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길종의 화분 포스터 및 신문 광고

하길종의 화분 포스터 및 신문 광고 ⓒ 영상자료원


<화분>은 38세에 아까운 생을 마감한 불운의 감독 하길종의 데뷔작이다. '불운의 감독'이라고 칭한 이유는 그의 짧은 인생 때문만은 아니다(필자의 다른 글, "'불멸의 살리에르' 영화감독 하길종, 그는 왜 표절했나" 참고). 작품의 대부분이 외국 거장들의 영화들(데이빗 린의 <붉은 우산(Red Umbrella)>, 파울로 파졸리니의 <테오레마(Teorema)>)을 표절했다는 비판에 시달렸고, 박정희 정권 하의 강압적 영화 제작 현실과 타협하는 영화를 만드는 것에 대한 자기 염증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이었다.(하길종의 수필집, '백마 타고 온 또또' 참조).  

문제적 표절작 <화분>, 하길종 감독의 대표작 <화분>

<화분>은 자신을 잠식하는 폐수(廢水) 같은 자아비판으로 시달리기 전, 한국 영화에 대한 열정과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을 때 만들어진 작품이다. '괴작'이라는 평가가 더 우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가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감독 자신도 영화를 개봉하고 몇 년이 지난 후 "어디까지나 저로서는 <화분>을 대표작으로 생각"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정한석의 KMDB <화분> 평 참조). UCLA에서 영화를 전공한 그가 독재정권의 암울한 국내 현실을 인지하고도 굳이 귀국해서 만든 첫 영화인 <화분>은 예술혼의 발현과 한국 영화인으로서의 사명에 기반을 둔 산물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영화는 '푸른 집'에서 일어나는 기묘하고 추악한 사건들을 그린다. 근교 외딴 곳에 있는 푸른 집에는 성공적인 사업가 현마(남궁원 분)의 첩인 세란(최지희 분), 그녀의 동생 미란(윤소라 분), 그리고 이들의 하녀인 옥녀(여운계 분)가 살고 있다. 영화는 어느 날 현마가 자신의 비서임과 동시에 흠모하고 있는 단주(하명중 분)를 푸른 집에 초대하면서 전개된다.

단주를 욕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현마를 인지한 세란은 노골적으로 단주를 배타적인 태도로 대한다. 같은 날, 미란은 첫 월경을 하게 되고 이를 알게 된 세란은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미란을 놀려댄다. 수치를 느낀 미란은 집을 나가고, 현마는 단주를 보내 미란을 찾아오게 한다. 서울의 곳곳을 떠돌며 하루 밤을 보낸 이들은 서로를 사랑하게 되지만, 이들의 관계를 알게 된 현마는 질투심에 단주를 찾아내어 푸른 집 창고에 감금시킨다.

 영화 <화분>의 한 장면

영화 <화분>의 한 장면 ⓒ KMDb


영화의 결말은 모두의 파멸이다. 현마는 부도를 내고 일본으로 도주한다. 세란은 집으로 밀려드는 빚쟁이들 중 몇 명에게 강간을 당하고 이 아수라장에서도 옥녀는 끊임없이 단주를 욕망한다. 미란은 아끼던 피아노를 빚쟁이들에게 빼앗기고 망연자실 한다. 옥녀의 도움으로 잠시 탈출했던 단주는 폭력이 난무하는 광경을 목도하고는 조용히 떠난다. 당시 사회적 공기를 고려할 때 영화의 줄거리는 꽤 파격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의 관계도와 상관없이 캐릭터들(현마, 세란, 옥녀)의 상상으로 등장하는 뜬금없는 섹스신들 역시 그러하다.

영화는 이효석의 1939년 작  소설 <화분>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적지 않은 변주가 있으므로 단순한 소설의 영화화로는 보기 힘들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당시 검열로 상당 부분이 잘려 나갔지만 문제시 될 것 같던 남성 동성애의 재현은 그대로 남고, 남녀의 베드신 정도가 편집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의 가장 큰 쟁점은 이 영화와 이탈리안 좌파 감독 피에르 파울로 파졸리니(Pierre Paulo Pasolini)의 <테오레마(Teorema)>(1968)와의 지나친 유사성이다. 외딴 집에 사는 가족 (아버지, 아들, 딸, 하녀)과 어느 날 찾아온 이방인과의 성적 일탈을 다룬다는 점은 <화분>의 캐릭터 구성과 내러티브가 매우 비슷해서 표절로 보지 않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화분>의 표절 이슈는 크게 문제화 되어 그 해 대종상 시상식에서 제외되었고, 그 다음해에 하길종은 전작에서 얻어진 불명예를 극복하고자 <수절>을 만들었지만,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실패했다. 결과적으로 <화분>은 표절과 검열의 난도질로 해어진, 영화사의 얼룩 같은 작품이 되어 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온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파졸리니 테오레마 포스터  하길종 화분 포스터와 유사함을 증명하려는 포스터

▲ 파졸리니 <테오레마> 포스터 ⓒ 파울로 파졸리니


<화분>에 대한 온전한 평가는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영화를 평가했던 대부분의 평론들과 논문들이 작품에 대한 '죄목(罪目)'을 고하는 것의 이상의 시도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1)왜 하길종은 수많은 해외 예술 영화를 예찬해 왔음에도 그의 첫 작품으로 이효석의 (다른 작품들보다 현저히 덜 알려진) <화분>을 원작으로 택했는지, 2)하길종의 <화분>은 나머지 두 작품들과 어떤 차별성을 띠는지 3)표절 논란에도 감독 자신은 왜 이 작품을 진정한 자신의 영화라고 선언했는지가 결과론적인 논쟁에 함구 당한 (영화가 평가 받는데 있어 거쳤어야 할) 필연적 질문들이다.

일단, 그가 문학 작품을 택한 것은 당시 한국영화계의 기류와 영화 정책을 염두한 것이 아닌가 싶다. 박정희 정권에서는 '문예 영화'라는 미명 하에 문학 작품을 영화화 하는 것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이는 곧 관습화 되었다. 하길종은 사회를 문제적 시선으로 그리고 싶어 했던 감독이고, 그런 그가 문예 영화의 노선을 택한 것은 그나마 안전한 커리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원작과 그의 작품이 다른 것도 애초에 원작 소설을 도구적으로만 사용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하길종 30주기 추모전 포스터

하길종 30주기 추모전 포스터 ⓒ 한국영상자료원


그럼에도 이효석의 <화분>은 하길종에게 필요했을 요소를 응축하고 있는 작품이다. 등장인물 5명은 하나의 관계에 종속되지 않고 서로를 탐하고 욕망하는 일종의 '플라워 칠드런(flower children: 베트남전 중 전쟁이 아닌 섹스를 사랑하자는 슬로건을 따르던 히피들을 지칭하는 말)' 이다. 그들의 욕망은 단순한 '원함'이 아닌, 종속되지 않고자 발현되는, 즉, 통제에 대한 저항 기제로 작용하는 에너지인 것이다.

하길종의 <화분>은 저항 기제로서의 욕망을 차용하되, 등장인물 사이의 권력구도를 부각한다. 현마는 통제와 구속을 가하는 인물이고, 단주는 그의 욕망의 대상이자 희생자로서 철저히 수동적 인물로만 존재한다. 통제를 가하진 않지만, 세란이나 옥녀 같은 다른 인물 들 역시 단주를 욕망하고 이들의 욕망 앞에 단주는 의지가 없거나 무능하다. <테오레마>에서의 이방인이 집안의 인물들을 먼저 유혹하는 것, 그리고 유혹했던 인물들을 기만하고 떠나는 것과 반대로 하길종의 단주는 폭력이 난무한 아수라장을 목도하고 도망치듯 떠난다. 

그런 의미에서 하길종의 단주는 언급된 세 개의 작품에서 가장 나약하지만 동시에 유일하게 탐욕이 부재한 무결(無缺)의 인물이기도 하다. 단주의 비(非) 존재적 존재는 하길종이 바라본 시대상을 인내하고 있는 군상들의 표상이자, 권력에 대항하지 못한 감독 본인의 페르소나 같은 인물로 기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파졸리니 작품과의 표절 쟁점과는 별개로 <화분>을 하길종의 영화로 보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하길종 화분 표절 논란 한국영화 고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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