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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시를 쓸 수 있고, 누구나 시를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인이나 문학인이 되어야 쓰거나 읽는 시가 아니라, 온누리 모든 사람이 저마다 이녁 삶자리에서 하루를 즐거이 열고 닫으면서 누리는 시라고 생각합니다.

기쁠 때는 기쁨을 노래하는 시예요. 슬플 때는 슬픔을 노래하는 시가 되고요. 홀로 고요히 읊는 시가 있고, 여럿이 둘러앉거나 어깨동무하면서 나누는 시가 있어요.

오늘 우리는 '시'라는 이름을 쓰고, 어느 분은 한자로 '詩'라 하며, 어느 분은 영어로 'poem'이라 해요. 이런 여러 이름을 헤아리다가 문득문득 생각해 보곤 해요. 한국말로는 시를 무어라고 하면 좋을까 하고요. 우리는 기쁨이나 슬픔 모두 노래한다고 말하는데, '노래'가 바로 시를 가리키는 한국말이 될 만하지 싶어요.

가락을 붙여서 즐길 적에도 노래입니다. 새가 들려주는 소리도 노래입니다. 누구를 기리거나 받드는 말도 노래예요. 자꾸 되풀이하면서 바라는 목소리도 노래일 테고요. 여기에 우리가 글로 지어서 나누는 이야기도 노래라고 할 만하지 싶어요.

겉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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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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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마음속으로
얼마나 
깊이 들어가야
우리는 그 사람만이 가진
고유색을 볼 수 있을까 (29쪽)

어제보다 더 단단한
마음을 갖고 싶어 (53쪽)

시를 쓸 적에는 신미나라는 이름을 쓰다가, 그림을 그릴 적에는 싱고라는 이름을 쓴다는 분이 빚은 <詩누이>(창비 펴냄)를 읽습니다. 시인과 화가라는 두 가지 일을 한다는 분은 '詩누이'라는 이름을 씁니다. 이른바 '노래누이'란 뜻이로구나 싶어요.

즐거운 삶을 노래합니다. 아픈 삶을 노래합니다. 아스라이 떠오르는 어릴 적 모습을 노래합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부딪히는 모습을 노래합니다.

단단히 여물지 못한 삶을 노래합니다. 단단해지고 싶은 꿈을 노래합니다. 복닥거리던 어릴 적 작은 집을 노래합니다. 언니들과 오래오래 놀고 싶던 지난날을 노래합니다.

식구가 많아서 싫었던 건
밥상 위에서의 눈치 싸움
식구가 많아서 좋았던 건
든든한 내 편이 있었다는 것 (59쪽)

언니는 색종이를 접어 주었다
언니가 나만 빼놓고
친구네 놀러갈까 봐
나는 자꾸만 종이를 접어 달라고 졸랐다 (73쪽)

누구나 노래를 합니다. 잘 부르거나 못 부르는 소리는 없다고 느껴요. 누구나 이녁 삶결대로 노래를 한다고 느껴요. 아프거나 아쉽던 하루는 무엇이 아프거나 아쉬웠는가를 털어놓으려고 노래를 해요. 신나거나 설레는 하루는 무엇이 신나거나 설레었는가를 풀어놓으려고 노래를 합니다.

날마다 한 뼘씩 자라면서 노래를 합니다. 나날이 한 마디씩 크고픈 꿈을 키우면서 노래를 합니다. 밥 한 술을 뜨면서 노래를 해요. 웃음 한 번 지으면서 노래를 하지요. 고단한 동무한테 손을 내밀면서 노래를 하고, 내가 고단할 적에 이웃이 내밀어 주는 손을 잡으면서 노래를 해요.

속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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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나이 때
엄마는 막내를 낳았다
가족사항을 적을 때마다
부끄러웠다
엄마는 일하느라
피부는 밤색으로 그을렸고
언제나 펑퍼짐한 옷만 입었다
언니나 나를 부를 때면
언제나 이름을 헷갈려 했는데 (183쪽)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길을 노래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려는 길을 노래합니다. 지난날 사내가 부엌일이며 집안일에 손을 뗀 바보스럽던 모습을 노래합니다. 지난날 가시내만 부엌일에다가 집안일을 도맡아야 한 터무니없던 모습을 노래합니다. 오늘날 사내하고 가시내가 새로우면서 슬기로운 길로 걷기를 바라는 마음을 노래합니다. 오늘부터 사내랑 가시내 모두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비는 뜻을 노래합니다.

이름난 시인이 남긴 글만 노래하지 않아도 되어요. 시집으로 나온 글만 노래하지 않아도 되어요. 수수한 어머니와 아버지 삶을 노래해 봐요. 투박한 할머니와 할아버지 삶을 노래해 봐요.

문학상을 탄 글이기에 더 노래할 만하지 않아요. 등단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쓴 글이기에 노래를 부를 수 없지 않아요. 우리 곁에 있는 이웃하고 동무가 날마다 복닥이거나 꾸리는 살림살이를 가만히 노래로 불러요. 우리가 저마다 오늘 하루를 맞아들이는 이야기를 노래로 불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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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생은 리모컨을, 저는 뒤집개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묻거나 따지기 이전에
'원래' 그래 왔던 것입니다 (238쪽)

폭력을 우쭐한 것으로
강한 남자의 자랑거리로 포장하지 마세요
폭력은 흔한 거라고 말하지 마세요
처자식을 남자가 평생 먹여살려야 할
무능력한 소유물로 그리지 마세요 (246쪽)

시 한 꼭지를 만화로 풀어내어 보여주는 <詩누이>는 싱고 님 나름대로 시 한 꼭지를 남다르게 읽어내어 나누려고 하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여러 사람이 여러 삶에 맞추어 다 다르게 쓴 글을 놓고서, 싱고 님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하고 그림하고 글을 함께 묶어서 보여주지요. 이러한 그림하고 글에 고양이 한 마리가 살그마니 뒤따릅니다. 시를 너무 무겁게 읽지 않도록 고양이 한 마리가 슬쩍슬쩍 끼어들면서 이야기꽃을 북돋아요.

글씨로 적힌 노래를 그림으로 바꾸어 보는 이야기가 재미있는 <詩누이>일 텐데, 시를 어느 시집에서 따왔는가 하고 책끝에 밝힌 대목을 읽다가 고개를 갸웃해 보았어요. 창비 네이버 블로그에 연재하기도 했고, <詩누이>가 창비에서 낸 책이기는 하지만, 어느 한 군데 출판사에서 낸 시집에 너무 치우쳤구나 싶어요. 창비 시집 19권, 문학과지성사 시집 6권, 문학동네 시집 5권, 민음사 시집 2권, 여기에 이규보와 이병기 시 하나씩, 모두 34가지 시집을 다루는데, 19가지가 한 군데 출판사에서 나온 시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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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럴 만한 이유야 있겠지만, 조금 더 작은 시집을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싶어요. 조금 더 너른 시집과 조금 더 열린 시집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몇 군데 출판사에서 나온 시집을 도드라지게 다룬다고 해서 나쁘지는 않아요. 한 군데 출판사에서 나온 시집으로도 얼마든지 싱그러이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어요. 다만 시를 더 새롭게 읽으면서 더 새롭게 풀어내 보려는 뜻이었다면, 울타리를 좁히지 말고 울타리를 걷어내 보면 어떠했을까 싶습니다.

시는 바쁘게 읽거나 빨리 읽어치울 수 없는 이야기예요. 느긋한 마음으로 느긋하게 읽는 시입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넉넉하게 읽는 시입니다. 따스한 마음으로 따스하게 읽는 시입니다.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사랑스레 읽는 시입니다. <詩누이>를 빚은 싱고 님은 마감 때문에 으레 널을 뛰는 마음이 된다고 밝히는데, 그래서인가요? 이야기를 읽다가 서둘러 마무리한 대목이 눈에 띄는 것은 다소 아쉽습니다.

덧붙이는 글 | <詩누이>(싱고 글·그림 / 창비 펴냄 / 2017.6.12. / 14000원)



詩누이

싱고 지음, 창비(2017)


태그:#詩누이, #만화책, #시읽기, #삶노래, #싱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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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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