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감독을 좋아하세요? 한 편 한 편의 영화로는 알 수 없는 영화감독만의 세계가 있습니다. <오마이스타>는 한 시대를 풍미한 국내외 영화감독들을 집중 조명하고자 합니다. [감독열전]은 시민-상근기자가 함께 쓰는 기획입니다. 관심 있는 여러분의 참여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살아간다면 한 번쯤은 겪는 시기이기에 누구나 잘 안다고 자부하는 걸까. 캐릭터들의 다른 특성이 작품을 대표하는 개성으로 여겨지는 것과는 달리 유독 10대와 20대를 다룬 작품들은 인물들의 연령이 부각되는 경향이 꽤 존재한다. 가령 '청춘 드라마'나 '사춘기 성장담'과 같은 표현들이 대표적이다. 이 같은 수식들이 부착될 때, 그 영화들은 인생 한 시기의 보편적인 경험들을 끄집어 내는 것처럼 여겨지곤 한다. 사실 한 번도 공감이 간 적이 없었다. 70년대에도 90년대에도 학교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지만, 나는 <말죽거리 잔혹사>의 주인공처럼 폭력적인 아드레날린을 분출하며 그것을 해소한 적이 없었다. <스탠 바이 미>는 성장 영화의 고전처럼 여겨지지만 나에겐 그런 근사한 모험의 경험도 동성 또래 집단도 없었다.

말하자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대 보편의 이야기'는 그냥 그 캐릭터들의 이야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각자가 살아가는 방식도, 점한 사회적 위치도 모두 다를진대 연령만을 이유로 그 사람들의 경험을 깔끔하게 묶어 내는 게 가능할리가 있나. 그래서 나는 한동안 '성장', '청춘'과 같은 홍보 문구가 들어간 영화들을 피했다. 공감을 통해 향수를 불러 일으키려는 게 작품의 목적인데 캐릭터에 이입조차 할 수 없으니 소외감만 크게 들었다. 그런 생각만 들었다. 왜 어떤 영화도 교실 한 구석에서 조용히 책장을 넘기지만 속은 갑갑함으로 무너져가는 남자 아이에게 카메라를 비추지 않을까. 가족들과 화기애애한 식사를 마치곤 욕실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손목을 긋는 아이는 왜 등장하지 않을까. 이유 모를 불안감에 갑자기 눈물을 왈칵 터트리는 감정을 왜 말하지 않을까.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한 장면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15살, 처음 만난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영화

그러던 15살의 여름, 나는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만났다. 당시에 나는 호러 영화광이었지만, 집과 학교만을 오가며 답답함을 느끼던 때에 낯선 도시를 유랑하는 예고편 속 스칼렛 요한슨의 모습은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특히나 환한 미소로 도쿄를 종횡무진하는 그녀의 모습에는 나도 20대가 되면 얻지 않을까 싶었던 해방감이 가득했고 아무런 불안함도 없어 보였다. 물론 막상 뚜껑을 열어본 영화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드라마틱한 부침도 갈등도 없는 이야기는 나른하기 짝이 없었고 캐릭터들은 코미디를 하고 농담도 던지지만 피로와 막연한 불안정함에 짓눌려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첫인상은 맥빠지고 지루한 영화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끝까지 이 영화를 감상하고 이후에도 반복적으로 찾으며 이해해 보고자 한 것은 작품에 등장한 한 장면 때문이었다. 사진 작가인 남편을 따라 도쿄에 온 샬롯은 어느날 아침 며칠 동안 일 때문에 호텔을 떠나는 그를 배웅한다. 그녀는 남편에게 자신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만 그는 장비들을 챙기느라 바빠 그 말을 귓등으로 듣는다. 이어서 샬롯은 미국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불투명한 자신의 미래가 주는 불안과 동시에 너무도 분주한 남편을 보며 느끼는 소외와 공허를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하다가 눈물을 터트린다. 영화를 이해할 수 없음에도 샬롯의 감정, 그녀의 일상이 전달하는 느낌만큼은 너무도 정확하게 와닿았다. 드디어 나도 '그게 뭔지 알 것같다'고 말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나게 된 것이다.

 <처녀 자살 소동>의 주인공인 리즈번가의 자매들

<처녀 자살 소동>의 주인공인 리즈번가의 자매들 ⓒ Paramount Classics


코폴라 감독이 그리는 불안과 공허

따돌림과 폭력으로 점철된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지난 후 나의 인생은 그랬다. 그 전까지의 고통이 마치 커다란 바위가 되어 나를 짓누르는 것과 같았다면, 고등학교 시절에는 마치 그것에 압도되기 보다는 커다란 수조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느낌이었다. 우울이 짐승처럼 나를 덮치는 것이 아니라 해파리처럼 둥둥 떠다니다가 몸에 철썩 들러붙는 기분. 안 괜찮은 건 아닌데 그렇다고 괜찮은 것도 아닌 상황. 그 와중에 일상은 단조롭게 반복되고 나도 어느 정도는 발을 맞춰 그것을 살아가는 상태. 생각해보면 코폴라 감독의 영화들은 모두 그런 무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폐쇄적이고 안온하지만 불안과 공허함의 기류로 살짝 적시어진 그런 곳.

가령 <처녀 자살 소동>은 미국의 보수적인 중산층 가정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속의 다섯 자매들은 일탈을 꿈꾸고 이로 인한 부모와의 대립은 자살 충동으로 이어진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배경이 되는 도쿄에서 주인공인 샬롯은 그 도시에 스며들지 못한 채 방황하고 헤매는데 자신의 인생에서도 역시나 그러하다. <블링 링> 속 비버리 힐즈의 10대들 또한 비슷한 이유로 절도에 빠진다. 어찌보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코폴라 감독의 영화 중 가장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이 영화는 그런 요소들 보다는 어린 나이에 자신에게 부여된 막중한 책임 앞에서 피로함과 도피의 욕구를 느끼는 10대 소녀 마리의 감정을 그리는데 더욱 집중한다.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의 한 장면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의 한 장면 ⓒ 소니픽처스코리아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진 영화의 공백

사실 소피아 코폴라 영화에 등장하는 자살, 절도, 엄청난 사치와 같은 사건들은 쉬이 우리가 사는 일상과 공존하기 어려운 것으로 간주되곤 한다. 그래서인지 비슷한 요소가 등장하는 영화들은 인과가 될 강력한 계기들을 제시하곤 한다. 가령 자살에는 그만한 우울이나 고통이 절도에는 빈곤이나 캐릭터의 강한 욕망이 동기로 등장한다. 하지만 코폴라 감독의 영화에는 그러한 것들이 없다. 죽음, 범죄 그리고 여타의 일탈들은 꼭 그것들이 행해져야만 할 이유가 없이 툭툭 등장하고, 사태가 발생한 원인은 막연하게 추측할 수 있을 정도로만 암시된다.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서사적 공백으로 파악하고 비판하기도 한다. 솔직히 코폴라 감독이 이야기를 촘촘하게 직조하는 스타일의 연출자는 아니기도 하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 그 공백은 무척이나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특히나 지난 시간을 돌아 보았을 때 더욱 그랬다. 10대의 나는 언제든 돌아갈 집도 있고 가족도 있었으며 만족할 만큼은 아니지만 학교에서 어느 정도의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대학도 꿈꾸던 서울로 왔고 풍족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별다른 어려움이 있는건 아니었던 학생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나는 죽음을 생각하거나 심지어 시도까지 한 적도 있었다. 누구도 나를 가두지 않았지만 10대의 나는 사실상 유배 상태였고 권태와 답답함에 무너져버릴 지경이었다. 20대 초반의 나는 독립했지만 할 줄 아는 것도 별로 없었고 그래서 할 수 있는게 없었다. 해방은 헛된 약속이었고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 했으며 불안은 늘 방 한 구석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새벽에 홀로 술을 마시다 엉엉 우는 나를 보았다면 아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연출 중인 소피아 코폴라 감독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연출 중인 소피아 코폴라 감독 ⓒ CJ엔터테인먼트


비밀스런 친구 같았던 그녀의 영화들

소피아 코폴라는 영화 속에 이러한 정서를 옮기며 그 삶들을 드라마틱하게 극대화 하기 보다는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전달한다. 그래서 그녀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누군가에겐 도통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이입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로 탄생한다. 어쩌면 이는 코폴라 감독의 성장 배경이 녹아든 결과물일 지도 모른다. 익히 알려져 있듯 그녀의 아버지는 <대부>로 거장이라는 칭송을 받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였으며 나머지의 가족들 역시도 영화계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었다. 소피아 코폴라 역시도 그런 가족들과 같은 길을 걷고자 했지만 배우로 시작한 그녀의 커리어는 결국에는 완벽하게 망가졌으며 처음 쓴 각본도 혹독한 악평에 직면했다. 사람들은 그런 코폴라를 조롱했고 이후 감독으로 성공적인 데뷔를 하기까지 그녀는 기나긴 방황의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소피아 코폴라는 잘 살았으면 살았지 못 살진 않았다. 하지만 그런 스스로의 삶이 괜찮게 느껴졌을까를 질문한다면 '글쎄'라는 대답이 떠오른다. 끔찍한 비극도 없지만 역동적인 환희도 없는 질식할 듯한 고루함 속에서 의문과 불안이 교차하는 인생.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 할리우드 로얄 패밀리라는 위치가 족쇄이자 감옥처럼 느껴졌던 그녀의 삶이 그렇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인생은 코폴라의 것이자 그녀의 영화 속 주인공들의 것이었고 또한 나의 것이기도 했다. 나는 자살을 꿈꾸던 리스본 가의 다섯 자매였던 시절을 지나, 원하지도 않게 어른의 세계에 툭 떨어진 마리로 살았고 올라갈 또 다른 인생의 커튼 앞에서 혼란에 빠진 샬롯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또 다른 인생의 한 시기로 넘어가는 중이다.

그래서 일까, 내게 있어 소피아 코폴라의 영화들은 마치 서로를 너무도 잘 알아 그저 눈빛 만으로도 상대방이 어떤 상태인지 알아챌 수 있는 비밀스런 친구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그녀의 작품들이 이해할 수 없는 소녀들의 세계를 그리고 있으며 그래서 <처녀 자살 소동>에 등장한 의사처럼 '넌 인생의 끔찍함을 알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말을 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이에 대한 세실리아의 대사를 인용하며 글을 마치고 싶다.

"확실한 건 선생님이 13살의 여자 아이가 되어본 적은 없다는 거죠."

소피아 코폴라 마리 앙투아네트 처녀 자살 소동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