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실 선임행정관.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실 선임행정관.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실 선임행정관이 연일 화제다. 그가 자신의 저서 <남자 마음 설명서>에서 여성을 대상화하고, 대담집 <말할수록 자유로워지다>에서는 "임신한 선생님들이 섹시했다" "오늘 누구랑 했다는 말을 들으면 그 여자애에게 가서 왜 나랑은 안 해주는 거냐고 했다"고 발언한 것이 논란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탁현민 행정관의 발언 그 자체보다도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논리다. 이들은 <말할수록 자유로워지다>는 그 제목과 같이 성에 대해 자유롭고 열린 태도로 이야기하자는 취지의 책이며, 언론의 자유가 있는데 성을 주제로 발언했다는 이유만으로 탄압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또 이러한 주장을 앞세워 탁현민의 발언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지나친 도덕주의자' '성 엄숙주의자'의 틀에 끼워 넣고 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탁현민의 발언이 비판받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다. 탁현민의 발언, 그리고 탁현민의 발언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강간 문화의 산 증거다.

단순히 노골적인 발언을 지적하는 게 아니다

강간 문화(rape culture)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이 미디어나 대중문화에서 용인되거나 정상으로 간주되는 환경을 뜻한다. 강간 문화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두 사람 사이의 사생활'이라거나 '암묵적 동의'가 있었다는 이유로 강간을 강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또 남성이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성욕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처럼 묘사하며, 강간을 농담이나 무용담·오락거리로 소비한다. 뿐만 아니라 성폭력을 피해자의 책임으로 돌리며 피해자를 배제하고 '앞날이 창창하다' '실수를 뉘우치고 있다'는 이유로 가해자의 잘못을 축소한다.

탁현민의 발언이 문제적인 것은 성 경험담을 노골적으로 늘어놓아서라거나 감히 여교사를 성적 시선으로 바라봐서가 아니다. 그가 그의 경험담과 판타지의 대상으로 삼은 여성들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무시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깎아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여학생이 한 명의 남학생과 섹스를 했다고 해서, 그 사실이 남학생의 친구들 사이에 공유되고 그들로부터 섹스를 요구받는 게 당연한 일은 아니다. 이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강간 문화다. 어떤 여교사가 임신했다고 해서, 임신 사실이 성적으로 대상화되거나 임신 사실에 대한 성희롱적 언어가 공개적으로 오고가선 안 된다. 이것을 용인하는 게 강간 문화다.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실 선임행정관이 연일 화제다. 그가 자신의 저서에서 여성을 대상화하고 "임신한 선생님들이 섹시했다" 등의 발언을 한 게 논란이다.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실 선임행정관이 연일 화제다. 그가 자신의 저서에서 여성을 대상화하고 "임신한 선생님들이 섹시했다" 등의 발언을 한 게 논란이다.
ⓒ 해냄

관련사진보기


우리 사회에서 어떤 직업의 여성들이 주로 판타지의 대상이 되는지를 살펴보면 성적 대상화가 권력의 작동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직장 상사, 경찰, 간호사, 교사 등 높은 빈도로 포르노그래피에 등장하는 직업은 상대방에게 명령이나 지시를 내리는 위치에 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러나 포르노그래피 속에서 이러한 여성들의 직위에서 나오는 권위는 젠더 위계에 의해 쉽게 뒤집힌다.

이러한 권위의 붕괴는 포르노그래피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남학생이 여교사에게 외모를 노골적으로 품평하는 말을 던질 때, 성행위를 암시하는 몸짓을 하고 반응을 보려 할 때, 치마 밑으로 카메라를 들이댈 때, 교사와 학생 간의 위계는 남성과 여성 간의 위계로 대체된다.

학교 현장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피해자인 교사는 고소는커녕 제대로 된 사과조차 받지 못하고 쉬쉬하도록 종용당하는 경우가 많다. 남학생이 여교사를 상대로 성폭력을 저지를 때에는 작동하지 않던 '교사와 학생 간의 인격적 관계'가, 여교사가 남학생을 상대로 사과나 처벌을 원할 때에는 무엇보다 강력한 도덕적 기준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건의 피해자가 된 교사가 과연 예전과 같은 마음으로 학생들을 대할 수 있을까? 자신의 피해를 학생이 미숙한 탓에 일어난 일로 여기고 스스로를 다잡는다고 하더라도, 또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움츠러들지 않을 수 있을까? 교사 개인이 이런 일로 흔들리지 않는다고 해도,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여성에게든 성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목격한 그 교실의 학생들은 어떻게 될까?

교실 풍경.
 교실 풍경.
ⓒ sxc

관련사진보기


성 엄숙주의보다 더 문제적인 것

"임신한 여교사가 섹시하다"와 같은 말을 책의 지면을 빌어 공공연히 발설하는 것이 용인되는 현실과, 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성폭력이 늘어나는 현상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 사람의 교사이자 여성으로서, 그리고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차원에서도 이런 말은 상당히 불쾌하다. 그러나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차원을 떠나서라도, 이런 발언이 가능한 문화는 안전하고 효율적인 직업 수행을 어렵게 만든다는 점에서 여성 교사 전체에게 실제적인 피해를 끼친다.

여교사는 섹스도 할 수 있고, 임신도 할 수 있는 인간이다.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그러나 여교사는 자신이 원하기 때문에 섹스하고 임신하는 것이지,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낄낄 웃으며 성적 대상으로 삼으라고 섹스하고 임신하는 것이 아니다.

성 엄숙주의는 분명 우리 사회의 성 문화를 왜곡시키는 한 요인이다. 성을 부끄러운 것, 숨겨야 할 것, 점잖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는 분위기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성 문화를 병들게 하는 데 있어 성 엄숙주의보다 더 크고 심각한 문제로 작용하는 요인은, 강간 문화를 성 해방을 위한 투쟁인양 포장하는 일이다.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존엄성에 대한 존중 없이는 건강하고 자유로운 성 문화도 있을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솔리님은 초등성평등연구회 소속 초등 교사입니다.



태그:#탁현민, #남자마음설명서, #말할수록 자유로워지다, #강간문화, #임신
댓글163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8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