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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역대 한국 대통령들이 무게 있는 대북메시지를 발표해온 곳이다. 같은 분단국이었고, 통일에 성공한 뒤 이를 기반으로 번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상징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은 대북메시지 발신 장소로 독일을 활용한 대표적 사례다. 김대중은 성공했고, 박근혜는 거의 '쪽박'이 났다.

김대중은  2000년 3월 9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한 '독일 통일의 교훈과 한반도 문제'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북한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는 준비가 돼 있다"며 대규모 경제지원을 제안했다.

이어 "우리의 당면 목표는 통일보다는 냉전종식과 평화정착"이라며 '흡수통일'의사가 없음을 재확인한 뒤, "북한은 인도적 차원의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적극 응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이러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남북한 당국간의 대화가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특사 교환 제의'를 수락하라고 촉구했다.

이후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와 항구적인 평화 및 남북 간 화해·협력을 위한 '베를린 선언'으로 불리는 이 연설은, 이전 대통령들의 숱한 대북제안과 두 가지 점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2년 전 1998년 대통령 취임사에서부터 남북정상회담과 특사 교환을 제의했던 그는 북한 잠수정 속초 앞 영해 침투 사건(98년 6월 22일), 1차 연평해전(99년 6월 15일) 등등 숱한 갈등 속에서도 '햇볕정책'을 유지하면서, 금강산관광 등 북한과의 사회경제 교류를 확대해갔다.

집권 3년차인 2000년을 정상회담 적기로 판단한 그는,  그해 2월 9일 일본 <TBS> TV 인터뷰에서 "지도자로서 판단력과 식견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에 나온 '베를린 선언'은 이런 지난한 밑작업의 산물이었다.

연설 10시간 전, 판문점 통해 '베를린 선언'요지 북에 전달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2000년 6월 13일 오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밝은 표정으로 악수를 하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2000년 6월 13일 오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밝은 표정으로 악수를 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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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베를린 선언'을 발표하기 전에 그 요지를 판문점을 통해 북한에 보냈다. 분단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북은 어찌 반응할 것인가. 나는 다시 기다렸다." (김대중 자서전 242, 243쪽)

그렇다. 그는 자신의 '진정성'을 강조하기 위해 당시 박재규 통일부 장관 명의의 편지 형식으로 판문점을 통해 '베를린 선언'의 핵심 내용을 김정일 위원장의 최측근인 김용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에게 전달한 것이었다. 연설 10시간 전이었다. 그리고 석달 뒤, 분단 이후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박근혜는 집권 2년차인 2014년에 대북 드라이브를 시작했다. 그해 1월 6일 신년기자회견에서 '통일대박론'을 꺼냈다. '통일은 대박'이라는 단순한 '구호'는, 그의 정치적 반대자들도 통일을 부담으로 인식하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편익' 관점에서 통일의 필요성을 환기시켰다고 인정했다.

당시 청와대는 이런 흐름을 이어 박근혜가 독일 국빈 방문 중에 '독트린' 수준의 대북제안을 할 것이라고 애드벌룬을 띄웠다. 2014년 3월 28일(현지시각)에 독일의 드레스덴 공대에서 발표한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구상'이었다.

대북 제안들은 그 자체로는 괜찮았다. ▲ 남북한 주민들의 인도적 문제 해결(Agenda for Humanity) ▲ 남북한 공동번영을 위한 민생 인프라 공동 구축((Agenda for Co-prosperity) ▲ 남북 주민간 동질성 회복(Agenda for Integration) 등을 기조로, 유엔과 함께 임신부터 2세까지 북한의 산모와 유아에게 영양과 보건을 지원하는 '모자패키지(1,000days) 사업'과 복합농촌단지 조성 사업 등 성사되면 북한에 도움이 될 만한 아이템들을 다수 담았다.

박근혜, '독일식 흡수통일'의 상징 드레스덴에서 대북제안 연설

지난 2014년 3월 28일(현지시각) 박근혜 대통령이 독일 작센주 드레스덴공대를 방문, 교수. 학생등을  대상으로 통일 프로세스를 밝히고 있다.
▲ 통일 구상 밝히는 박 대통령 지난 2014년 3월 28일(현지시각) 박근혜 대통령이 독일 작센주 드레스덴공대를 방문, 교수. 학생등을 대상으로 통일 프로세스를 밝히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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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장소부터 범상치 않았다. 옛 동독 반체제 운동의 중요 거점이었고 통일 이후 급성장한 '독일식 흡수통일'의 상징도시인 드레스덴은, '북한을 굴복시키겠다'는 의지를 공공연하게 내보인 박근혜 정부에게는 더없이 적절했다. 반대로 북한에게는 그만큼 거부감을 갖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연설문 중간 중간에는 "경제난 속에 부모를 잃은 (북한) 아이들은 거리에 방치돼 있었고 추위 속에서 배고픔을 견뎌내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자유와 행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탈북자들이 있다"고 한 대목이 들어갔다. 북한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건드릴 만한 소재들이었다.

드레스덴 선언 이틀만에 북한은 4차 핵실험을 예고했고, 3일만에 북한이 발사한 해안포와 방사포 500여 발 중 100여 발이 백령도 인근 NLL 이남 최대 3㎞ 해상까지 떨어지자, 해군도 대응포격을 가하는, '시차를 둔 포격전'이 벌어졌다.

사전 작업도 없었다. 그해 2월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분위기가 좋아졌지만 바로 그 다음 달에 한미 해병대가연합 상륙훈련인 '쌍용훈련'을 사상 최대 규모로 진행했다. 드레스덴에 앞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핵안보정상회의에 참석한 박근혜는 북한이 전략노선으로 공표한 핵무력·경제건설 병진노선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선(先)핵포기 입장을 밝히라고 촉구했다.

드레스덴 연설을 마친 뒤 박근혜는 "그날이 오면 모든 것이 드레스덴에서 시작된 것으로 기억될 것 같다"고 감격스러워했다. 여기서 '그날'은 통일을 이르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 스스로도 대단히 큰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드레스덴 선언은 일주일도 못 가서 막을 내리고 말았다.

'한국 주도권' 확보한 문재인, 베를린에서 구체적인 대북제안 할 듯

문재인 대통령도, 5~8일 독일 방문 중에 베를린 쾨르버 재단에서 구체적인 대북정책을 내놓을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달 30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한반도 문제에 대한 한국 주도권'과 '대북 적대시 정책을 추진하지 않는다'는 지지를 끌어낸 것을 토대로, 다음 단계로 들어가려는 구상이다.

그가 지난달 말 전북 무주 세계 태권도선수권 대회에 참석한 장웅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을 비롯한 북측 대표단을 적극 접촉하고, 7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평창동계올림픽에 북한의 참가를 끌어내려고 시도하는 것도 단기적으로는 '베를린 선언' 성공을 위한 터닦기 작업 하나일 수 있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에 대북업무를 담당했던 통일부나 국가정보원, 국방부 관계자들은 북한이 언제 망할지에 대해 내기를 하곤 했다고 한다.

17년여가 지난 지금, 북한이 단기간에 저절로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정부 입장에서 보면, 상황이 좋아진 북한이 우리의 대북제안에 호응할 가능성이 약해졌다는 점에서 2000년 베를린 선언 때보다 환경이 악화된 셈이다.

결국은, 김대중이 2000년에 그랬던 것처럼 사전에 연설문 내용을 전달하는 것 같은 '세심한 배려'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태그:#베를린 선언, #드레스덴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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