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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법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하나의 '현상'이라고 불러도 지나침이 없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하급심 법원의 계속된 무죄 판결 이야기다. 하급심 판사들은 그 누구의 것을 뺏지도, 그 누구를 때리지도 않은 20대 젊은이들을 지금처럼 감옥에 보낼 수는 없다며 무죄를 선고하고 있다.

대법원의 유죄 판결에도 계속되는 하급심의 무죄 판결

서울중앙지방법원, 서울고등법원, 서울가정법원이 모여 있는 서울 서초동 서울법원종합청사 건물.
 서울중앙지방법원, 서울고등법원, 서울가정법원이 모여 있는 서울 서초동 서울법원종합청사 건물.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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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병역거부 무죄 판결에 대해 흔히 하는 오해가 있다. 하나는 예전부터 튀는 소수의 판사들이 무죄 판결을 해왔던 것 아니냐는 오해다. 2017년 6월 기준으로 병역거부 무죄 판결은 총 34건인데, 이중 30건이 2015년 5월 이후에 이뤄졌다. 무죄 판결 중 88%가 최근 2년 내에 선고된 것이다. 더욱이 올해 들어 6개월 동안에만 17건의 무죄 판결이 집중됐다. 이처럼 병역거부 무죄 판결은 최근에 등장한 현상이고, 점점 확산되고 있는 현상이다.

다른 오해는, 하급심에서 아무리 무죄 판결을 내려봤자 대법원이 유죄 판결을 하면 쑥 들어갈 것 아니냐는 것이다. 통상의 경우 하급심에서 엇갈린 판단이 나오더라도 대법원의 판단이 이뤄지면 '교통정리'가 돼왔기 때문이다.

병역거부는 다르다. 대법원은 올해만 13건의 병역거부 '유죄' 판결을 내렸다. 지난 6월 15일에는 유죄 판결을 하며 보도자료까지 배포했다. 그러나 대법원 유죄 판결이 언론에 보도된 직후인 6월 28일 서울 남부지방법원에서, 6월 29일 청주지방법원에서 또다시 무죄 판결이 이어졌다.

계속되는 하급심 병역거부 무죄 판결이 대법원 판결로 교통정리되는 국면은 이미 넘어섰다. 병역거부 문제가 공론화된 2000년부터 15년이나 국회와 정부가 이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기대하며 참아왔던 소장 판사들이, 더 이상 병역거부자에 대한 인권 침해에 동참하지 않겠다며 무죄 판결을 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충분히 가능한 대안, '대체복무'

판사는 판결로 이야기한다고 한다. 하급심 판사들은 병역거부 무죄 판결로 이야기하고 있다. 병역거부 문제 해결을 위한 대체복무제 도입이 충분히 가능한데도, 정부와 국회가 이를 방기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법부라도 변화를 추동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다수결이 외면한 소수자 인권을 사법부라도 옹호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무죄 판결문에는 대체복무제에 대한 언급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피고인을 비롯한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다른 병역기피자와 달리 비전투 성격이 보장된 대체복무는 그 기간이 길고 힘든 정도가 더하더라도 이를 이행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사가 있다."

"대체복무제도를 실시할 경우 병역을 기피하기 위하여 대체복무제도를 악용하는 사례가 빈발할 것을 우려하는 듯하나, 대만이 2000년경 대체복무제도를 도입하면서 이러한 점을 우려하여 군복무기간이 1년 10개월임에도 대체복무기간을 2년 9개월로 정하였다가 그 후 2007년 대체복무법을 도입하여 복무기간을 군복무기간과 동일하게 조정한 사례가 인정될 뿐이다."

"메르스사태나 대형재난사고에서 보는 것처럼 재해복구, 재난방지, 의료, 소방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대체복무가 결코 군복무보다 편하다거나 더 안전하다고 볼 수 없는 바, 현역 복무보다 힘들거나 등가성 있는 대체복무제도를 설계할 수 있고, 대체복무제도가 병역기피자를 양산한다는 것은 실증된 사례도 아니다."

이처럼 무죄 판결문은 대체복무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과 싸우고 있다. 국방부가 정책홍보를 통해, 국회가 공청회 등을 통해 했어야 할 일을 하급심 판결문이 하고 있다. 대체복무는 면제나 특혜가 아니다. 현재 한국에서 시행중인 전환복무 중 하나인 의무소방관은 미국에서 병역거부자들이 수행하던 대체복무제였다. 의무소방관 제도를 도입할 때 '그럼 군대는 누가 가냐'라는 질문은 등장하지 않았던 이유는, 의무소방관이 현역복무와 형평성이 인정되는 복무였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소방관 1만9000명을 임기 내 확충하겠다고 밝혔을 만큼, 소방인력 확충은 중요한 과제다. 그렇다면 현재의 의무소방관 제도에서 4주 군사훈련을 제외하고, 현역 육군 기준 1.5배 정도의 복무기간으로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를 설계한다면 어떨까? 매년 400여 명의 젊은이들이 감옥이 아닌, 우리 사회의 꼭 필요한 곳에서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 내에 대체복무제 입법논의 시작돼야

2015년 7월, 헌재 앞에서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죄수복을 입은 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이들은 '병역 거부자를 처벌하는 현행 병역법은 위헌'이라며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주장했다.
 2015년 7월, 헌재 앞에서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죄수복을 입은 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이들은 '병역 거부자를 처벌하는 현행 병역법은 위헌'이라며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주장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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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 판결이 이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재판부는 유죄를 선고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400여 명의 젊은이들이 수감돼 있다. 이처럼 병역거부는 매일 새로운 인권침해가 발생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대체복무제 도입이 신속하게 이뤄져야만 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6월 27일 국방부에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도 도입을 권고했는데, 주무부처로서 책임을 방기해온 국방부는 이를 즉각 수용해야 한다. 그리고 올해 하반기 정기국회에서 대체복무제 관련 병역법 개정안이 심도 있게 논의되고 의결돼야 한다.

2018년, 아무리 늦어도 2019년 3월부터는 종교적 또는 양심상의 이유로 군사훈련을 도저히 수행할 수 없다는 이들이 대체복무제를 수행할 수 있기를 바란다. 2000년 대체복무제를 도입한 대만의 천수이볜 총통이 그랬던 것처럼, '더뎠지만 그래도 이뤄냈다'며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의 대체복무제 도입을 국제사회에 내보이는 모습을 상상한다. 전국 각지의 감옥문이 열리고, 20대 청년들이 그들의 가족과 친구에게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임재성씨는 변호사(법무법인 해마루), 평화연구자입니다.



태그:#양심적 병역거부, #대체복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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