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 <바람이 분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인 미야자키 고로. 그는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아버지의 대를 이었다. 그리고 <게드전기: 어스시의 전설>을 작업했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마음으로부터 아버지를 존경했습니다. <바람이 분다>는 제 (마음) 속에서 최고의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입니다." - 미야자키 고로(宮崎吾朗), <바람이 분다> 완성 보고 회견(2013년 6월 24일) 중에서

미야자키 고로는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의 첫째 아들이다. 고로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살갑게 지내지 못했다. 애니메이션 제작으로 항상 바빴던 아버지는 집에 늦게 들어오기 일쑤. 그래서 고로는 아버지의 부재를 아버지의 애니메이션을 시청하면서 매웠다고 한다. 그는 훗날 성장해 아버지가 설립한 일본 굴지의 애니메이션제작소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게드전기: 어스시의 전설>을 내며 2006년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데뷔한다. 비록 평가가 썩 좋지 않았지만, 그림체만큼은 아버지 하야오와 쏙 빼닮았다.

우리에게 미야자키 하야오는 재패니메이션(일본 애니메이션)의 우뚝 솟은 거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웃집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은 대중과 평단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낭만적이고도 유려하게 그려낸 동화 같은 풍경, 젊은 주인공이 위기를 극복하고 사랑을 회복하는 메시지는 참 근사하다. 그런데 미야자키 하야오가 고로와 케이스케라는 두 아들의 아버지란 사실은 좀처럼 주목받지 않는다. 아버지로서의 하야오를 짚어보면 그의 작품이 지닌 뚜렷한 한계가 금세 떠올라 팬들은 고민에 빠지게 될 것.

일본 사회의 한계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한계

일본 사회는 아버지 중심의 가부장적 문화를 중시한다. 또 여성의 사회진출을 억제하며 개인의 일탈을 꺼리는 집단주의도 있다. 이런 분위기는 일제가 1898년 이에(家)제도라는 이름(민법)으로 남성의 가문통솔권을 못 박으면서 더욱 강화됐다. (해당 제도는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도 도입했는데 특정 남성의 아래에 부양가족을 등록해야 했던 옛 '호적'제도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미 1947년 일본에서 법적으로 폐지됐지만, 아직 그 영향은 한국과 일본에서 여전하다) 이에 비춰보면 비로소 드러난다. 70대 후반을 향해가는 일본인 노년 남성 하야오. 그가 두 아들의 아버지이자 미야자키 가문의 일원에 지나지 않는다는 실마리가 말이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2013년 작 <바람이 분다>는 하야오의 유년시절 추억이 잔뜩 묻어나는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지브리 최초의 어른영화'라는 소개가 뒤따랐다. 영화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이자 주인공인 호리코시 지로(堀越二?)의 모습은 하야오와 똑 닮았다. 선 굵은 검은 뿔테안경에 벙거지를 비스듬히 얹은 머리 스타일, 연거푸 담배를 피워대는 애연가, 목표한 바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모습. 그간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알려진 하야오와 판박이다.

제로센의 설계자 호리코시 지로의 젊은 시절을 가공으로 그려낸 <바람이 분다>의 시대상. 하야오는 지로를 통해 당대를 추억하고 기리며 그리워한다. 한국인들은 일제강점기라고 부르는 그 치욕의 시절을 전혀 딴판으로 바라본 셈이다. 하야오는 1941년생으로 일본이 패전할 때 고작 만 4살에 불과했다. 당시를 온전히 떠올릴 수 없는 '아기 시절'이었던 것. 즉 직접 겪지 못한 시절을 왁자지껄하면서도 소박한 정취가 묻어나는 '어른 영화'로 각색한 셈이다.

하야오는 1920년대~1945년의 일본을 무대로 삼은 <바람이 분다>에서 최소 6000명의 재일조선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관동대학살과 일제의 침략 장면을 전혀 그리지 않아 '침략 미화' 논란에 휩싸였다. 그 이유를 살펴보려면 세계 제일의 애니메이션 거장으로서가 아닌 미야자키 가문의 일원인 하야오의 일생을 추적해야 한다.

하야오는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침공으로 본격화된 태평양전쟁(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도쿄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성장했다. 미야자키 가문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의 주력 전투기이자 '가미카제(자살특공대) 전투기'로 알려진 제로센(零戰)의 부품을 조달한 미야자키항공흥학(宮崎航空興?)을 경영했다. 하야오의 큰아버지가 사장, 아버지가 공장장으로 가업이었다. 어린 하야오는 전투기를 늘 가까이 마주했고 군인들도 친숙하게 봐왔다. 그러면서 소년의 감성을 키웠고 성장했다. '밀리터리덕후(밀덕)'이자 '비행기광'인 하야오의 가치관이 형성된 둥지가 바로 미야자키 가문이었다.

그는 침략을 정말 옹호했나

 미야자키 하야오 <바람이 분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바람이 분다>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가, 이후 지브리 스튜디오의 사정이 안 좋아지자 다시 복귀했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그렇다면 침략 미화 논란에 대한 하야오의 발언을 들어보자.

"나는 예를 들면 전투 신이라든가 전쟁 신은 넣지 않았어요. 그건 말이죠.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시리아 등을 보면 전 세계에서 이미 동시다발로 참담한 상황이 일어나고 있으니까. 그걸 보지 않는 사람은 아마 전쟁도 말할 수 없단 겁니다. 현실을 보지 않고 있다는 거니까요. 사막이든 출장 중인 일본이 (군대를) 보내든 차이가 있어도 그런(전쟁) 건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를 통해서 '전쟁을 모두 가르치자'라든가 '역사를 가르치자'라는 생각은 전부 버렸습니다." - 미야자키 하야오, <바람이 분다> 완성 보고 회견(2013년 6월 24일) 중에서

이는 결코 식민 지배를 뼈저리게 겪은 피해자들이 납득할 수 있는 해명이 아니다. 오히려 의문점만 남는다. 현재 일본에서, 하야오 본인이 전쟁 반대와 평화를 호소하는 진보주의자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하야오는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추진하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를 신랄하게 비판해 극우세력으로부터 요주인물로 꼽히기까지 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역사를 가르치자 라는 생각은 전부 버렸다"고 침략을 스스로 '물타기' 한 것이다. 진보를 표방하는 그의 인식이 고작 여기까지이냐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전쟁에 대한 하야오의 모순은 작중에서 이탈리아의 비행기 제작자인 카프로니 백작이 "알겠나 일본의 소년이여? 비행기는 전쟁의 도구도 수단도 아니란다. 비행기는 아름다운 꿈이다. 설계자는 꿈에 형태를 부여하는 존재다."라고 지로에게 말한 부분에서 엿볼 수 있다. 전쟁을 원하지 않지만, 전쟁의 수단이 될 수밖에 없는 비행기(전투기)를 추구하는 지로의 모습은 하야오의 모습과도 딱 맞물려 있다고 봐도 무리는 없으리라.

<바람이 분다>에 대한 의문은 끊이질 않는다. 왜 하필이면 하야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과 추축국을 맺은 이탈리아 출신 인물을 등장시켰을까? 작품에서는 지로와 친교를 나누는 독일인도 아주 비중 있게 다뤄진다.

이 이야기는 영화 속 장면과 대사를 중심으로 살펴볼 다음 편에서 다뤄볼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바람이 분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영화 <바람이 분다>의 국내 개봉 포스터. 스튜디오 지브리가 공개한 <바람이 분다> 홍보 영상 속 소개글에는 "1920년대 일본은 불경기와 가난, 질병 그리고 대재해가 있어 성실히 살아가기에는 괴로운 시대였다"라고 적혀 있었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다음 기사]
③-2 일본 현지에서도 엇갈린 반응, <바람이 분다>에 침략 반성은 없었다
③-3 <바람이 분다>의 '바람'은 우경화의 바람이었나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주권방송>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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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정세, 일본의 동향에 큰 관심을 두며 주시하고 있습니다. 적폐를 깨부수는 민중중심의 가치가 이땅의 통일, 살맛나는 세상을 가능케 하리라 굳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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