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우리 사회의 성 소수자들을 표현하는데 이보다 꼭 맞는 말이 있을까? 홍석천은 바로 그런 사회에 돌을 던진 인물이다. "저는 남자를 사랑합니다"라는 홍석천의 한마디는, 마치 게이는 미국이나 프랑스에만 존재하는 줄 알던 이 땅의 많은 사람을 향한 외침이었다. "여러분, 한국에도 게이가 살아요!"

최근 에세이집 <찬란하게 47년>(스노우폭스)을 낸 홍석천을, 2일 서울 이태원에서 만났다. 책 작업은 50이 되기 전, 인생을 한 번쯤 끊고 새 출발 해야겠다는 의미로 시작했다고. 하지만 책을 쓰며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니 어쩐지 행복했던 순간이 별로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주위에 행복 바이러스 뿌리는 걸 인생의 주요 목표라 여기며 살아온 홍석천이었건만, 정작 자신의 삶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고. 그의 47년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돌이켜보니 난 별로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난 행복을 최우선 가치로 생각하며 산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나는 아니었던 거야. 그건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었던 거예요. 성 정체성 때문에 무시당하고, 차별당했던 과거를 보상받고 싶었던 거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혹은 유일한 게이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찬란하게 47년>을 발표한 방송인 홍석천이 2일 오후 서울 이태원동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찬란하게 47년>을 발표한 방송인 홍석천이 2일 오후 서울 이태원동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대한민국 커밍아웃 연예인 1호. 홍석천의 외침 이후 17년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유일한 커밍아웃 연예인이다. 그래서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게이이자, 어떤 이들에게는 대한민국 유일의 게이다.

"미스코리아도 매해 새로 뽑아 왕관을 물려주는데, 나는 17년 동안 혼자예요. 나 혼자 늙어가는 거지. 왕관의 무게를 견디면서. 그 왕관이 찬란하게 빛나는 왕관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쓴 왕관은 안에 가시가 박혀있잖아. 나 혼자 피 흘리고 아파하고. 사람들은 몰라요. 쟤는 잘살고 있어, 잘 견디고 있어…. 내 안에 곪아있는, 무게에 치여 지쳐있는 나는 없는 거야. 가끔 그게 서운하기도 한데 어쩌겠어. (웃음)"

지난 대선에서 동성애가 화두가 올랐을 때도, 많은 이들이 홍석천의 입만 바라봤다. "동성애를 찬성하느냐"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 질문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답한 후보 시절의 문재인 대통령. 물론 홍 후보의 질문에 군대 내 동성 간 성추행 등이 혼재돼 있었고, 문 대통령은 이어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고 말했지만 성 소수자 커뮤니티는 물론, 여러 진보 성향의 지지자들은 들썩였다. 성 소수자 인권 단체는 문재인 대통령의 기자회견 현장에서 기습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대중은 홍석천의 반응을 궁금해했다.

당시 홍석천은 자신의 SNS에 "대선후보자 토론 방송에서까지 동성애 문제가 이슈화될 정도니 큰 발전이 아닐 수 없다. 과거의 시대보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게 되는 첫걸음이라 생각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그때 해외 촬영 중이었는데, 기습 시위한 단체 대표한테 문자를 보냈어요. 마음으로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잘못된 행동이라는 걸 이야기해주고 싶었거든. 

대선 후보들이 토론회에서 동성애에 관해 이야기했잖아요. 찬성하십니까? 반대하십니까? 난 그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내 입장에선 대선 토론회에서 이 이슈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기쁨이었거든. 모두가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대선 주자들도 자기 입장을 표명해야 할 만한 주요 이슈가 됐다는 거잖아요. 지금까진 '동성애'에 대해 내놓고 이야기하는 분위기조차 아니었는데 큰 발전이라 생각해요. 이런 과정을 통해서 미래에는 더 나아지겠죠. 이런 이야기를 자꾸 나눠야 그 속도가 빨라지지 않겠어요?"

'대표 게이' 홍석천의 무게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찬란하게 47년>을 발표한 방송인 홍석천이 2일 오후 서울 이태원동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저는 남자를 사랑합니다"라는 홍석천의 한마디는, 이 땅의 많은 사람을 향한 외침과도 같았다. "한국에도 게이가 살아요!" ⓒ 이정민


지금까지 쉬쉬해온 성 소수자 이슈가 화두에 오르면서, 어떤 이들은 '호모포비아(동성애 혐오)'적인 발언들을 쏟아내기도 했다. 그간 딱히 동성애 문제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거나, 혹은 언급할 만한 기회가 없었거나. 뭐가 됐든 이전보다 공개적인 혐오 발언들이 늘어났고, 이 발언들은 모두 성 소수자들을 향한 칼날이 됐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과도기라 여긴다 해도, 날아오는 칼날이 아프지 않은 건 아니지 않으냐고 묻자, 홍석천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음…. 개인적으로는 상처받는 게 습관이 됐어요. 굳은살이 박였달까? 상황을 봐야 하잖아요. 이제부터는 우리나라에서 정치하는 분들은 한 번쯤 동성애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보겠죠.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순서가 있잖아요. 우리가 언제부터 성 소수자 인권을 중요하게 여겼어요. 그런 적 없잖아요. 언제나 소수자에 대해 이야기를 했지만, 그 안에 성 소수자는 없었어요. 얼마나 큰 발전이에요. 이건 나뿐만이 아니라, 기습 시위에 참여했던 여러 성 소수자 단체들의 활동 덕분이에요. 걔들이 굉장히 잘해온 덕분에 우리가 사회에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거죠.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지 않아요. 우리 질문에 사회가 '고민해보겠습니다'라는 답을 한 거잖아. (웃음) 전 그것도 승리라고 생각해요."

세상은 그에게 제멋대로 '게이 커뮤니티'의 대표성을 부여하고는, 화살을 쏟아댔다. 화살은 밖에서만 날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홍석천을 향한 기대와 바람은 게이 커뮤니티 내에서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한 개인에 불과한 홍석천에게, 너무 많은 짐이 지워진 건 아닐까?

"내가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하면, 주위에서 '왜 변했어?', '우릴 버리는 거야?'라고 해요. 그럴 땐 얘들까지 내 속마음을 몰라주나 싶어서 서운하기도 하죠. 내 딴엔 할 만큼 했는데, 계속 짐을 지우기만 하면 난 어디 가서 푸나, 망가지지 않고 버티는 것만 해도 힘든데, 싶고…. 그래도 '저거 봐, 호모 새끼', '저것들은 저래' 이런 말이 제일 듣기 싫으니까 이 악물고 버티는 거지.

나도 모르게 지워진 책임이지만, 늘 책임감을 느끼고 좋은 본보기가 되려고 해요. 당연히 받아야 할 화살이려니 하고 자포자기한 거지 뭐. 이게 모범생 출신, 반장 출신의 딜레마라니까. 어쩔 수가 없어. (웃음)" 

미디어가 홍석천을 소비하는 방식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찬란하게 47년>을 발표한 방송인 홍석천이 2일 오후 서울 이태원동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세상은 그에게 제멋대로 '게이 커뮤니티'의 대표성을 부여하고는, 화살을 쏟아댔다. 화살은 밖에서만 날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 이정민


언제부턴가 홍석천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오빠, 가장 위험한 형'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세팅했다. 요리도 잘하고, 고민도 잘 들어주는, 전혀 위험하지 않은 유쾌 발랄한 게이 오빠. <섹스 앤 더 시티> 등 미국 드라마 열풍과 함께 불어 닥친 여성들의 '게이 친구 판타지'와도 꼭 맞았다.

미디어가 '홍석천'을 소비하는 방식도 딱 거기까지였다. 잘생긴 남자만 보면 시도 때도 없이 추파를 날리고, 대시를 받는 상대 남성은 질색하거나 당황하는 식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마찬가지. 그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대개 호들갑스럽게 남자 주인공을 짝사랑하거나, 과장된 리액션으로 여자 주인공의 고민을 들어주는 감초 역할이었다. 배우가 되고 싶어 연예계에 발을 디뎠던 그에게, 이거야말로 가장 가혹한 차별이 아닐까? 더군다나 직접 만난 홍석천은 TV에서처럼 하이톤 목소리도, 과장된 말투도 아니었다.

"방송이 나를 필요로 하는 이미지가 있어요. 나는 방송인이기도 하니까, 요구하는 이미지에 맞춰주는 거죠. 아쉬울 때도 있지만, 내가 연출자나 작가는 아니잖아. 이건 철저한 자본주의 룰에 따르는 거예요. 멋있는 역할은 나 말고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많으니까, 내게 기회가 안 오는 거지. 그건 내가 스스로 내공을 쌓아야 할 몫이죠.

우리 가게에 일주일이면 손님이 천 명 정도 와요. 그 사람들이 나를 보면 놀라. 목소리도 다르고, 말투도 다르니까. 이게 진짜 저고요, 방송은 비즈니스예요~! 보여주는 거지. 투 페이스인 거야. 나는 연기자고, 이렇게 17년을 살아왔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

'이태원 유지' 홍석천의 '경리단 플랜'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찬란하게 47년>을 발표한 방송인 홍석천이 2일 오후 서울 이태원동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홍석천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오빠, 가장 위험한 형'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세팅했다. 미디어가 '홍석천'을 소비하는 방식도 딱 거기까지. 아쉬움은 없었을까? ⓒ 이정민


홍석천은 자칭 타칭 '이태원 유지'다. 위험하고 후미진 동네였던 이태원이, 서울에서 가장 '힙'한 동네가 된 데는 분명 홍석천의 공이 컸다. 이태원 일대에만 11개 매장을 운영 중인 그의 식당에 사람들이 몰리면서, 덩달아 인근 상권까지 살아났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성공한 사업가 아니냐고 묻자, "빚도 자산이니까" 하곤 웃음을 터트렸다.

"가게들이 다 잘되면 남부러울 거 없겠지만, 지난해 정말 어려웠어요. 자영업자들이 문 많이 닫았는데, 나라고 파급이 안 왔겠어요? 잘 되는 매장 수익으로 안 되는 매장 적자를 메우기도 하고, 그나마 나는 방송으로 돈 벌어 채울 수 있으니까 버텼던 거지. 직원이 150명 정도 되는데 월급 주는 것만 해도 얼마예요. 정말 나 상 받아야 해. 이거 다 청년 일자리 창출이잖아. 하하하."

힘들게 여러 매장을 운영하는 이유를 묻자 "하고 싶은 건, 해야 하는 성격이라 그렇다"는 답이 돌아왔다. 동네 발전을 위해서든, 개인적인 꿈을 위해서든, 결국 그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완성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지금 그는 '경리단 플랜'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요즘 경리단길 상권이 한풀 꺾였어요. 근데 내가 이번에 경리단에 들어왔거든. 살려야 하는데 나 혼자서는 못 살리겠는 거야. 그래서 생각한 게 '젊은 친구들하고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 보자, 골목 문화 개선하고 골목 상권 살리자!' 이거예요."

그가 기획한 '경리단 플랜'을 정리하자면, 어딜 가나 먹고 마시는 거 말곤 할 거 없는 서울에서, 놀 거리, 즐길 거리, 볼거리를 엮어 하나의 코스로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경리단길에 도착해 점심을 먹고, 오후 2시부터 바이올린 연주나 미술 전시회가 열리는 커피숍에서 시간을 보낸 뒤, 4시부터는 무용 공연이나 디제잉을 즐기게 해주는 거다. 종일 먹고 놀고 즐길 거리를 만들어주면, 자연히 저녁까지 경리단에서 먹게 되고, 그렇게 되면 동네 상권도 자연히 살아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일종의 원데이 여행 플랜인 셈이다.

"그동안 우리가 수동적으로 손님을 맞았다면, 능동적으로 경리단길에 찾아올 이유를 제시해주는 거죠. 동네 매력 뽐내기랄까? 매달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면서, 이번 달에는 이거, 다음 달에는 저거, 다양하고 재밌는 걸 경험하게 해주는 거죠. 재능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다 보면 뭔가 재밌는 일들이 많이 생기지 않을까요?"

홍석천의 찬란한 47년, 더 찬란할 미래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찬란하게 47년>을 발표한 방송인 홍석천이 2일 오후 서울 이태원동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홍석천은 자신의 머릿속 아이디어들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고 했다. 그의 미래 계획에는 '대한민국 대표 게이'로서의 책임감이 담긴 것도 있었다. ⓒ 이정민


홍석천은 자신의 머릿속 아이디어들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고 했다. 레스토랑 경영과 동네를 가꾸는 일은 그중 일부에 불과하다. 뮤지컬 연출, 시나리오 작가, 영화 제작, 신인 발굴…. 그가 미래 계획에 넣어둔 직업만 해도 이 정도다.

"나는 명함이 없어요. '사장' 이런 거 싫어.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데, 어떤 직업으로 나를 규정짓고 싶지 않거든. 언젠가 명함을 만들게 된다면 '컬처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고 적고 싶어요. 작은 식당 컨설턴트일 수도 있고, 골목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일 수도 있죠. 어떤 작품을 만드는 사람일 수도 있고. 뭐가 됐든 계속 도전하고 싶어요. 늘 도전하는 삶이라 늘 불안하지만 그게 나니까."

그의 미래 계획에는 '대한민국 대표 게이'로서의 책임감이 담긴 것도 있었다.

"게이 청소년들을 위한 성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어요. 안전한 성생활을 위한 교육은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모두에게 중요해요. 하지만 게이 청소년들은 어디 가서 교육받을 데가 없잖아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또 하나는, 자녀가 커밍아웃했을 때, 그 가족이 겪는 충격도 크고,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무조건 배척하거나 방치하는 경우도 있어요. 사실 종종 자녀가 커밍아웃했다면서 어찌할지 몰라 제 식당으로 찾아오시는 분들이 계세요. 성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다 상담을 요청해오는 분들도 있고요. 남들에게 말 못 할 고민을 들어주는 것도 제 역할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기는 하지만, 제가 모든 분을 일일이 챙기는 덴 한계가 있잖아요. 그래서 그런 분들을 위한 상담 센터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고 싶어요."

원한 적 없던 왕관의 무게를, 이렇게 오랜 시간, 이토록 충실히 견디고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어느덧 50을 앞둔 홍석천은 "나이를 믿을 수가 없다, 아직 젊다고 생각하는데 몸이 자꾸 사인을 보낸다"며 웃었다.

"이제부턴 정말 행복하게 살려고요. 행복하게 잘 살 거야. 이건 내 자존심 문제이기도 해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나라는 존재가 생겼는데, 어떤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나락으로 떨어지고 실패하면 안 되잖아? 또, 어린 게이 친구들에게 '열심히 살면 홍석천만큼은 되겠지, 쟤 만큼은 성공할 수 있어!'라는 좋은 롤모델이 되고도 싶고요. 내가 원래 되게 잘 놀았거든? 아직은 더 놀고 싶은데, 이래서 마음껏 못 놀아. 하하하."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찬란하게 47년>을 발표한 방송인 홍석천이 2일 오후 서울 이태원동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찬란하게 47년>을 발표한 방송인 홍석천이 2일 오후 서울 이태원동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홍석천 게이 찬란하게 4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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