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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지가 넘치는 세상이다. A4이면지는 회의나 모임 때면 수십 장씩 생긴다. 왜들 한 쪽에만 프린트하는지, 낭비가 심하다. 한 면이 새하얀 A4용지를 그냥 버리기는 아깝다. 메모도 하고 프린터에 넣어 활용도 하지만, 많이 남는다. 이면지를 쌓아놓고 글씨도 쓰고, 그림도 그린다. 붓펜으로 한자를 쓴다. 덕분에 낙서하는 취미가 생겼다.

만년필
 만년필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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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는 마음을 풀어놓는 심심풀이이다. 이왕이면 붓펜이나 굵은 펜 만년필로 큼직큼직 끄적거려야 기분이 잘 풀리는 느낌이다. 신문 읽으면서, 티브이 보면서, 얘기 들으면서 끄적거린다. 마음에 닿는 문장이 나오면 베끼기도 한다. 한자낙서가 제일 재미있다. 뻔 한 단어도 한자로 쓰면 한 자 한 자 의미를 가진 그림이 된다. 붓펜을 쥐니 서예 초보 때 손맛이 돌아온다. 악필도 추상화처럼 멋있게 보인다.

21세기는 펜보다 키보드를 더 많이 쓰는 디지털 시대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 하루 종일 키보드 두드리며 사는 직장인들도 많다. 예전사람들이 만년필 고르듯, 요즘 사람들은 키보드를 고른단다. 손맛이 좋도록 나무로 만든 키보드, 옛날 타자기처럼 타다닥 소리를 내는 키보드도 있다고 한다. 나도 서랍 속에서 오래 묵은 만년필을 찾아냈다. 3개나 된다. 세필, 중필, 굵은 펜, 기분에 따라 골라잡는다.

이면지 낙서는 꼭 심심할 때만 효험이 있는 건 아니다. 컴퓨터에 앉아 글을 쓰다가 글이 잘 안 나갈 때면 만년필을 쥐고 이면지에 낙서를 한다. 마감이 꽤 남아 있을수록 느긋한 탓인지 잡념이 많아진다. 쓸데없는 생각들을 개발새발 그려본다. 수십 년 손에 익은 만년필을 손에 쥐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집중력이 살아나기도 한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만년필이 필요한 이유이다.

'만년필 낙서' 덕분에 행복하다

만년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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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작가 김정운은 <남자의 물건>에서 '한 개에 수십만 원짜리 만년필을 사들이는 취미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 그렇게 진기한 만년필이 여러 개 있으면 그것들을 오래 만져보고 싶어서라도 더 많은 글을 쓰게 될 것 같다. 시인 고은 선생은 시를 쓸 때 잉크를 찍어 쓰는 펜을 고집해서 쓴다고 했다. 십수 년 전 직접 들었다. '잉크를 찍는 여유, 거칠거칠한 펜이 종이 위를 사각사각 누르는 그 감촉, 종이에 잉크가 번지는 그 느낌을 즐긴다.' 지금도 잉크 펜을 쓰실까?

곁에 이면지가 쌓여있다. 잉크가 가득 담긴 만년필을 손에 쥔다. 굵직한 펜이 사각사각 종이 위를 미끄러지며, 하얀 캔버스에 푸른 잉크가 흐른다. 추상화 같은 한자들이 춤을 춘다. 서양화에 서예를 접목시킨 추상화가, 오수환 화백은 '추상화는 내면에 있는 무의식을 끄집어내 시각화하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멀리 갈 필요도 없다. 무의식을 시각화하는 데는 만년필 낙서가 훨씬 낫다.

낙서 이면지는 재활용 쓰레기장에 버려지기 전 마지막 쓸모가 있다. 사실은 진짜 쓸모이다. 일기장을 채우는 기본 자료가 된다. 일기장은 낙서장에서 걸러낸 글들로 하루 한 페이지가 가득 찬다. 낙서를 걸러내 깨끗이 쓰기만 하면 일기가 된다. 한자투성이이다. 일기장은 제2의 낙서장이다.

" ① 解決하고 싶은 問題를 종이에 쓴다./ ② 골똘히 集中한다./ ③ 答을 쓴다. / 天才 物理學者 파인만의 3段階 問題解決方式. / 問題가 무엇인지 알아야 問題를 종이에 적을 수 있지--/ 問題를 종이에 쓸 수 있다면 問題가 무엇인지 아는 거다."

지난해 9월 30일자 일기장이다.

요즘 낙서는 시가 많아졌다. 여러 번 써보아도 외우기 힘들다. 이면지는 시 암송용 깜지가 된다.

"저렇게 많은 별중에서 /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 ----- / 어디서 무엇이 되어 / 다시 만나랴 <저녁에 /金珖燮(1905~1977) > // 무수한 푸른 별들, 樹話의 點畵가 생각난다, / 詩는 暗誦하는 사람이 主人이다."

7월 2일 일기장이다. 이면지 넘치는 세상, 만년필 낙서가 있어 행복하다.


태그:#만년필 , #낙서, #이면지, #행복, #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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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글로 쓰면 길이 보인다'는 가치를 후학들에게 열심히 전하고 있습니다. 인재육성아카데미에서 '글쓰기특강'과 맨토링을 하면서 칼럼집 <글이 길인가>를 발간했습니다. 기자생활 30년(광주일보편집국장역임), 광주비엔날레사무총장4년, 광주대학교 겸임교수 16년을 지내고 서당에 다니며 고문진보, 사서삼경을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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