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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8. 19. 전투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경북 왜관 ⓒ NARA
융단폭격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한국전쟁 사진을 검색하던 2004년 2월 17일, 그날은 전쟁 초기 자료를 유난히 많이 발견했다. 특히 RG 192 상자에서 나온 1950년 8월 19일 폭격으로 폐허가 된 경북 왜관 시가지 사진을 보자 그 시절의 추억이 아련히 떠올랐다.

사진은 1950년 8월 16일 다부동전투 배후지인 왜관·약목·구미 일대의 '융단폭격' 직후의 왜관 모습을 담았다. 할머니 친정 동생이 왜관에 살고 있었기에 나는 왜관에 두어 번 가본 적이 있었다. 그 무렵 왜관에는 성한 건물 하나 남아나지 못했다. 할머니 동생도 그 무렵 왜관 한복판에서 움집 같은 초가집에서 아주 남루하게 살고 있었다.

1950년 8월 16일의 '융단폭격'은 내게 가위눌림이었다. 그때의 기억은 여태 남아 있다. 전투기 편대의 폭탄 투하와 폭발음, 전투기들의 저공비행으로 인한 굉음, 폭발 직후 진동과 함께 솟아오르는 흙더미 등은 아마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애초 인민군은 1950년 8월 15일 내로 부산까지 밀어붙이기로 했다. 하지만 유엔군의 개입으로 낙동강 최후 방어선인 '워커라인'이 설정되자 인민군은 더 이상 남하치 못한 채 그곳에서 고전하고 있었다. 수안보까지 내려온 인민군총사령관 김일성은 8월 15일까지 대구를 점령하라고 새 지령을 내린 모양이었다.

그러자 인민군은 그 지령에 따라 사력을 다해 8월 15일, 유학산 839 고지를 그들의 손아귀에 넣었다. 유학산 839 고지는 대구가 빤히 바라보여 요지 중의 요지다. 유엔군은 그 고지를 포기할 수 없었다. 유엔군은 곧 미8군사령부에 긴급히 폭격 지원을 요청했다.
1950. 8. 미 전투기들이 북한군 점령지역에 폭탄을 무차별적으로 투하하고 있다. ⓒ NARA
미8군사령부는 유엔군의 지원 요청에 따라, 8월 16일 오전 11시 58분부터 오후 12시 24분까지 26분 동안 약 960톤의 폭탄을 집중적으로 쏟아부었다. 폭탄투하 목표지점은 왜관·약목·구미 일대에 너비 5~6km-길이 12km. 이 포격에 B-29 폭격기 5개 편대 98대가 투입됐다. '융단폭격'이었다. 폭격 이후 왜관 일대는 지축이 흔들리는, 폭풍의 불바다로 변했다.

나는 그때 폭탄투하 목표지점에서 가까운 과수원 땅콩밭에서 그 장면을 목격했다. 6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히 그날의 폭격 장면을 증언할 수 있는 이유다.

이 융단폭격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폭격이었다. 공중에서 지상으로 폭탄을 마구잡이로 쏟아부었다.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앞서 프랑스 해안에 행한 대폭격작전을 그대로 원용했다.

그때 융단폭격으로 왜관·약목·구미 일대에는 성한 집이 거의 없어졌다. 특히 낙동강 철교가 있었던 왜관은 그 피해가 더욱 심각했다. 그해 초가을 인민군이 물러난 뒤 우리 가족 일행은 피란지 고아면 대망동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구미 일대 시가지는 산불이 지나간 것처럼 온통 잿더미였다.
1951. 9. 북한 원산 부근 상공을 비행하는 미 전투기. ⓒ NARA
밤낮없는 폭격

한국전쟁 3년 동안, 한반도에서는 엄청난 인명 피해와 물적 손실이 발생했다. 인명 피해는 피아 사상(死傷) 50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며, 물적 손실은 가히 추산할 수 없을 정도였다. 거의 모든 전투지는 초토화됐다. 당시 미 해군 소장은 브루스 커밍스와 존 할리데이가 쓴 <한국전쟁 전개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밤낮없이 폭격했다... 그것은 아마도 한 도시에 이뤄진 함포공격이나 공중폭격으로는 역사상 최장 시간일 것이다."

그는 동해안에서 가장 큰 도시인 원산에서의 삶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원산에서는 길거리를 걸어 다닐 수 없었다. 24시간 내내 어느 곳에서도 잠을 잘 수 없었다. 잠은 죽음을 의미했다."

한국전쟁이 끝났을 때 북한의 수도였던 평양은 건물이 단 두 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2005년 평양에서 남북작가대회에 참석했을 때 안내원에게 물어봤다.

"고도(古都) 평양에는 왜 전통 기와 건물이 보이지 않습니까?"
"기런 말씀 하지 마시라요. 미제 야수들이 우리 공화국 전 지역을 쌕쌕이 폭격으로 아주 쑥대밭을 만들었지 뭡니까? 기래서 평양에는 지난날 전통 기와 가옥이 없는 겁니다."
"아, 네."

묘향산 보현사에서도, 금강산 신계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유엔군에게 한국의 문화재는 안중에도 없었다. 깊은 산중의 절까지도 은거지가 된다고 해 모조리 폭격하거나 불태워버렸다.

"한반도 전역 산업 기반 역시 거의 초토화되었다. 미군은 개전 이후 1953년 4월 말까지 26만 발의 폭탄, 2억 발의 탄환, 약 40만 발의 로켓탄, 약 150만 발의 네이팜탄을 한반도에 쏟아부었다고 한다. 이는 태평양전쟁 중에 미군이 사용한 각종 폭탄량을 상회하는 것이었다. 사실 남북한 파괴의 9할은 미군의 물량 작전, 초토화 작전, 융단폭격의 결과로 빚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조성오 <우리역사 이야기 3> 120쪽 
1950. 11. 20. 전란으로 굴뚝만 남은 원산의 공장지대 ⓒ NARA
한국전쟁 최대 호혜국은 일본

한국전쟁 중 대량의 폭탄·포탄·탄알 사용으로 한반도는 폐허로 변했고, 특히 북한 지역은 원시상태로 돌아갈 정도였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한국전쟁은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세계 무기상들의 농간으로 발발했다는 설'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제2차 세계대전 때 남은 무기 재고를 모조리 한반도에 쏟아부은 다음에야 끝났다. 사실상 한반도는 당시 강대국인 미소(美蘇)의 무기 경연장이었다.

1945년 미국의 원자탄 투하로 예상보다 일찍 태평양전쟁이 끝나자 전쟁 참가국들은 엄청난 무기 재고량으로 몸살을 앓았다. 군수공장이 돌아가지 않자 실업 사태 등이 발생해 전후 세계 경제는 장기불황의 늪에서 허덕였다. 이 무기들을 어딘가 부어야 할 희생양, 곧 전쟁 지역이 필요했다. 그 대상은 미소가 38선을 경계로 첨예하게 대치하던 한반도였다.

세계 무기업자들은 한국전쟁 발발로 그들의 재고를 모조리 '땡처리'했다.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세계 경제는 되살아났다. 특히 일본은 한국전쟁 덕분으로 패전의 잿더미에서 대호황을 누렸고,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일본의 군복 생산공장에서는 단추를 달 시간마저도 없었다는 후문이 나돌 정도였다. 그 정도로 공장이 '신나게' 돌아갔던 게다.

그제나 이제나 한반도는 화약고로, 남과 북은 아직도 국제 무기업자들의 봉 노릇을 하고 있다. 이즈음도 한국은 미국 무기업자의 가장 큰 고객인 모양이다. 일부 모리배들은 그들에게 리베이트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검은돈을 받아쓰면서 시민들이 애꿎게 죽든 말든 전쟁놀이를 부추기며 자신들의 배만 불리는지 모를 일이다.

한국전쟁 전후로 지리산에서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이 남긴 말이다.

"새벽부터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들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민주주의가 무엇이냐고. 과연 몇 사람이 이를 알겠는가? 지리산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군경과 빨치산들에게 물어보라. 너희들은 왜 죽었느냐고. 민주주의를 위해 혹은 공산주의를 위해서 죽었다고 자신있게 대답할 자 몇이나 있겠는가?"
1951. 9. 6. 한반도를 초토화시킨 포탄 껍질들. ⓒ NARA
평화와 통일,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안

오호 애재라 한민족이여! 이제쯤이면 정신을 차렸을 때도 됐으련만, 아직도 정세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또 얼마를 더 당한 뒤에야 미몽에서 깨어날까?

이제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1950년의 한국전쟁은 하수로 남북 모두 공도공멸(共倒共滅, 함께 쓰러지고 다 같이 멸망)하는 최악의 사태에까지 이를 것이다. 정치지도자들의 각성을 촉구한다.

이런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게 바로 정치다. 나는 남과 북이 통일로 가는 길에 반드시 거쳐 가야 할 것은 먼저 현재의 정전협정에서 발전된 평화협정 체결에 있다고 강조하고 싶다.

남과 북 그리고 북과 미국이 평화협정을 통해 군비축소와 상호 호혜 선린의 정신으로 신뢰를 쌓아간다면 마침내 자연스럽게 한반도에는 전운이 걷힐 것이며, 마침내 우리 겨레는 평화와 통일 두 마리 토끼도 한꺼번에 잡을 수 있을 것이다. 
1950. 8. 15. 전투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마을. ⓒ NARA
내 어린 시절 피란생활 중 가장 무서웠던 것은 전투기의 공습 그리고 전투기의 기총소사와 대포의 포탄 세례였다. 그 폭탄이나 포탄·총알은 정해진 방향이 없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폭탄이나 포탄에 가족 몇 사람이 한꺼번에 희생돼 지금도 내 고향 융단폭격 피폭지역 마을에서는 한날에 제사를 모시는 집이 많다고 한다.

그 당시 유엔군들은 가능한 자신들의 인명 피해를 줄이고자 전투에 앞서 적진지를 전투기 공습과 대포 포격으로 불바다로 만든 뒤 보병을 투입했다. 그러다 보니 도시나 마을의 촌락 그리고 공장들은 죄다 파괴되기 마련이었다.

한국전쟁 직후, 거의 모든 공장이 파괴돼 한동안 가정에서 쓰는 성냥조차도 귀했다. 그래서 원시시대처럼 부싯돌이 나돌았고, 성냥 알이 귀해 인천의 성냥공장 노동자가 성냥 알을 훔쳐 나온다는 괴상한 노래까지도 유행했다.

이번 기사에서는 '전란의 잔해'라는 주제로 사진을 모아봤다.

(이 기사에 실린 사진들은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직접 검색한 것으로 스캔한 원본 그대로 게재함을 밝힌다.)
1950. 11. 2. 원산, 폭격으로 허물어진 성당을 신도들이 청소하고 있다. ⓒ NARA
1950. 11. 18. 전란으로 파괴된 흥남 송전소. ⓒ NARA
1950. 12. 16.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교. ⓒ NARA
1950. 9. 30. 전란으로 폐허로 변한 대전역 플랫폼. ⓒ NARA
1950. 8. 10. 원산, 열차 정비공장이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 ⓒ NARA
1950. 10. 7. 수원. 부서진 다리 위에 파괴된 인민군 탱크 ⓒ NARA
1951. 4. 1. 전화로 온통 폐허가 된 춘천시가지. ⓒ NARA
1950. 9. 인천. 폭격 후 불타고 있는 도시. ⓒ NARA
1950. 11. 8. 전란으로 폐허가 된 원산시가지. ⓒ NARA
951. 10. 18. 미군 폭격기가 북한 지역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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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0.31. 원산. 헐벗고 굶주렸지만 웃음은 떠나지 않는 아이들. ⓒ NARA
1950.9. 한 지아비가 시각장애인 아내를 지게에 진 채 피란길을 떠나고 있다. ⓒ NARA
1950.10. 서울 은평. 한 소녀가 동생을 돌보며 불타버린 야외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 NARA
1953.2.19. 전란 중이지만 설빔을 차려 입은 천진난만한 소녀들이 민속놀이의 하나인 널뛰기를 하고 있다. ⓒ NARA
1950.10. 옹진전투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한 국군 특무상사가 목발을 짚은 채 침통한 표정으로 철조망 앞에 서 있다. ⓒ NARA
기자의 저서. 왼쪽부터 <카사, 그리고 나>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약속> <항일유적답사기>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 박도
태그:#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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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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