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 포스터

<악녀> 포스터 ⓒ NEW


민망한 일이지만, 최근 영화관에서 깜빡 '조는' 일이 부쩍 늘었다. 순간적으로 몰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한 채 눈을 감고, 일정한 리듬에 고개를 자연스레(?) 맡기는 것이다. 그래도 '코를 고는' 최악의 매너로 영화관을 경악으로 몰고가진 않았으니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혹시 잔잔한 영화 위주로 선택해 감상을 했냐고? 더욱 민망하게도, 실은 그렇지 않다. 놀라지 마시라. 무려 우리의 톰 아저씨(톰 크루즈)가 주연을 맡은 <미이라>를 보면서도 졸음을 이기지 못했으니.

나름대로 영화를 제법 많이 보는 편인데, 이 불가항력의 힘에 무릎을 꿇었던 경험은 극히 적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장르'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아무리 시끌벅적한 사운드와 액션이 쏟아져도 이야기 자체가 단조롭거나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지 않는 영화에는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편이다. 또, 뻔한 '합'을 맞추고 있다는 생각(의심)이 들면 지루함이 몰려온다. 액션과 이야기, 혹은 기존의 액션을 뛰어넘는 파격적 액션. 이 두 가지 특별함을 갖추지 못한 액션은 관객을 졸리게 만든다.

액션은 감탄, 이야기는 실망

"올해 가장 놀라운 액션 시퀀스"(Quiet Earth)
"역동적인 액션 스릴러의 발견"(Screen daily)

분명 <악녀>는 달랐다. 감히 졸음이 찾아 올 틈이 없었다. 슈팅 게임을 연상케 하는 1인칭 오프닝 시퀀스는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정보를 접한 상태였음에도) 가히 압도적이었다. 숙희(김옥빈)의 칼, 도끼, 총을 사용한 과감한 액션과 뒤이어 전개되는 맨몸 액션도 감탄스러웠다. 리허설만 2회차가 소요됐고, 촬영에 총 4일이 걸렸다는 제작진과 배우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아 보였다. 제70회 칸 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분에 공식 초청된 이 영화를 향해 쏟아졌던 찬사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싶었다.

물론 초반의 경탄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조금씩 누그러들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오프닝 스퀀스의 그 화려하고 강렬했던 숙희의 '죽임'에 대한 이유와 설명이 지나치게 빈약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숙희가 그토록 많은 살육을 저질러야만 했는가. 물론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성실(?)하게 제시한다. 다만, 그 성실함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고 진부하다. '액션'에 있어서만큼은 기존의 틀을 깨는 데 성공했지만, 그 액션과 함께 빛나야 할 '이야기'에서는 틀 안에 갇힌 채 한계를 드러냈다고 할까.

 <악녀>의 스틸사진

<악녀>의 스틸사진 ⓒ NEW


숙희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하다. 조선족 출신의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을 코앞에서 목격한다. '보호자'이자 '울타리'였던 존재를 상실한 아픔, 그것도 '배신'에 의한 잔혹한 죽음은 뇌리에 깊이 박힐 수밖에 없을 터. 숙희는 복수의 칼날을 갈며 때를 기다린다. 킬러인 중상(신하균)은 숙희에게 우상과도 같은 존재다. 중상으로부터 구제받고, 그로부터 훈련받고, 그로부터 길러진다. 아버지를 대신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또 다른 '전부'가 숙희 위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숙희는 중상과 결혼하게 되지만, 신혼여행을 떠난 날 끔찍하게도 남편을 잃는다. 그를 보호하던, 그의 전부였던 또 한 명의 '남자'를 잃어버린 트라우마는 숙희를 또 다시 어둠 속에 가두고 내팽개친다. 나락에 빠진 숙희를 끄집어올린 건 또 다른 '국가'라고 하는 또 다른 '남자'였다. 유교적 가부장제 사회에서 '국가'가 갖고 있는 상징과 이미지가 어떤지 연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게다. 숙희는 국정원에 의해 살인 병기로 길러진다. 국가는 숙희의 '모성'을 이용해 그를 포섭하고, 그를 억압한다.

<아가씨> 숙희와 <악녀> 숙희의 다른 점

 <아가씨>의 스틸사진(위), <악녀>의 스틸사진

<아가씨>의 스틸사진(위), <악녀>의 스틸사진 ⓒ CJ엔터테인먼트/NEW


자꾸 '숙희'라는 이름을 이야기하니까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속의 숙희가 떠오른다. <아가씨> 속의 숙희가 기존의 체제를 전복시키는 되바라짐을 마구 발산해 관객들에게 '청량감'을 줬던 것과 달리 <악녀> 속의 숙희는 체제 속에 철저히 종속된다. 거침없이 칼을 휘두르고, 스스럼없이 눈앞의 적을 죽여버리는 숙희지만, 그의 '액션'에는 주체성이 결여돼 있다. 정병길 감독이 <악녀>의 숙희를 두고 "나쁜 여자는 아니다. 착한 여자의 슬픈 이야기다"라고 말했던 건, 그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비록 '여성 (원톱) 액션 영화'를 표방했지만, 그 타이틀에 적극적으로 공감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확히 말하면, '여성을 앞세운' 액션 영화라고 칭하는 게 맞지 않을까. 특히 숙희와 현수(성준)의 로맨스는 불필요하다 여겨질 만큼 '지루'해 순간 졸음이 찾아오기도 했는데, 이는 또 다시 숙희를 우리에게 친숙한, 그래서 '옳다'고 여기는 '가족 형태' 속으로 밀어넣으려는 시도처럼 느껴진다. 마치 숙희에게 '남편'이 있어야만 '완전한' 가족이 되고, 또한 행복할 수 있다는 강박이라고 할까.

김옥빈, 빛나는 존재감

 <악녀>의 스틸사진

<악녀>의 스틸사진 ⓒ NEW


그럼에도 김옥빈이 보여준 연기는 탁월하다 못해 경이롭다. 오토바이 장검 액션, 시내버스 안 액션 등 유려한 액션은 말할 것도 없고, 워낙 다양한 표정을 품고 있는 그의 얼굴은 쉽사리 잊히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다. 피칠갑을 한 김옥빈의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는 우리에게 이런 배우가 있었던가, 싶을 만큼 인상적이다. 2009년 박찬욱 감독의 <박쥐>를 통해 '각성'한 것으로 보이는 그의 연기력은 JTBC <유나의 거리>(2014)를 통해 한층 성숙해졌고, 마침내 <악녀>를 통해 만개한 듯 보인다.

<악녀>는 지난 22일 100만 관객을 넘어섰다. 개봉한 지 15일 만이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핸디캡을 안고 거둔 성과라 더욱 값지다. 또, <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가 위세를 떨치고 있는 박스오피스에서 <하루> <미이라>에 이어 4위를 기록하는 중이다. 앞서 살펴봤던 것처럼 <매드맥스>와 <원더우먼>의 그것에 훨씬 못 미치는 여성에 대한 '인식'을 내재하고 있는 영화에 '여성 액션 영화'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건 뭔가 어색하다. 그렇지만, <악녀>가 거둔 기술적 성취와 그 속에서 오롯이 빛나는 김옥빈의 존재감에는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악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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