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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은 매우 크며 지금까지 우리의 일상에 남아 있다. 전쟁의 규범과 원리가 내면화되어, 우리는 '전쟁을 치르듯이' 산다. 중고등학생은 이른바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청년들도 취업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며, 직장인은 살아남기 전쟁을 벌인다. '나부터 살자'는 전쟁 속에서 공공선과 공동체는 뒤로 밀린다.

특히 한국전쟁 시기 전국에서 벌어진 민간인 집단 학살은 정부 수립 이후 국가가 저지른 가장 잔혹한 범죄였는데, 이는 한국인의 심성에 깊은 어두움을 남겼다. 국민은 '확실한 우리 편', 즉 투철한 반공주의자가 아니면 누구든 적으로 몰려 학살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이 원체험은 가슴에 박혀 이후에도 우리의 일상을 마치 전쟁처럼 구성하는 힘으로 작동했다.

지난 권위주의 정권은 전쟁기에 일어난 국가 범죄를 은폐했으며, 반공주의의 잣대로 기억을 조작하고 역사를 왜곡했다. '6‧25는 반공의 성전'으로 규정되었다. 나아가 그것을 국민들에게 내면화하는 '기억의 정치'가 매우 전투적으로 행해졌다. 조금이라도 의문을 품거나 다른 시각을 드러내는 이가 있다면, '우리'의 범주에서 제외되며 인간이 아닌 취급을 받았다.

내용과 분야가 달라도, 전쟁 정치가 작동하는 원리와 방식 자체는 곳곳에 스며들어 '우리의 일부'가 되었다. 우리는 각종 단체나 조직의 운영을 마치 군사 조직처럼 하는 것이 몸에 익은 행동이 되어 있다. 심지어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운 운동권도 '동지 아니면 적'이라는 단순 이분법으로 내부를 단속했다는 점에서 그 작동 원리가 내면화되어 있었다.

지금도 누군가 확실한 우리 편이 아닌 것 같다고 '손가락 총'(좌표)을 올리면 적으로 몰아 집단 린치를 가하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진다. 적에 맞서 싸우는 강고한 군사 조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합리적 토론은 이루어지지 않고 건강한 시민사회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렇듯 전쟁이 낳은 사회의 작동 원리는 우리의 일부가 되었고, 일상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으며, 시민사회의 성숙과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그래서 사회학자 김동춘은 "한국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30쪽)며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전쟁 혹은 전쟁기의 학살을 특수하고 예외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 나는 한국전쟁기 학살이 우리 사회에 스며들어와 정치·사회의 일부가 되어 있으며 부드러운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고 보았다."(6쪽)

민간인 집단 학살이라는 과거를 정리하는 일은 왜 중요한가?

표지
▲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표지
ⓒ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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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춘이 지은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는 한국전쟁 때 벌어진 민간인 집단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고자 한 운동의 역사를 담고 있다. 저자는 학자로서 학살 사건을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피해 유족들과 함께 시민단체를 꾸려 활동가로 활약하는가 하면, 국가 기구인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관료로서 책임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 책은 저자가 겪은 다양한 일들, 이를테면 피해 유족 증언 대회를 조직하거나 유족들과 함께 시민단체를 만들며 겪은 문제와 어려움, 극복 방안 등을 기록하고 있다. 덕분에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읽으며 고민을 공유하고 여러 노하우를 배워도 좋을 듯하다.

그리고 국가폭력 과거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만들어졌던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을 돌아보며 성과와 한계를 정리한다. 여기에는 앞으로 국가위원회를 만들 때 진지하게 참고해야 할 내용들이 무척 많다.

더욱 주목이 가는 내용은 책 곳곳에 있는 우리 사회에 대한 통찰이다. 즉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들이 있어 주목된다. 이 때문에 이 책은 2006년 출간된 문제적 저작인 <전쟁과 사회>의 후속작 성격도 있다. 그리고 과거 청산의 남은 과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이 두 가지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저자가 특별히 한국전쟁 때 벌어진 민간인 집단 학살을 주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한국전쟁기의 학살이 '한국 정치‧사회 작동의 기원이자 원리'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한국전쟁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을 보라고 강조한다.

"나는 한국 내의 민주주의, 남북 관계, 한미 관계 등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국전쟁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한국전쟁에 관한 일들 중에서 한국인들에게 가장 알려지지 않은 민간인 학살 사실들은 그 핵심에 속한다. 터부에 그 사회의 진실이 있고, 예외에 보편적 내용이 있고, 신화에 현실이 거꾸로 표상되어 있기 때문이다."(43쪽)

공식적으로 '6‧25는 반공의 성전'이었다. 그렇다면 전쟁 시기 국군과 경찰이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진상을 규명하는 것은 그간 강요된 망각과의 싸움이며 공식 기억과의 싸움이 된다. 게다가 주류 세력은 매우 적극적으로 '기억의 정치'를 활용해 자신의 탄탄한 기반으로 삼아 왔다. 그래서 이는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일과 관련되지 않을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기억의 정치'는 한 국가나 사회의 헤게모니, 국가 정체성의 문제이자 사회의 질서, 법과 도덕의 기본이다.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일이 중요하고 또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국가를 만드는 일과 맞먹기 때문이다."(7쪽)

사회적 기억으로 승화하기, 정체성 재구성하기는 이루어졌나?

뉴스를 통해 언뜻언뜻 관련 소식을 접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을 거치면서 한국전쟁시 민간인 집단 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피해자 배상‧기념사업 등이 꽤 진행되었을 거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과연 그럴까? 가장 널리 알려진 노근리 사건과 거창 사건조차도 부족한 점이 많다. 노근리 사건은 1999년 미국 AP의 보도로 국제적인 이슈가 되었고,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가 공동 조사를 벌인 바 있다. 그리고 당시 클린턴 대통령이 이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무언가 정상적으로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조사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양국이 내놓은 보고서는 애초의 AP 보도와 달리 중요 증인들의 진술을 번복했는가 하면, 명백하게 민간인을 향해 총을 쏜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아무런 상부의 명령이 없었으며, 따라서 가해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렸다."(96쪽)

노근리 사건은 결국 미국의 무성의한 태도와 한국 정부의 소극적 태도로 진상 조사와 진실 규명은 매우 부족한 상황에서 서둘러 봉합하는 방식으로 마무리되었다.

학살 사건의 대명사인 거창 사건도 마찬가지다. 관련 특별법까지 마련되었지만, 진상 규명조차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피해자 명예 회복과 위령 사업만 서둘러 해버렸다. 사회적 기억으로 승화되기에 부족했고, 지역사회의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진상 조사‧진실 규명과 관련해 빛나는 성과는 노무현 정부 때 구성된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위원회의 근거 법률은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취지가 흐려졌으며 진상을 규명하기에 부족한 누더기 법이 되었다. 그래서 진실화해위원회는 무척 힘겹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각 정부 부처의 비협조도 큰 문제였다. 심지어 국사편찬위원회의 자료조차 이용하기 어려운 상황도 벌어졌다. 저자는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라고 탄식하기도 하고, "기막힌 나라의 기막힌 현실"이라고 분통을 터뜨리기도 한다.(319쪽) 진실화해위원회의 분투는 눈물겨울 정도다.

게다가 근거 법률의 제약 때문에 진실화해위원회는 국민과의 소통이 차단된 채 '조용히 그들끼리만' 진행해야 했다. 마무리하면서 낸 보고서조차 '조용히'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아쉬워한다.

"한국에서 진실화해위 보고서는 그 존재 자체도 알려져 있지 않다."(9쪽)

보고서의 내용을 다시 알리는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 진실화해위는 방대한 자료도 수집했는데,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되었다고 한다. 이 자료 또한 무척 중요하다.

"진실화해위가 수집한 한국 현대사 자료는 다른 어떤 기관이 수집한 것보다도 방대하고 풍부하다. 이것을 기초로 해서 한국의 국군‧경찰‧사법부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함은 물론이고 한국전쟁의 역사, 군사정권기의 현대사도 다시 기술되어야 할 정도다."(402쪽)

잊혀진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과거 청산의 결여

진실화해위원회는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에 출범해 이명박 정부 때인 2010년 조용히 문을 닫았다. 진실에서 화해로 나아가는 일, 즉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나라를 다시 세우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과제도 잔뜩 남아 있다. 학살지의 유해 발굴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발굴된 유해도 보존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위령비가 세워진 곳이나 억울하게 죽은 민간인을 기억할 수 있는 표지판도 거의 없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유골, 발굴되었어도 제대로 안치되지 못하고 있는 유골, 죽은 사람에 대해 제대로 위령 사업을 실시하거나 위령비를 세울 수 없는 현실, 이 모든 일이 한국전쟁이 아직 휴전 상태임을 말해주고 있으며 아직 완전히 저 세상으로 보내지 못한 사람의 영혼이 한반도 주변을 떠돌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400쪽)

우리는 가해자의 책임을 묻지 못했다. 학살 범죄자가 참전유공자가 되어 국립묘지에 묻혀 있기도 하다. 그리고 국가 폭력이 재발하지 않게 정부 각 기관이 인정하고 사과하며 조직 문화나 관행의 개혁 등의 조치를 할 필요도 있다. 정의를 수립하는 일은 아직 멀어 보인다.

피해자에 대한 추모상 건립, 사건 장소의 추모 공원화도 필요하다. 이는 억압된 기억을 사회적 기억으로 만들기 위해, 억울한 죽음을 사회적 죽음으로 승화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이러한 일들을 통해 병든 사회를 치료할 수 있게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진상 규명과 그것을 공론화하는 작업은 바로 고통을 공유해 사회적인 것으로 만들 것인가, 피해자 가족들과 피해자 자신만의 것으로 가슴에 묻을 것인가의 문제다. 따라서 국가폭력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규명 및 처벌은 일종의 사회적 정신 치료, 국가 차원에서의 집단 정신 치료라 부를 수 있다. 개인의 병과 달리 사회의 병은 진실과 정의를 통해서 치료될 수 있기 때문이다."(206쪽)

그리고 정부의 공식 기록에 지난 국가폭력의 잘못에 대해 언급해야 하며, 교과서에도 반영되어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교육해야 한다. 이렇게 진실이 사회적으로 공유되어야 한다. 언론과 시민사회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마침내 이는 나라를 다시 세우는 일, 특히 시민의식의 고양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과거 청산의 모든 성과는 결국 사회정의 수립, 책임지는 정치와 행정, 약자의 인권 보호, 내부 고발자 보호 등의 용어로 재정의되어 시민사회의 강화, 결국 국가의 성격 변화와 연결되어야 한다."(431쪽)

"과거 청산의 궁극적인 목적은 시민사회의 변화, 즉 시민의식의 고양이라고 보았다."(171쪽)

한국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냉전의 그늘도 한반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집단 학살의 원체험은 사회 작동의 원리를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학살은 모습만 바꿔 우리의 일상에서 반복되고 있다.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는 한국전쟁시 일어난 국가폭력에 대한 과거 청산을 제대로 하려면 매우 중요하게 참고해야 할 책이다. 그리고 현재의 여러 문제가 과거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부족하게 진행된 과거 청산 작업을 다시 해야만 하는 이유를 깨우치게 한다.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 한국전쟁과 학살, 그 진실을 찾아서

김동춘 지음, 사계절(2013)


태그:#한국전쟁, #김동춘,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국가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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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이달의 뉴스게릴라 선정 2002년, 오마이뉴스 2.22상 수상 2003~2004년, 클럽기자 활동 2008~2016년 3월, 출판 편집자. 2017년 5월, 이달의 뉴스게릴라 선정. 자유기고가. tmfprlansgh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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