있었다. 그 역시 윤 의사의 암장지적비를 보존하는 활동에 함께하고 있다고 했다. 모리 의원은 어색한 한국어로 우리에게 인사말을 건넨 뒤, 암장지적비 건립 과정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그는 "암장지적비 건립운동 당시 일본 극우단체의 집요한 방해가 있었다"라며 "당시 일본의 우익단체 회원들은 '일본인을 죽인 테러리스트를 어떻게 기릴 수 있느냐'며 격하게 반발했다"라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모리 의원의 회고에 따르면 암장지적비 건립은 당시 가나자와 시장이었던 야마데 다모쓰의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전해진다. 야마데 시장은 역사적 책임을 무겁게 여기는 사람으로 윤 의사에 대한 일제의 만행에 책임을 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리 의원은 "진정한 의미의 과거 청산은 아직도 과정에 놓여있다"라며 "과거를 반성하기 위해서라도 이 장소는 소중하다"라고 덧붙였다.

예상치 못했던 모리 시의원의 사과
 일본 가나자와시 시의원인 사회민주당 소속 모리 가츠토시 의원
 일본 가나자와시 시의원인 사회민주당 소속 모리 가츠토시 의원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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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때였다. 설명을 하던 모리 의원이 갑자기 우리 앞에 고개를 숙여 절을 하는 게 아닌가. 그때껏 통역을 담당하던 윤소영 연구위원(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역시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모두들 상황 파악이 안돼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무렵, 윤 위원이 목이 메이는 소리로 모리 의원의 말을 전했다.

"과거 침략전쟁을 일으켰던 일본군은 '침략군'으로 불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우리 조상들이 당신들의 조상들에게 험난한 경험을 하게 한 점에 대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비로소 그가 고개를 숙인 까닭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구 하나 울컥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동시에 박수갈채를 보내 모리 의원의 진심어린 사과에 화답했다. 그만큼 일본의 현역 정치인이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죄하는 모습은 보기 드문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윤봉길 의사 순국기념비 앞에서 모리 가츠토시 의원과 함께
 윤봉길 의사 순국기념비 앞에서 모리 가츠토시 의원과 함께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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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일본과 지난한 싸움을 벌여온 것도 배상금 몇 푼 받아내고자 함이 아니었다. 바로 일본 정계의 책임 있는 자들로부터 솔직한 사과를 듣고자 함이었다. 그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추우나 더우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주 수요일만 되면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고 소녀상을 세워 과거에 대한 반성을 촉구해온 게 아니던가.

그러나 일본의 책임 있는 정치인들은 여전히 과거의 침략사실을 부정하며 살아남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끊임없는 상처를 안기고 있는 상황이다. 적극적으로 피해자를 보호하고 일본을 향해 책임 있는 조치를 요구할 의무가 있는 우리 정부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피해자들과의 사전 논의 없이 합의를 졸속으로 체결한 뒤 '최종적·불가역적'이라는 말로 다시 한 번 피해자들을 우롱하는 만행을 저지르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쌓여만 가던 설움과 울분이 모리 의원의 사과 한 마디에 그만 터져나오고 말았다. 이날 그는 우리가 윤 의사의 순국기념비 앞에서 다함께 애국가를 부를 때에도 태극기를 들고 끝까지 함께해줬다(귀국 전 그는 우리에게 또 한 번 감동을 선사했다. 그 이야기는 뒤에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모리 의원의 사과가 더욱 의미 있었던 까닭

부끄러운 과거를 정면으로 직시하고 솔직하게 사과하는 모리 의원을 보면서 '일본에도 여전히 양심과 지성이 살아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내심 감격스러웠다.

어느 사회나 비정상적으로 비뚤어지는 경향을 보일 때, 그것을 견제하고 균형을 맞추는 역할은 소수의 지성이 수행하게 된다. 점점 극우강경화로 치닫는 일본 정치권의 현실을 생각하면 모리 의원의 사과는 그래서 더욱 값지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으로 '일본의 책임 있는 정치인들이 모리 의원만 같았더라면 한·일 양국의 관계도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텐데...'라는 아쉬움과 씁쓸함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다.

(* 2부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 <일본 지역 한국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서>, 윤소영(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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