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별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나라, 발트해에 자리한 라트비아에 다녀왔다.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은, 라트비아는 자국 고유의 언어와 역사,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이들 역시 우리처럼 강대국의 침략에 끝없는 시달림을 당했다는 점이었다. 가도 가도 끝없이 하늘 높이 곧게 선 자작나무나 소나무 숲, 푸른 들판,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이 인상적인 나라였다. 이런 나라의 순하고 친절한 사람들이 그런 고난의 시절을 겪었다는 것이 마음 아팠다.

18세기부터 제정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1차 세계대전 후 독립했으나 다시 1940년 8월 스탈린에 의해 소비에트 연방에 강제 합병되었다. 1991년 소련 연방 해체 후 독립을 인정받았으며 현재는 유럽연합의 일원이다.

우리보다 훨씬 오랜 기간 지배를 받아서인지 지금도 노인층은 러시아어를 많이 쓰고 있다고 한다. 현재도 라트비아의 도시 다우가프필스는 '작은 러시아'라 불리며 실제로 러시아인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일제의 지배를 더 오래 받아서 그들이 우리나라 일부에 아예 거주하는 지역이 생겨 여전히 살고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를 생각하니 참 심란했다.

러시아가 지배하던 시절 반체제적 인사를 어떻게 탄압했는지 보여주는 자료를 보니, 일제가 우리에게 저지른 만행에 못지않은 참혹한 일들이 많았다. 동전만 한 빛이 들어오는 지하 감옥에 겨우 앉을 만한 공간의 독방을 만들어 사람을 가두어 눕지도 못하게 하고 고문과 사형을 맘대로 자행했으니 말이다.

이들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발틱의 세 나라 국민이 모여 1989년 인간 띠를 이루었던 사건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고, 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마크가 각 나라의 수도에 남아 있었다.

한편, 밖에 널리 알려질 기회가 없던 이 나라의 한이 서린 국민가요마저 러시아에 도용된 듯해서 괜히 불쾌했다. 라트비아 노래인 <마리냐가 준 소녀의 일생>을 러시아가 <백만 송이 장미>로 개사해서 발표하니, 이게 러시아산 사랑노래로 각국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나 역시나 전에 알게 된 러시아인에게 배운 대로 이를 러시아의 전래가요 정도로 알고 있다가 이번에 제대로 된 사실을 알고는 머쓱했다. 그리고 이들의 아픔을 이해할 만한 사람으로서 몹시 미안했다. 이번에는 기본 지식을 가지고 제대로 살펴보니 알 수 있었지만, 이전 기억을 돌이켜보면 라디오와 인터넷에서조차 대부분 잘못 소개되고 있었다.

마치 우리의 노래 <아리랑>이나 <봉선화>를 일본이 개사해서 '일본풍 사랑노래'로 밖에 널리 알려진다면 기분이 어떨까 싶었다. 동병상련의 입장에서 그들의 억울함에 공감했다.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만난 거리의 악사는 크로마하프로 '마리냐가 준 소녀의 일생'을 연주하고 있었다.
▲ 거리의 악사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만난 거리의 악사는 크로마하프로 '마리냐가 준 소녀의 일생'을 연주하고 있었다.
ⓒ 박현옥

관련사진보기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의 골목을 지나는데 중년의 여자가 크로마하프로 이곡을 기가 막히게 아름답게 연주하고 있었다. 난 되돌아가서 미안한 맘을 담은 동전을 그 앞에 놓아주며 "내가 참 좋아하는 노래에요"라고 말했다.

<백만 송이 장미>의 원곡인 <마리냐가 준 소녀의 인생(Dāvāja Māriņa meitenei mūžiņu)>은 1981년 소련 공화국 시절, 라트비아의 방송국 미크로폰스가 주최한 가요 콘테스트에 출품해서 우승한 곡이다. 작곡은 라이 몬츠 파울스(Raimonds Pauls), 작사는 레온스 브리에디스(Leons Briedis)가 했다.

가사 내용은 <백만 송이 장미>와 전혀 다른 내용으로, 강대국에 나라의 운명이 휘둘리는 라트비아의 고난을 암시한 것이다. 제목에 나온 마리냐(Māriņa)는 라트비아 신화의 여신으로, 최고의 신 중 한 명이다.

어렸을 적 내가 시달릴 때면
어머니가 가까이 와서 나를 위로해 주었지
그럴 때 어머니는 미소를 띄워 속삭여주었다네
마리냐는 딸에게 인생을 주었지만 행복을 주는 것을 잊었어

시간은 흘러 더 이상 어머니는 없네
지금은 혼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지
그래서 외로움에 물리면 어머니를 떠올려
어머니와 똑같이 중얼거리는 한 사람 바로 내가 있다네
마리냐는 딸에게 인생을 주었지만 행복을 주는 것을 잊었어

이제 그러한 일 모두 잊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놀란다네
이제는 나의 딸이 미소를 띠며 그렇게 흥얼거리고 있음을
마리냐는 딸에게 인생을 주었지만 행복을 주는 것을 잊었어

- <마리냐가 준 소녀의 인생> 가사

러시아의 알라 푸가초바가 불러 대중에 널리 알려진 곡인 <백만 송이 장미>의 가사는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가 작사한 것이다.

한 화가가 살았네 홀로 살고 있었지
작은 집과 캔버스를 가지고 있었네
그러나 그는 꽃을 사랑하는 여배우를 사랑했다네
그래서 자신의 집을 팔고, 자신의 그림과 지붕도 팔아
그 돈으로 완전한 장미의 바다를 샀다네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붉은 장미

창가에서 창가에서 창가에서 그대가 보겠지
사랑에 빠진 사랑에 빠진 사랑에 빠진
누군가가 그대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꽃으로 바꿔놓았다오
아침에 그대가 창문 앞에 서 있으면 정신이 이상해질지도 몰라
마치 꿈의 연장인 것처럼 광장이 꽃으로 넘쳐날 테니까

정신을 차리면 궁금해하겠지 어떤 부호가 여기다 꽃을 두었을까 하고
창 밑에는 가난한 화가가 숨도 멈춘 채 서 있는데 말이야
만남은 너무 짧았고 밤이 되자 기차가 그녀를 멀리 데려가 버렸지
하지만 그녀의 인생에는 넋을 빼앗길 듯한 장미의 노래가 함께 했다네
화가는 혼자서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그의 삶에도 꽃으로 가득 찬 광장이 함께 했다네

- <백만 송이 장미> 가사

알면 사랑하게 된다고, 발틱의 에라리 3국 여행 후 신문을 보니 안타깝다. 약소국의 비애랄까. 발트해에서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러시아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에라리 3국은 러시아의 침공 가능성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전에도 강대국의 틈새에서 고초를 겪었던 이 나라의 운명이 여전히 불안한 것을 보며, 우리나라가 지금 처한 현실이 대비되어 마음이 착잡했다.


태그:#백만 송이 장미, #라트비아, #마리냐가 준 소녀의 일생, #리가
댓글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