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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순례길에서 이원영 교수와 제일 많은 시간을 함께 걷고 있는 하라상이다.
▲ 해저 터널을 건너 키타규슈의 해안가 걷고 있는 순례단 이번 순례길에서 이원영 교수와 제일 많은 시간을 함께 걷고 있는 하라상이다.
ⓒ 김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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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선생님, 일본 한 번 건너오시지요. 15일에 오시면 이곳에서 시민운동하시는 좋은 분들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생명 탈핵 실크로드' 깃발을 들고 서울 광화문에서 출발하여 일본, 대만, 베트남, 동남아, 인도, 중동, 동유럽을 거쳐 로마까지 26개국 11000km의 순례길에 나선 이원영 교수(수원대에서 해직이 되어 지금 소송 진행 중)의 전화다. 벌써 세 번째 걸려온 전화라서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출발 전부터 나더러 일본 일정에 일정 부분 참가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이 있었지만 확답을 안 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세 차례나 전화를 받고 보니 마음이 좀 흔들린 것이다.

그래서 비행기표부터 확인해 보았다. 일본에 다녀오려면 차비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후쿠오카 행 저가항공사 표를 뒤져 보았다. 그랬더니 비행기 표가 '웬걸 이리 저렴하냐?'는 탄성이 나올 정도였다. 가는 날이 6월 14일 수요일인데, 키타큐슈까지 가는 항공권이 편도 6만5천 원인 것이다. 물론 돌아오는 날은 주말이라 그보다 좀 비쌌지만 왕복 항공료금이 제주도를 다녀오는 정도라서 제주도 여행 한 번 다녀온다는 기분으로 용기를 내었다. 

작년에 이 계획을 꺼낼 때만해도 내 속으로는 '설마, 그게 되겠나? 그러기에는 얼마나 많은 장애물들이 있는데...' 싶었다. 그 먼 거리를 걸어서 가겠다는 자체가 상상이 안 갔다. 물론 한국에서야 강원대 성원기 교수하고 이원영 교수는 걷는데는 이력이 난 사람들이다. '탈핵' 깃발을 들고 성 교수는 성당과 성당을 이으면서 4000km 이상을 돌았고, 이 교수는 절과 절을 이으면 1500km 이상을 걸었기 때문에 그들의 걸음 실력이야 인정하고도 남는다.

그래도 그게 쉬임없이 2년을 꼬박 걸어간다는 것은 상상이 잘 가질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더군다나 그 먼 길을 가려면 상당한 비용이 들 것이고, 갑자기 어떤 어려움에 빠질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2년 동안 건강이 잘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인데 그게 가능할까?'라는 강한 의구심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원영 교수는 이명박 정부 때 '4대강 반대 운동'을 하는데, 혜성처럼 나타나서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사람이 아닌가? '333프로젝트'라는 기획을 하여 전국의 교수, 교사, 스님, 신부님, 목사님 등 환경에 관심을 갖는 종교인들과 시민운동가 등의 후원을 받아 버스를 300대에 1만 명의 국민들을 4대강 답사를 하도록 하여 우리 강의 아름다움은 물론 제대로 알고 느끼도록 하여 4대강 반대 운동에 적극 나설 수 있도록 하고자 했던 프로젝트였다.

그 프로젝트를 거침없이 수행해 나가는 것을 보면서 이 분의 추진력 하나는 대단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국내의 일이라서 가능한 측면도 있지만 이번의 생명, 탈핵 실크로드의 그 장대한 스케줄과 스케일에는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좋아하던 술도 딱 끊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 설득을 하면서 1년 여에 걸쳐 준비를 하여 나갔다. '100인 위원회'를 만들고, 이들에게 후원금을 모아나가면서, 몇 차례에 걸쳐 세미나를 열고 '세계 생명 헌장' 초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코스 중 몇 곳을 서너 차레 답사를 다녀오는 등의 노력을 하더니 드디어 부처님 오신날인 지난 5월 3일에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천지신명께 고유제를 지내고 대장정에 나선 것이다.

그렇게 출발하여 수원, 대전, 대구, 울산 등을 거쳐 5월 28일 해운정사에서 진제 조계종 종정스님을 찾아서 출국 인사를 드리고, 부산역 광장에 이르러서 한국 일정을 다 소화를 했다. 나는 그 한국 일정 중에 마지막 3일을 이 교수 일행과 함께 순례길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런 마음의 갈등을 안고 비행기 예약을 하고 이 교수한테 전화를 하여 가는 방법을 확인하였다. 인천에서 키타큐슈 공항에 도착을 하면 버스를 타서 고쿠라역까지 와서 JR선 시모노세키 행 기차를 타라는 것이다. 그러면 시모노세키 역으로 마중을 나가겠다고 하였다. 혼자는 처음가는 일본 길이라 긴장을 하면서 짧은 영어로 길을 물으며 이 교수가 시키는대로 시모노세키 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교수가 일본인 구와노야스오라는 시민운동가와 함께 마중을 나와서 반갑게 해후할 수 있었다.

이 교수 일행이 나를 데리고 간 숙소는 시모노세키에 있는 노동회관 건물이었다. 가서 보니 웬 젊은 남자가 나를 알아보면서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혹시 김광철 선생님 아니세요?"
"맞습니다. 어떻게 저를 아세요?"
"작년 서울에서 탈핵 순례를 할 때 독립문 인근에서 선생님을 뵈었죠."

그러고 보니 그 때 기억이 새로웠다.

당시 8월 마지막 주 천주교 예수회가 중심이 되어 탈핵희망 서울길 순례를 하는데, 그때 일본에서 오셨다면서 남자 한 분과 수녀님 한 분이 인사말을 하였고, 나도 앞에 나가서 인사말을 하게 되어서 특별히 그 신부님이 나를 알아본 것이다.

'아니, 세상이 이렇게 좁다니?' 한국말이 그리 유창하진 않지만 한국 말로 한국의 탈핵 운동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인사말을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데 그 분이 바로 이 노동회관의 관장을 맡고 있는 나까이 준 신부인 것이다. 이 노동회관은 천주교에서 세워 운영하는 곳이었다.

우리는 3층의 숙소로 안내되어 올라갔다. 방 4개를 내 주면서 자라고 하는데, 화장실이며 샤워실, 일본 특유의 다다미방, 침구 등 어느 것 하나 깔끔하지 않은 것이 없는 훌륭한 숙소였다. 거기에서 그날까지 이 교수와 일정을 함께했던 박인식 박사(전 중국 장춘대 교수)와 일본인 노인 복지사 하라스네노리를 만난 것이다. 네 사람은 가게에서 사간 간식을 먹으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관문교 위로 아침해가 떠오르는 시모노새끼 해협을 보면서 일제 때 관부연락선을 떠 올려 보았다.
▲ 시모노새끼 앞 바다 관문교 위로 아침해가 떠오르는 시모노새끼 해협을 보면서 일제 때 관부연락선을 떠 올려 보았다.
ⓒ 김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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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일찍 깨어서 창 밖을 내다보니 얕은 구릉 위에 자리잡은 우리의 숙소에서는 시모노세키와 큐슈섬을 가로지르는 해협이 눈에 들어오고 관문교 위로는 아침해가 휘황하게 떠오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일제 때 관부연락선을 타고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이곳 시모노세키를 거쳐 일본 각지로 흩어져 들어갔겠는가? 그 중에 내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도 있었을 것이다.

또 일제가 패망하여 고국으로 돌아갈 때도 이 곳을 통해 돌아가지 않았는가? 이수일과 심순애의 이야기에서부터 일제 패망 이후 귀국선에 포격을 받아 몇천 명의 사람들이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어간 사건 등 이곳 시모노세키는 일제의 조선 침략의 상징과도 같은 전초기지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지역에는 조선인들이 모여사는 동네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에도 많은 교포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숙소에서 가까운 곳들을 산책하러 나갔다. 바로 옆에는 커다란 수원지가 있어 철조망을 둘렀고 그 주변이 작은 공원이다. 각종 조경수들이 심어져 있었는데 공원 한가운데는 칼을 찬 일본 무사의 모습을 한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일본의 유명인이라고 한다. 주변의 식물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한국의 식물들과 비교해 보기 위함이다. 나는 해외로 나가면 그곳의 식물을 살피는 습성이 생겼다.

보아하니 이곳은 일본의 남쪽 지방에 속하기 때문에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풀들과 나무들, 그리고 한국에도 많이 귀화되어 귀화식물들이 널려 있었다. 별로 식생의 차이를 느낄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 보던 해송, 아왜나무에서 종가시나무, 동백과 같은 상록수들, 대나무, 모시풀, 띠, 찔레, 거지덩굴, 칡은 물론 망초, 개망초와 같은 귀화 식물들도 한국과 다름 바 없었다. 바로 내 고향 제주의 식생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모습이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동네로 내려가 보았다. 우리나라의 부산과 같이 바닷가로 비탈진 언덕과 거기에서 뻗은 작은 능선들과 골짜기에는 비좁은 공간들을 잘 다듬어 평지를 만들고 그 위에 집들을 지어 살고 있었다. 일본 특유의 검으스름한 색조의 기와며, 목조에 판자로 또는 시멘트로 만든 벽의 이층 건물들, 이런 건물에 작은 정원과 거기에는 여러 가지 나무와 꽃들이 심어져 있는 모습, 그리고 그런 집들 사이사이로 난 작은 골목길에는 소형차들이 가득 주차되어 있는 시모노세키 주택지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이 바탈에 조선인들이 끌려오거나 스스로 건너와서 얼마나 많은 애환이 담긴 삶들을 살다갔을까?

'가미노새끼 원전 반대' 등의 현수막과 '지구전가족 태양광' 등의 깃발을 들고 순례에 함께 하기에 앞서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 츨빌에 앞서 각종 깃발을 들고 나타난 일본 탈핵 운동가들 '가미노새끼 원전 반대' 등의 현수막과 '지구전가족 태양광' 등의 깃발을 들고 순례에 함께 하기에 앞서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 김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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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단장 이원영 교수와 김광철, 일본인 8명 등이 시모노새끼의 오즈끼역에서 출발하여 야가구찌현의 한 동네를 지나고 있다.
▲ 시모노새끼의 한적한 동네를 걷고 있는 순례단 한국인 단장 이원영 교수와 김광철, 일본인 8명 등이 시모노새끼의 오즈끼역에서 출발하여 야가구찌현의 한 동네를 지나고 있다.
ⓒ 김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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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저녁에 먹다 남은 김밥 등을 간단하게 챙겨 먹고 순례길에 나섰다. 이날의 순례는 오즈키역에서 고모리역까지 이어지는 22km의 코스다. 고모리 역에 나갔더니 벌써 8명의 일본 분들이 나와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이곳 시모노세키가 속한 야마구찌현의 가미노새끼 원전 반대 운동을 수십 년째 해오고 있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그 중에는 부부가 참가한 분은 '상관원발 반대'라는 깃발을 있었다.

또 그들 중에는 전직 교사가 있었는데 그 분은 나처럼 일본에서 생태교육을 열심히 하다 교장한테 미운털이 박혀 교통법규를 위반하자 교장한데 자진 신고를 하였더니 상부 기관으로 보고를 하여 징계를 받은 분도 있었다. 그후에 학교를 그만두고 탈핵운동에 매진하고 있는 오쿠라노부히코라는 분이었다. 그 분은 커다란 깃발을 세로 천에 페인트로 '원발 잘가라'라는 내용과 '전지구 가족 태양광'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깃발을 들고 나타나서 더욱 눈길을 끌었다. 모두 10명이 되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다음 목적지까지 깃발들과 현수막을 들고 생명, 탈핵 순례길에 나서는 것이다.

'상관원발반대' 깃발을 들고 부부가 온 분, 하라씨, 구로다 등 일본 시민운동가들과 함께 해저 터널이 있는 곳을 향해 시모노세키 시내를 열심히 걸었다. 지나가는 차 속에 있는 사람들도 한국과는 달리 크게 눈길을 주질 않는다. 하라씨는 '걸어서 2년간 로마갑니다'라면서 걸으니 가끔 궁금하여 좀 더 자세히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런가 하면 지나가는 차 속에 앉아 있는 분들이 깃발과 현수막을 들고, 지나가는 행렬에 대하여 신기한 듯 힐끔힐끔 쳐다보기도 하였다. 그래도 쳐다보는 사람들은 남자 보다는 여자들이 더 많았다. 함께 걷는 시민운동가들의 말에 의하면 그래도 이런 행렬이 지나가니 관심있게 쳐다봐 줘서 좋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더욱 이런 현안 문제들에 대하여 집회를 하고, 홍보지를 나누어 주어도 잘 받지도 않고 무표정하게 지나간다는 것이다.

가다가 식당을 찾아도 길거리에 식당이 보이질 않았다. 겨우겨우 찾아들어간 곳이 라멘집이었다. 그전에 일본으로 환경교육 연수를 왔을 때 라멘을 몇 차례 먹어봐서 그 맛을 안다. 돼지 비계와 같은 수육 몇 점에 돼지 뼈를 잘 우린 국물에 면이 들어간 일본식 라면인데, 이번에 그걸 먹으면서 느끼는 것은 '왜 이리 짜냐'는 것이다. 내가 너무 짜서 못 먹겠다고 하니 이원영 교수는 말한다.

"일본인들은 다들 이렇게 짜게 먹어요. 그리고 나는 이 정도는 충분히 먹을 만한데요."
"나는 도저히 짜서 못 먹겠다."

그래서 반도 못 먹고 물리고 말았다.

시모노새끼와 큐슈사이에 있는 해저 터널 인근에서 이렇게 재미있게 그림극에 열을 올리는 할아버지도 만날 수 있었다.
▲ 길거리 그림극 시모노새끼와 큐슈사이에 있는 해저 터널 인근에서 이렇게 재미있게 그림극에 열을 올리는 할아버지도 만날 수 있었다.
ⓒ 김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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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오후 일정을 위해 걷다 보니 혼슈섬과 큐슈섬을 연결하는 다리가 나오고 바닷가에 이를 수 있었다. 바닷가에서 손에 물을 담그고 좀 쉬었다 다리와 해저터널이 있는 지점에 도착했다.

길가에는 한국에서 그림극을 하는 것과 같이 이곳에서 한 늙수그레한 일본 할아버지가 한국 제주도의 갈옷같은 복장과 두건을 쓰고 자전거에 그림 상자를 싣고서 쉼터 있는 곳에서 열심 800여년 전 일본의 역사의 전쟁이야기를 신나게 들려주고 있었다. 구아노씨는 그 옛날 이 지역에서 원씨와 경씨 성을 가진 번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싸움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렇게 쉬고 있는데 80세 전후로 보이는 할머니 세 분이 다가왔다. 나는 그 분들이 처음에는 지나가는 행인인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라 그 분들은 연로해서 걸을 수는 없고, 우리 일행이 해저터널을 건너간다고 하여 그 구간만이라도 함께 걷기 위하여 오신 분들이다. 그 분들 중에 한 분의 남편은 수산대학 교수라고 하는데, 특별히 그 분은 내가 키도 작고 힘들어 보였는지, 차를 3병 사와서 한 병씩 나누어주고 터널을 건널 때는 내 팔짱을 꼭 끼고 걷는 것이 아닌가?

80 전후의 연세를 한 할머니 세 분이 우리와 함께 해저터널을 건너주는 모습은 또한 감동이었다.
▲ 필자를 반갑게 맞아준 일본인 할머니 80 전후의 연세를 한 할머니 세 분이 우리와 함께 해저터널을 건너주는 모습은 또한 감동이었다.
ⓒ 김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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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이 할머니들이 우리가 가려는 목적지까지 걸을 줄 알았는데, 해저터널을 건더갔더니 자신들은 다시 시모노세키로 돌아가신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라도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고 성의를 보여주시는 그 할머니들의 정성이 놀라웠다. 그 분들은 시모노세키의 한일교류회 회원들로서 이날 저녁에 예정되어 우리 '생명, 탈핵 실크로드' 순례단을 환영해 주기 위한 행사에도 참석해 주셨다. 일본 할머니들의 환대에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오후에는 이또씨 등 몇 명이 순례단에 합류하여 인원이 늘어났는데, 그 들은 가동 중지된 원전 재가동을 반대하고 있는 깃발을 들고 나왔다.
▲ 고모리역에서 오후에 합류한 순례단 오후에는 이또씨 등 몇 명이 순례단에 합류하여 인원이 늘어났는데, 그 들은 가동 중지된 원전 재가동을 반대하고 있는 깃발을 들고 나왔다.
ⓒ 김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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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생명, 탈핵 실크로드 순례길에 나선 사람들은 역에서 일정을 끝내고 다시 시모노세키로 돌아왔다. 그 까닭은 15일 저녁에 전날 묵었던 시모노세키의 노동회관에서 한일교류회 회원들이 이원영 교수룰 비롯한 '생명, 탈핵 실크로트' 참가자들을 환영하는 한편 친교의 시간을 갖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시모노새끼에 사는 한일교류회 회원들과 한국인 교포 등이 포함된 만찬이었다.
▲ 한일교류회가 베풀어준 환영 만찬 시모노새끼에 사는 한일교류회 회원들과 한국인 교포 등이 포함된 만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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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먹고 싸는 일 외에는 필요하지 않은 존재다'는 말로 인간과 생태계의 관계에 대하여 웃기는 이야기로 좌중을 즐겁게 했다.
▲ 생태 운동에 대하여 열심히 설명하는 븐 '사람은 먹고 싸는 일 외에는 필요하지 않은 존재다'는 말로 인간과 생태계의 관계에 대하여 웃기는 이야기로 좌중을 즐겁게 했다.
ⓒ 김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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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를 마치고 노동회관에 도착했더닌 벌써 많은 분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낮에 해저 터널을 지날 때 만났던 할머니들도 오셨다. 저녁 만찬이 준비되어 있는데, 도시락에 맥주, 소주 등 반주가 곁들인 식사였다. 여느 모임들처럼 이날 모임에서도 각자 자기 소개를 했다. 25명 정도의 한일교류회 일본 분들이 오셨는데, 다들 나이가 지긋한 분들이었다.

그분들 중에는 우리 교포 2세, 3세, 4세도 섞여 있었다. 이 분들 중에는 시모노세키 시의원인 다나까노사미씨라든가, 대학교수, 교사, 목사, 히로시마 원폭 피폭자라는 후미꼬씨 등 사민당 당원 등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있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재일교포 2세인 김씨 성을 가진 분과 교포 4세인 젊은 처자인 최태순씨다. 그런데 소개를 하는 과정에서도 느꼈지만 이 분들 모두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하여 비판적이고,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여 저지른 징용, 징병,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하여 일본이 잘못했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지금 아베 정권이 헌법 개정 운운하거나 자위대를 강화하려고 시도하거나 후쿠시마 이후 중단된 원전 재가동 반대라든가 아베 정권이 우경화하는 것에 대하여 상당히 비판적이고 그를 막아내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분들이라서 정서적으로 아주 많은 교감이 가는 분들이었던 것이다.

서로 인사가 끝나고 이원영 순례단장이 '생명, 탈핵 실크로드'가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고, 어떻게 앞으로 진행될 것인지, 목적은 무엇인지 등에 관해 설명했다. 전반적인 안내가 끝나고, 약간의 질문과 답변이 끝난 다음 대학교수인 찬토키미토씨가 변소(화장실) 얘기를 꺼내서 참가자들이 배꼽을 잡으면서 폭소를 터뜨리기도 하면서 재미있게 들었다.

"미생물(우렁이)가 내친구다. 먹고 싸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말라. 그것만이 가치가 있다. 흙을 만들 때 똥이 도움이 된다. 그외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인간들은 많은 것을 배우는데, 고기 먹고, 우유 마시고, 싸는 것 외에는 아무 가치가 없다. 자연을 오염시키는 것을 자연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방사능 오염도 그렇다. 먹고 싸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말라. 세계 생명헌장에 이런 내용을 꼭 넣어 달라. 일본이나 한국 등은 옛날부터 소중하게 간직하고 사용하였으나 유럽은 그냥 버려왔다."

이윽고 교포4세인 최태순씨가 한국에서 많이 불리는 노래 '아침이슬', '광야에서' 등 가사가 적힌 것을 나눠주고 함께 부르자고 하였다. 좀 어설프게 불렀다. 그래서 내가 한 번 하겠다고 하여 '아침 이슬'을 불렀더니 크게 박수가 터져나왔다.

이렇게 통역을 내세워 정담을 나누고 노래도 하고, 반주도 한 잔씩 나누면서 두 시간 가까이 시간을 보내다가 다들 돌아갔는데, 나는 특별히 재일교포 4세인 최태순씨가 반가워서 일본 소주를 한 잔씩 주고 받고는 우리 일행이 묵어있는 방으로 올라오라고 하여 일행들과 더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시민단체 활동가들 중심으로 우리 일행을 열열하게 환영해 주었다. 저 왼쪽에서 네번째 있는 분이 최태순씨다.
▲ 생명, 탈핵 실크로드 순례단 환영 만찬 시민단체 활동가들 중심으로 우리 일행을 열열하게 환영해 주었다. 저 왼쪽에서 네번째 있는 분이 최태순씨다.
ⓒ 김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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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나누면서 할아버지 고향이 경기도 용인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내 고향은 제주도라고 했더니 자신의 증조할머니가 제주도라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그러면서 증조할머니가 지금도 살아게시는데. 연세가 98세라는 것이다. 순간 우리 큰어머니 생각이 떠올랐다. 내 큰어머니와 큰아버지도 일제 때는 물론이고 그 후에도 일본에서 사시다가 1962년에 고향으로 돌아오셨는데, 그 큰어머니보다 몇 살 어린 분이 최태순씨 할머니가 아닌가? 할머니 고향이 제주도 어디냐고 하였더니 그것까지는 모른단다. 그러면서 할머니는 '서귀포 칠십리'라는 노래를 틈만 나면 부르신다는 것이다.

'서귀포 칠십리'는 남인수라는 대중가수가 불러서 유명한 곡으로 지금도 서귀포 이중섭 문학관 뜰에 가면 그 곡이 스피커에서 애잔하게 흘러나온다. 그래서 내가 그 노래를 주욱 한 번 불렀더니 마구 박수를 치면서 좋아한다. 지금은 그곳 시모노세키에서 초급 한국어 강사도 하고, 가정요리 강사를 하면서 살고 있다고 한다. 나이는 34세인데, 남편도 한국인이란다. 그러니까 증조부터 지금까지 한국인들끼리 결혼을 하여 살아오고 있는 순혈주의 한국인 후예인 것이다. 그러니 더더욱 반가울 수 밖에 없었다.

내 고향 제주도 서귀포에는 내 가까운 친척이나 이웃 분들 중에는 일본에 살고 있는 분들이 많다. 어렸을 때는 이분들이 한 번씩 고향을 방문할 때는 의복이며, 신발, 여러 생활 용품들을 가지고 와서 선물로 줄 때 그게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르던 60년대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그러나 지금은 그 분들이 일본에서 그렇게 넉넉하게만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일본이나 한국에서의 삶의 수준의 차이가 별로 없고, 오히려 지금은 한국에서 더 잘 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교포들이 오히려 한국의 삶을 부러워하기도 하는 것을 종종 보기도 한다.

이렇게 반가운 시간을 보내다가 최태순씨도 집에 자녀들이 있어서 오래 있질 못하고 자리를 떴다. 그런데 '서귀포 칠십리' 노래를 하면서 또 다른 제주 노래 '삼다도 소식'을 불러 주었지만 그 노래는 들어보질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또 다른 제주 민요 한 곡을 불러주려고 했는데, 가사가 잘 떠오르질 않아서 쩔쩔매다가, 최태순씨가 가고 난 다음에 그 곡이 생각이 나서 주고 간 명함의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하여 기어이 전화기로 '너영 나영'이란 제주 민요 한 곡을 불러주고야 말았다.

생명, 탈핵 실크로드 순례길에 잠시 참가하려고 왔다가 내 고향 제주의 후예를 만나니 이 아니 반가울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일제 때 남의 밭 소작을 하면서 어렵게 수확한 보리를 열 여덟가마니를 공출하느라 수레에 싣고 가다 수레가 부러져 우리 할아버지가 작대기 땅을 치면서 '왜놈들' 욕을 했던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떠 올라 그 감상을 포함하여 한 편의 시로 적어 보았다. 

서귀포 칠십리에
-김광철

새벽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에 잠을 깬다
동쪽 관문교 위로 붉은 해가 솟아 오르고
두 땅을 가로 지르는 바다 물줄기에 여명이 드리운다
80년 전 그날도
새벽녘에는 저렇게 금빛 물결이 비쳤겠지

제주 비바리는 돈벌이가 좋다는 소문에
뭣도 모르고 동네 어른들 따라 나선 길이
이렇게 한 평생의 한으로 남아
열네 시간 중노동에 입에 세 끼 풀칠도 버거운 삶일 줄이야
틈만 나면 눈물 지으며 떠올리는 고향 마을
부모님과 형제들은 다 잘들 계실까
하얗게 부서지는 갯바위 밑에 널려있을
모자반이며 소라며 전복, 성게...
그 놀던 갯마을을 그리며 눈물지었겠지
흥얼 거리는 노랫가락 너머로
서귀포 칠십리에 황혼은 져 오고 있었겠지

부모님은 올해도 이 추운 겨울날
쉬지 않고 바다로 나가 모자반을 뜯어 말리고 있으실까
그렇게 등짐으로 져 올려 지은 농사의 절반
보리 열여덟 가마니를 공출로 털어가는 세월에
아버님은 또 절망에 절망을 넘어
분노의 작대기로 땅을 치며 통곡하고 계시나
일본으로 간 딸년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없어도
여덟 식구 하루 하루 먹고 살기 고달픈 날들이
딸년 잊은지도 오래이다

'휘파람도 그리워라 물파래도 그리워'
구십 여덟의 증조 할머니의 더듬거리는 노랫가락
나 태어나 그 곡조 귀에 못이 박혔다만
시작과 끝을 모르는 그 흐느끼는 곡조
그 할머니의 고향 땅을 밟아 본 적도 없건만
그 할머니의 고향 사람을 만나니 그 반가움에 와락
친정 집에 몸져 누운 할머니 생각 밀려온다
청상에 남편 잃고 고생 고생하던 그 할머니
한 잔 걸쳐 거나해진 나그네의 구성진 노랫가락 속에
할머니의 깡마른 모습이 오버랩되어 온다
꿈에도 그리는 칠십리 고향 땅
비록 한 번 밟아보지도 못했다만
'미역 따는 아가씨는 어디로 갔나?"
왈칵 밀려오는 눈물이
시모노세키의 바다로 칠십리 바다를 그려본다

주고 받는 명함 속에 아로새겨진 선조들의 한이
거나한 술기운과 함께 묻어온다
그렇게 잠깐의 만남을 뒤로하고도 부족하여
전화기 넘어로 '너영 나영' 한 곡을 더 읖조리며
당신의 할머니와 이미 저 세상 분이 된지 오래인 나의 할머니를
고향 노래로 엮을 수 있다니
당신과 나는 기어이 우리였다



태그:#시모노세키, #이원영, #교포4세최태순, #생명탈핵실크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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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초등위원장, 환경과생명을지키는전국교사모임 회장을 거쳐 현재 초록교육연대 공돋대표를 9년째 해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의 혁신학교인 서울신은초등학교에서 교사, 어린이, 학부모 초록동아리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속가능한 미래, 초록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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