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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9. 29. 서울. 전란으로 폐허가 된 남대문로와 서울역 일대. ⓒ NARA
1950년 6월 25일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38선 일대에서는 갑자기 포성이 천둥처럼 울렸다. 하지만 그 시간 38선 50km 남쪽에 있는 서울시민들은 대부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 시각 국군 수뇌부도 대부분 만취 상태로 취침 중이었다. 전날 저녁, 서울 용산에 새로 생긴 육군본부 장교클럽 낙성파티에서 늦도록 술판을 벌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방 최고 책임자인 채병덕 육군참모총장도 술이 잔뜩 취한 채 갈월동 총장공관에서 코를 골고 있었다. 6월 25일 오전 5시 10분, 춘천 7연대장은 인민군 기습 남침을 급히 보고하고자 총장 공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총장 각하께서는 지금 취침 중이십니다."

미처 잠이 덜 깬 부관의 짜증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전화가 뚝 끊어졌다. 연대장은 하는 수 없이 육군본부 일직사령에게 인민군 남침 사실을 보고했다. 그러자 일직사령은 다급한 나머지 총장 공관으로 직접 지프차를 몰고 달려갔다.

그제야 잠에서 깬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인민군 남침 급보를 받고 비상소집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참모를 비롯한 주요 간부들도 대부분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지라 소재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다급한 육군본부 일직사령은 신성모 국방부장관 공관으로 전화를 걸었으나 비서실장의 볼멘 대답이 돌아왔다.

"장관 각하께서는 일요일에는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습니다."

1950. 6. 한국전쟁 발발 직전의 서울 중심 시가지로 폭풍 전야처럼 평화롭다. ⓒ NARA
비몽사몽 비틀거렸던 군 수뇌부

그 시각 인민군들은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우고 파죽지세로 수도 서울을 목표로 돌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군 수뇌부는 그런 전황을 전혀 모른 채 대부분 비몽사몽 비틀거리고 있었다.

6월 25일 늦은 아침, 서울중앙방송은 그제야 38선 일대의 포성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그 방송에도 서울시민들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 이전부터 38선 일대에서 소규모 군사충돌이 잦았을 뿐만 아니라, 곧이어 서울중앙방송은 우리 국군이 38선 일대에서 불법 남침한 인민군을 물리쳤다는 '승전보'를 전했기 때문이다.

그날 아침, 이승만 대통령은 창경궁(비원) 연못에서 낚시를 하다가 인민군의 38선 남침을 보고받았다. 곧 이어 이 대통령의 지시로 긴급소집된 비상 국무회의에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전방 전황과는 전혀 다른 보고를 올렸다.

"적의 공격은 전면 남침이 아니라,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있는 공산주의자 이주하와 김삼룡을 살려내기 위한 책략 같으며, 우리 군을 즉시 출동시켜 침략자들을 일거에 격파하겠습니다."

그날 정오부터는 마이크를 단 군용 지프차가 서울 도심지를 질주하면서 다급하게 방송했다.

"3군 장병들은 지금 즉시 원대 복귀하라."

그제야 일부 서울시민들은 조금 동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대부분 서울시민들은 38선 일대에서 전면전이 일어난 줄은 까마득히 몰랐다. 그 무렵 서울시민들은 38선에서 우리 국군이 월등히 우세한 전력으로 인민군을 제압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군 수뇌부는 걸핏하면 '북진통일'을 외치며, 국군 전투력을 과장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3일 내로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

이런 대통령과 군 수뇌부의 허세와 허풍은 막상 전쟁이 일어나자 양치기 소년의 말처럼 곧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

1950. 9. 27. 서울, 수복 전날의 중앙청, 광장 국기 게양대에는 인공기가 걸려 있다. ⓒ NARA
'수도 이전'

전쟁 발발 이튿날인 6월 26일 오후,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이 국회에 출석했다. 그는 전방의 상황과는 달리 '서울 사수'를 공언하며 허장성세를 부렸다.

"이미 우리 국군은 해주에 돌입했고, 의정부 북쪽에서는 적을 제압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군은 대통령 각하의 명령만 떨어지면 사흘 안에 평양을 점령할 만반의 준비가 돼 있습니다."

전방의 전황을 전혀 모르는 국회의원들은 그의 호언장담에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그 시각 국방부에서는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한 선무방송 지프차가 확성기를 달고 서울 시가지를 누볐다.

"국군은 38선 이남으로 내려온 적을 모두 격파했습니다. 평양은 내일 중에 함락될 것입니다. 서울 시민들은 안심하십시오."

하지만 전황은 국방부의 선무방송과는 전혀 달랐다. 6월 25일 낮, 인민군 야크기 두 대가 서울에 날아와 여의도비행장을 공습하고 돌아갔고, 6월 26일 아침에는 인민군 탱크가 포천을 지나 의정부 부근까지 육박해 왔다. 그런데도 신성모 국방장관은 6월 26일 서울중앙방송국 마이크 앞에서 호언장담했다.

"어제 새벽에 침입한 적은, 우리 국군의 반격으로 지금 후퇴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군은 총반격을 개시, 차제에 압록강까지 진격해 우리 민족의 숙원인 국토통일을 완수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 방송이 나가는 순간에 경기도 동두천, 포천, 의정부 일대와 강원도 춘천, 강릉은 이미 인민군 수중에 들어갔다. 인민군은 계속 거침없이 남침해 왔다. 38선 일대를 방어하던 국군은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의 총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마치 홍수에 둑이 무너지듯 그대로 허물어졌다. 그날 밤 인민군은 의정부에서 곧 서울에 진주할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 시각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긴급히 육·해·공군 총참모장들과 기타 군 간부를 소집해 비상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의 결론은 '수도 이전'이었다.

대통령은 없고 녹음방송만 나온 서울

6월 27일 새벽 1시 긴급 비상 국무회의가 소집됐다. 이때 비상 국무회의에서 수원으로 '천도'가 확정됐다. 하지만 이 회의에서 당시 150만 서울 시민의 안정과 민생 그리고 피란 대책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일반 시민들이 정부의 수도 이전을 알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발생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 회의가 끝나자마자 곧 이승만 대통령은 다급하게 경무대를 빠져나와 서울역에 대기 중인 특별열차에 올랐다. 이 대통령의 특별열차가 서울역을 떠난 시각은 새벽 3시 무렵이었다.

6월 27일 오전, 국회에서는 의원들이 정부의 서울 천도 결정도 모른 채 본회의에서 '서울 사수'를 결의했다. 이후 의원대표들이 경무대에 방문했다. 의원들은 그제서야 비로소 이승만 대통령이 이미 서울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는 참담하게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그날 밤에도 서울중앙방송에서는 '서울 사수'를 호소하는 이 대통령의 육성 담화가 전국에 울려퍼졌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했으며, 일선에서도 충용 무쌍한 우리 국군이 한결같이 싸워서 오늘 아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 중입니다. 국민 여러분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나 리승만은..."

이 방송을 들은 일부 서울시민은 이 대통령이 경무대에 머물고 있는 줄 알고 피란길을 되돌아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이 녹음방송은 인민군이 서울에 진주한 뒤에도 앵무새처럼 계속 흘러나왔다. 이 대통령의 담화 방송은 대전방송국에서 녹음돼 전화로 서울중앙방송국에 보내진 것이다.

서울중앙방송국에서는 이를 그대로 계속 녹음 방송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육성 방송에도 북쪽에서 대포 소리가 들려오는 등, 일부 시민들은 전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리고 그날 밤늦게야 허겁지겁 피란 봇짐을 싸든 채 한강 인도교로 달려갔다.

한편,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6월 28일 새벽 1시 무렵, 인민군 탱크가 서울 미아리 방어선을 막 돌파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곧이어 45분 뒤 인민군 탱크들이 서울 시내에 진입했다는 급보를 받자, 그는 후퇴 중인 부하들을 살려야겠다는 생각보다 일단 인민군의 남하를 한강 이북에서 저지해야겠다는 판단이 앞섰다. 그는 즉시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교 폭파 명령을 내렸다.

한강교 곳곳에 미리 폭약을 설치해둔 채 발파 명령을 기다리던 공병들은 명령이 떨어지자 즉각 폭파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한강대교를 비롯한 3개의 철교의 일부 교각이 큰 폭음과 함께 폭삭 주저앉았다.

한강교 폭파 시각은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무렵이었다. 사전 예고 없는 한강교 폭파로 800여 명의 피란민들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거나 수장 또는 큰 부상을 입었다. 한강교 일대가 아수라장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1951. 1. 서울. 전투기에서 내려다본 끊어진 한강 ⓒ NARA
인공 치하에 접어든 서울시민들

한강교 조기 폭파로 국군은 퇴로를 잃게 됐다. 그 때문에 개전 당시 10만여 명이었던 병력과 장비가 절반 이하로 줄어드는 치명적인 손실을 입었다. 타이타닉호 선장은 책임감을 통감하고 자기 배와 함께 순직했다. 하지만 수도 서울을 사수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장엄하게 순국한 대한민국 정부의 고관이나 군 수뇌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 후퇴하기 바빴다.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는 일일 테지만, 그때 이승만 대통령이 옥쇄작전으로 서울을 지키다가 순국했다면 아마 지금 광화문 네 거리에 그의 동상이 우뚝 세워졌을 것이다. 아무튼 이승만 대통령은 100만이 넘는 서울시민들을 고스란히 남겨둔 채 새벽에 몰래 서울을 빠져나갔다. 이 사실은 두고두고 대통령답지 못한 처사였다고 회자될 것이다. 우리가 안중근 의사나 백범 선생을 기리는 것은 자기를 희생했기 때문이다. 

한편, 그 시각 서울 미아리고개 일대 시민들은 인민군이 몰고 온 탱크의 캐터필러 소리에 놀라 잠에서 번쩍 깨어났다. 서울시민들은 그제야 인민군의 전면적인 남침을 알고 피란길을 서둘렀지만, 이미 한강다리가 폭파된 뒤라 속수무책이었다. 그날 이후 대부분 서울시민들은 독 안의 쥐처럼 옴짝달싹 못한 채 석 달간 인공치하에 살아야 했다.

1950년 6월 28일 오전 11시 30분, 국군의 수도 서울 최후 저지선인 홍릉과 미아리 방어선을 돌파한 인민군 선발대는 그날 오후 3시에 중앙청을 점령했다. 그러자 서울시민들은 인민군 총구 앞에 속수무책으로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 진주한 인민군은 가장 먼저 서대문 형무소와 각 경찰서에 수감된 4000여 명의 정치범을 석방하고, 즉각 인민위원회를 설치했다.

세상은 삽시간에 180도 달라졌다. 어느새 붉은 완장을 두른 젊은이들이 거리를 뛰어다니며 "인민공화국 만세!" 또는 "조선인민군 만세!"를 연호하며 막 서울에 진주한 인민군을 향해 환호했다. 그날 인민군의 서울 진주가 끝나자 인민군총사령관 김일성은 즉각 서울 점령 축하 연설을 방송한 뒤, 서울시인민위원장에 북한 내각 사법상 이승엽을 임명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은 불과 사흘 만에 전혀 다른 세상으로 바뀌었다. 미처 피란길에 오르지 못한 100만 서울시민은 새로운 세상, 곧 인공치하에 적응하며 새 질서에 순응해야 했다.

이번 기사에서는 한국전쟁 발발 직전과 9․28 수복 초기 서울의 모습을 담았다. 유엔군 측 종군 기자들의 촬영으로 인공치하 서울의 사진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의 생생한 사진은 볼 수가 없다.

(* 이 기사에 실린 사진들은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검색하여 수집한 것으로 포토샵을 하지 않고 스캔한 원본 그대로 게재합니다.)

1950. 9. 29. 서울. 수복된 거리 표정. ⓒ NARA
1950. 9. 29. 서울. 9?28 수복 직후 중앙청 광장에는 유엔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 NARA
1950. 10. 1. 서울. 9?28 수복 직후 서울시청 일대. ⓒ NARA
1950. 10. 1. 서울. 9?28 수복 직후 소공동 조선호텔 일대. ⓒ NARA
1950. 10. 1. 서울. 전란으로 파괴된 서울역 플랫폼 ⓒ NARA
1950. 10. 18. 서울. 전란으로 폐허가 된 중앙청 앞 내수동 도렴동 일대 ⓒ NARA
1950. 10. 6. 서울. 전란으로 부서진 종로 네거리 보신각 종루 ⓒ NARA
1950. 10. 6. 서울, 전란에 그을린 화신 백화점. ⓒ NARA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앙청 경복궁 일대.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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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0.31. 원산. 헐벗고 굶주렸지만 웃음은 떠나지 않는 아이들. ⓒ NARA
1950.9. 한 지아비가 시각장애인 아내를 지게에 진 채 피란길을 떠나고 있다. ⓒ NARA
1950.10. 서울 은평. 한 소녀가 동생을 돌보며 불타버린 야외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 NARA
1953.2.19. 전란 중이지만 설빔을 차려 입은 천진난만한 소녀들이 민속놀이의 하나인 널뛰기를 하고 있다. ⓒ NARA
1950.10. 옹진전투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한 국군 특무상사가 목발을 짚은 채 침통한 표정으로 철조망 앞에 서 있다. ⓒ NARA
기자의 저서. 왼쪽부터 <카사, 그리고 나>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약속> <항일유적답사기>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 박도
태그:#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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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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