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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세상 사회적 협동조합>(대구)에서 지난 5월 중순에 『중용(中庸)』 교실을 열었다. 관심 있는 사람 12명이 모여 함께 <중용>을 독해하고 토론하면서 6주 째 공부가 이어지고 있다. 한 사람이 책 열권 읽는 것보다 열사람이 한 권 읽는 게 더 좋다는 말이 실감난다. 간혹 내 나름 잘못 읽은 걸 바로 잡을 수 있어 좋고, 토론과정에서 생각의 지평을 넓힐 수 있어 좋다. 함께 읽을 책은 도올 김용옥의 <중용, 인간의 맛>(2011)으로 골랐다. 이 책으로 도올은 EBS에서 <중용> 특강을 하였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대로 마무리하질 못했다. 강의 중에 이명박 정권의 4대강사업을 강하게 비판한 탓이 아닌가 싶다.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편술한 고전으로 두루 알려져 있다. 사서(四書; 논어, 맹자, 중용, 대학) 가운데 가장 깨치기가 어렵다고 해서 '차돌' <중용>이라고도 불린다. 다석(多夕) 유영모 선생은 "유학은 <중용> 덕분에 그나마 형이상학적인 채면을 살렸다"고 평한다. 그만큼 유학 경전 가운데 <중용>은 추상적 철학담론의 깊이가 있다는 게다. 조선왕조 건국의 문교정책을 입안한 양촌 권근 선생은 <중용>을 도설(圖說)로 정리한 <입학도설(入學圖說)>에서 그 종지를 '천인심성합일(天人心性合一)'로 압축했다. 즉, <중용>은 천인합일(天人合一)과 심통성정(心統性情)을 하나로 아울러 논술한 서물이라는 게다. 성리학적 입장에서 <중용>을 해석한 양촌의 논지가 돋보인다.

<중용>은 1장 첫 구절이 그 압권이다. "하늘이 명하는 것이 이른바 성(즉, 本來性)이요, 그 성에 따르는 것(率性)이 이른바 도(道)요, 그 도를 닦는 것(修道)이 이른바 교육(敎)이라"는 게다. 하여 그 첫머리에 하늘(天)-성(性)-도(道)-교(敎)로 이어지는 장엄한 인문의 길을 제기하고 있다. 인간을 길러내는 교육은 하늘의 지엄한 명령에 의한 것이므로 우리의 현실적 편의에 따라 함부로 이리저리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흔히 교육을 백년지계(百年之計)라지만 <중용>에서는 천명지계(天命之計)로서의 지엄함과 그 일관성을 강조한다.

이어 첫 장에서는 '중용'이라는 말 대신에 '중화'(中和)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여기 '中'은 미발의 기준으로서 천하의 대본(大本)이요 , '和'는 성(性)이 정(情)으로 발현되어 그 절도에 맞게끔 달성해야할 길(達道)이다. 공자는 군자는 '중용'을 지키고자 노력하지만, 소인들은 그 언행에 거리낌이 없기에 '중용'을 행하기 어렵다고 했다.

요즘 일부 (야당)정치인들의 거친 말투를 보면 '무기탄(無忌憚)의 극치다. 공자는 '중용'의 덕을 지속적으로 실천하기가 지극히 어렵다고 한탄한다. 그가 말하는 '중용' 실천의 요체는 때에 맞춰 타임잉을 놓치지 않는 '시중'(時中), 그 실천의 지속성인 '능구'(能久), 그리고 삶의 맛을 음미할 줄 아는 '지미'(知味)로 요약된다. 이 대목에서 도올이 '중용'을 왜 '인간의 맛'으로 표기했는가를 상기하게 된다.

이어 공자는 말하길 "세상 사람들이 나를 순임금처럼 지혜롭다고 하지만, 나는 중용을 지키려 해도 불과 1개월을 넘기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그 실천의 어려움을 고백한다. 그 어려움을 빗대어 "시퍼런 칼날조차 밟을 수도 있지만, 중용은 능하기가 참으로 어렵다."고 했다. 왜 그런가? 극단 상황은 한 번 겪고 넘기면 되지만, 사소한 일상 속에서 '중용'을 일관되게 유지하기란 지난하다는 게다.

<중용>(13장)에서는 '도'(道)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아니하다(道不遠人)면서 '서'(恕)를 말한다. 공자는 '인'(仁)의 핵심으로 '서'(恕)를 들고, 황금률의 부정태로 "자기가 원치 아니 하는 것은 남에게 베풀지 말라"고 일렀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삶을 비춘 게다. 그러고는 말미에 "말한 대로 살고(言顧行), 살아온 대로 말하기(行顧言)"를 제기했다.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중용>은 20장에서 장문의 내용(약 770자)에 걸쳐 해쳐 모이기를 한다. 1장에서 천명(天命)-솔성(率性)-수도(修道)를 커다랗게 내 걸고는 20장에서 5달도(達道)와 3달덕(達德; 즉, 知 ․仁․勇)을 말하고, 다시 천하국가의 치술로 9경(經)을 제기함으로써 구슬을 흩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고는 말미에 <중용>의 하이라이트인 성론(誠論)을 제기한다. 이제 그 '성'(誠)론을 본격적으로 논의해 보자.

성 그 자체(誠者)는 하늘의 도(天之道)요, 성하고자 노력하는 것(誠之者)은 사람의 도(人之道)다. 성(誠)해 지려고 노력한다는 건 선(善)을 택하여 굳게 잡고 실천하는 자세이다. 그것은 널리 배우고(博學), 자세히 묻고(審問), 깊이 생각하고(愼思), 분명히 표현하고(明辯), 그리고는 행하기를 힘쓰는 것(篤行)이다. ...(중략) 다른 사람이 한 번에 능하거든 나는 백번을 하며, 남이 열 번에 능하거든 나는 천 번을 하리라. 과연 이렇게 노력하는 것에 능하기만 하면,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반드시 현명해지고, 유약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강하게 될 것이니라.

말한 대로 이루고자(誠) 노력하는 삶의 자세가 참으로 준엄하게 제기되고 있다. 성(誠)하고자 노력하는 자세는 박학(博學)-심문(審問)-신사(愼思)-명변(明辯)-독행(篤行)으로 이어지는 데, 여기 5단계의 과정에서 학문(學問)과 사변(思辨)과 행(行)이 도출된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12살에 당나라 유학을 떠나면서 '인백기천'(人百己千; 남이 백 번을 하면 나는 천 번을 하겠노라)을 다짐했다는 고사가 있는 데, 바로 중용의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뉴턴은 천재는 99%가 노력에 의한 것이라 했는데, 그에게는 그 노력을  뒷받침해 주는 1%의 영감이 있었다.

도올 김용옥은 <중용, 인간의 맛>(2011)에서 '성지자'(誠之者)는 성(誠)해지려고 노력하는 과정(process)이라면서, "인생이란 결국 성(誠)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칙칙폭폭 끊임없이 달려가는 성지(誠之)호 열차의 모습"이랬다. 그는 열차는 달리는 한에서만 열차이기 때문에 인생의 목적이란 그 과정에 내재하는 것이랬다. 따라서 '성자'(誠者)는 '성지자'(誠之者)에 내재한다는 게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중용> 해독에서 가장 난감한 구절이 21장이다. 거두절미하고 딱 두 문장으로 압축해서 적고 있다. "성(誠)에서 명(明)으로 나아가는 것을 성(性)이라 일컫고, 명(明)에서 성(誠)으로 나아가는 것을 교(敎)라 일컫는다. 성(誠)하면 곧 명(明)해지고, 명(明)하면 곧 성(誠)해진다." 여기 '성'(誠)은 이미 성실함이 구현된 완전태로서의 성자(誠者)라면, '명'(明)은 끊임없이 성(誠)해 지고자 노력하는 가능태로서의 성지자(誠之者)다. 그래서 성(誠)과 명(明)은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있다.

김충열 교수는 <중용․대학 강의>(2007)에서 <중용>1장에서 논한 성(性)-도(道)-교(敎)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 21장에는 성(性)-교(敎)로 바로 연결되어, 그 연결이 부자연스럽다면서 교(敎) 대신에 도(道)가 와야 한다고 했다. 그 지적에 일리는 있으나 <중용>에서 수도(修道)는 곧 교육이다. 즉, 솔성(率性)의 과정이 곧 도(道)이고, 그 길을 닦는 과정이 교육이다.

마침내 <중용>22장에서 '지성'(至誠)의 총론이 제기되고, 23장에서 26장까지 그 각론이 펼쳐진다. 필자가 보기에는 <중용>1장과 더불어 22장은 가장 주목할 만하다.  그(22장) 전문을 옮기면 이렇다.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至誠)이라야 자기의 타고난 성(性)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다. 자기의 타고난 성을 온전히 발현(盡己性)할 수 있어야 다른 사람의 성을 온전히 발현케(盡人性)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성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어야 만물의 성을 발현케(盡物性) 할 수 있다. 만물의 성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을 때에 천지의 화육(化育)을 도울 수 있고, 그래야 천지와 더불어 하나가 될 수 있다."

오직 지성(至誠)이라야 하늘이 명한 자기의 성(性)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고, 진기성(盡己性)이어야 다른 사람의 성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고(盡人性), 그래야 진물성(盡物性)에 이를 수 있다는 게다. 그리되면 내 자신이 천지 화육을 돕고 천지와 더불어 하나가 된다는 게다. 여기 '지성'(至誠)은 '솔성'(率性)의 완전태인 진성(盡性)이다. 그리고 천지인(天地人) 삼위일체의 가능태가 '성'(誠)이다.

이어(23장에는) '지성능화'(至誠能化)라 했다. 이때 '화'(化)는 질성적(인격적) 변화를 수반한 감화(感化)이다. 해서 지성이면 감천(感天)이랬다. 다시 (24장에서) '지성여신'(至誠如神)이라 하여, 지성은 하느님과 같다는 게다. 지성(至誠)을 영명한 신성(神性)에까지 끌어 올려, 하느님의 속성이 내 속에서 구현될 수 있다는 게다. 인본주의의 극치다.

마침내(26장) '지성무식'(至誠無息)이라 하여, 지성은 그 쉼이 없다는 게다. 도올은 여기 '지성무식'은 천지에 바치는 최정상의 아름다룬 문학적 표현이라 했다. 공자가 70이 넘어 노령에 이제 좀 쉬시라고 제자들이 말하니, 공자왈 "하늘이 쉬더냐?"고 되물었단다. 38억년을 버티어 온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오직 '지성무식'(至誠無息)의 수고로움 덕분일터.

22장에서 26장까지 '지성'(至誠)의 능화(能化)-여신(如神)-무식(無息)을 논하면서 <중용>의 성(誠)론은 그 정점에 이른다. 김충열 교수는 <중용강의>(2007)에서 32장을 <중용>의 총결산이라면서 다음처럼 그 논지를 요약한다.

<중용>은 처음에는 하나로 집약된 근본적 이(理)를 제기했다가, 중간에 가서는 하나의 이치가 만사로 나누어지는 과정을 거쳐 마지막에 가서는 하늘의 도인 성(誠)과 사람의 도인 성지(誠之)를 내세운다. 지성(至誠)은 이 인도인 성지(誠之)와 천도인 성(誠)이 일치하는 지점이다. 이런 지성(至誠)을 갖춘 인간이 대성해서 지극한 성인(至聖)이 되며, 그는 지성(至誠)의 추동으로 진기성(盡己性), 진인성(盡人性), 진물성(盡物性)을 이뤄 천지경영의 주역으로 등장한다(김충열, 2007, 272쪽).

그는 유교를 종교라고 한다면 그 교리의 핵심은 '성'(誠)이라면서 <중용>은 곧 성(誠)의 철학이랬다. 마침내 <중용> 마지막 장(33장)에서는 '의금상경'(衣錦尙絅), 즉,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도 그 위에 망사 덧옷을 걸치는 것"을 말한다. 군자의 도는 그 무늬가 너무 화려하게 드러나는 걸 경계한다. 동양적인 겸양의 미덕이다. 하여 군자의 도는 은은하지만 날이 갈수록 빛을 더한다는 게다.

마지막 장에서 군자의 덕을 무려 일곱 번에 걸쳐 찬양하고는 그 말미에 하늘이 하는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고  '지덕'(至德)을 칭송하는 것으로 그 끝을 맺는다. 이상이 <지식과 세상> 교실에서 함께한 <중용> 공부의 대강이다.

근데 우리에게는 <중용> 공부가 왜 그리 어려운가? 내가 보기에는 두 가지 때문인 듯하다. 그 하나는 <중용>의 한문 문체 자체가 까다롭기도 하거니와 지금의 우리에게는 좀 허황되기도 하다. 그래도 문체의 함축성이나 문리의 난해성은 거듭 공부하면 조금씩 나아지게 마련이다. 게다가 그 어려움을 좀 덜기 위해서는 문맥의 핵심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수식이 번잡한 데에 너무 끌려갈 필요가 없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지금 우리는 과거시험을 위해 <중용>을 읽는 게 아니지 않는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저자는 석가의 가르침에서 번다한 내용을 싫어하고 그 요지를 극히 간략히 정리해 놓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찬술했다고 밝히고 있다. <중용>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할아버지를 예찬하는 문체가 이래저래 다소 번다히 반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중용> 16장에서 19장까지는 그 내용의 편찬이 <중용> 본래 취지에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아예 해석을 생략한 사람도 있다.

다른 하나의 어려움은 '중용' 혹은 '중화'의 가르침대로 그것을 실천하기가 지난하기 때문이다. <중용>의 성(誠)은 부단한 성지(誠之)의 과정이다. 소소한 일상에서 '중화'(中和)는 쉬운듯하지만 상황에 맞춰 적시에 시중(時中)하고, 일관되게 오래 능구(能久)하고, 그 실천의 맛을 음미할 줄 아는 지미(知味)에 이르기까지는 참으로 지난하다. 그래서 공자도 시퍼런 칼날 위를 밟을 수 있을지라도(白刃可蹈) '중용'은 능하기가 참으로 어렵다고 했다.

그 어려움에 맞서기 위해서는 천명에 따르는 자기 내면을 향한 솔성(率性) 공부가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 그래서 <중용>에는 오직 천하의 지성(至誠)이라야 천명으로 품부된 자기의 성(性)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고, 자기 성을 온전히 발현(盡己性)케 해야 다른 사람의 성을 온전히 발현(盡人性)케 할 수 있다고 했다. 하여 <대학>에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말하면서, 먼저 자기 내면을 닦은 다음에라야 다른 사람에 대한 다스림이 바르게 된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불교에서 말하는 '자리행'(自利行)과 '이타행'(利他行)을 떠올리게 된다. 여기서 스스로를 이롭게 하는 '자리행'(自利行)이 그 체(體; 뿌리)이고, 이타행(利他行)은 그 용(用)으로 따라붙는 부수적 결과일 뿐이다. 하여 우리는 자리적(自利的) 삶의 내성(耐性)이 스스로의 삶에서 농익어 있지 않은 채로 남을 위한답시고 팔 걷어 부치고 나서는 사람을 극히 경계해야 한다. 그 전형이 거리낌 없이 나대는 정치인들이다. 어쩌면 가장 먼저 물러나야 할 존재들이다.

<최순실 게이트와 이름 없는 벗들>에서 <한겨레> 백기철 논설위원은 고비 고비 등장하는 숨은 의인들의 존재가 무척 새삼스러웠다면서 이렇게 적고 있다.

세상엔 묵묵히 자기 일을 하면서도 불의에 맞설 태세를 갖춘 이름 없는 벗들이 아주 많다. 권력 쥔 사람들은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더 겸허하고 정직해져야 한다. 촛불이후 감시와 비판의 대상이 되는 권력의 범주는 크게 확대되고 있다. ...(중략) 우여곡절이 있지만, 역사를 앞으로 밀어젖히는 이들은 항상 이름 없는 벗들이다(<한겨레>, 2017.6.23, 27면).

그렇다. 묵묵히 자성(自性)이 시키는 대로 사는 이름 없는 벗들은 어디에나 있다. 그런 벗들은 솔성(率性)의 삶을 지엄한 하늘의 명령인 줄 알고 묵묵히 살아갈 뿐이다. 역사는 언제나 그들의 내성에 기대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중용> 공부의 어려움은 전자(내용)에 있는 게 아니라 후자(실천)에 있다. 왜냐하면 <중용> 내용을 이해하는 일은 공부가 쌓이는 만큼 가능한 일이지만, <중용>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일은 쉬운 듯하지만 그것을 우리의 사소한 일상에서 체화(體化)하기는 지난하다. 지성(至誠)은 쉼이 없기 때문이다. 원래 인성은 도달가능한 적극적 표현이 아니라 도달하려면 할수록 더욱 어려움과 부족을 느끼게 하는 소극적 기준이다. 그래서 <중용>공부는 할수록 어렵게 느껴진다.

덧붙이는 글 | <지식과 세상 사회적협동조합>(대구)에서 마련한 '중용'교실에서 얻은 공부 내용과 그 소감을 정리한 겁니다.



태그:#'중용' 공부, #지식과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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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둥이로 태어나 지금은 명예교수로 그냥 읽고 쓰기와 산책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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