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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가장 시급한 현안 중 일부는 현재의 체계나 정책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사회 곳곳에서 크고 작은 변화들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국가가 우리 사회의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줄 수 있다고 믿는 건 무리다. 위의 말마따나 국가는 지금껏 사회가 가장 절실히 해결을 바라는 문제들에서조차 때때로 한계를 드러내왔기 때문이다. 이른바 '사회혁신(Social Innovation)'이 세계적으로 관심을 끄는 이유다. '사회혁신'은 시민 스스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혁신적 해법으로 사회의 여러 난제를 풀어가려는 흐름을 가리킨다.

문재인 정부도 이런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청와대에 시민사회수석을 신설하고 하승창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앉힌 것은 '사회혁신'에 대한 새 정부의 기대를 드러낸다. 앞으로 문재인 정부가 우리나라의 사회혁신 생태계 조성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해나갈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일이다.

이런 가운데 서울시(서울혁신파크)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2017 사회혁신×리빙랩 프로젝트' 공모를 벌여 모두 11개의 사회혁신 프로젝트를 뽑았다. 11개 팀에는 각각 3,000만 원에서 5천만 원씩, 총 5억 원이 지원된다(참고 - [2016 리빙랩 프로젝트] '내가 바꾸는 서울 100일의 실험' 보고서).

이제 막 채비를 마치고 6개월간의 사회혁신 실험에 나선 프로젝트들을 소개한다.

'공유'로 골목길 풍경 바꾸고, 드론으로 쪽방촌 정보 모으고

우리네 흔한 골목 풍경. 사람보다는 차가 먼저다.
 우리네 흔한 골목 풍경. 사람보다는 차가 먼저다.
ⓒ 독산4동행복주차주민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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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좁은 골목길에선 차도 사람 걸음만큼 느리게 다닐 순 없을까

주택가 골목길에 거주자우선주차제도가 도입된 지 20년이 지났다. 그 사이 늘어난 차들은 집 앞 골목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을 모조리 밀어내고 골목길을 걸어 다니기조차 불안한 공간으로 만들어버렸다. 게다가 다툼과 사고도 끊이지 않는다. 보다 못한 주민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금천구 독산4동 주민들은 지난해 9월부터 시흥대로 126길에 자리한 거주자우선주차구역 14곳을 이웃끼리 공유하는 '행복주차골목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해 의미 있는 결실을 거뒀다. 올해는 금천구로부터 주차관리의 행정권한을 넘겨받으면서 지난해보다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올해 새롭게 꾸려진 '2023 독산행복골목위원회'는 골목길만의 규약을 만들어 공유주차 공간을 골목 안 연립주택 주차장까지 확대하기로 했다. 공유주차 공간이 늘어나는 만큼 주민들이 느끼는 변화도 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골목 곳곳에 흉물처럼 자리한 헌옷 수거함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물건공유상자(커뮤니티박스)'를 마련할 계획이다. 상자에 모인 물건은 마을SNS, 어플리케이션 그리고 골목 벼룩시장을 거쳐 필요한 이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또 골목에서만큼은 차들도 사람이 걷는 속도(시속 5km)로 움직이도록 해볼 계획도 가지고 있다. 이들은 2023년이면 차가 사라진 골목에 사람 냄새가 가득하길 꿈꾼다.

#2. 드론으로 쪽방촌 곳곳의 정보를 찾아내 지도를 만들면 어떨까

개포동 무허가 판자촌을 가리키는 '구룡마을'은 서울의 쪽방촌 가운데서도 가장 열악한 곳이다. 지난 3월에는 휴대용 난로에서 일어난 불이 옮겨 붙으면서 순식간에 29가구가 잿더미로 변한 곳이기도 하다. 나무나 비닐로 얼기설기 지어진 작은 집들이 아슬아슬하게 붙어있어 언제 또 비슷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엔젤스윙'은 쪽방촌에 드론(무인항공기)을 띄워 얻은 고해상도의 사진으로 정밀지도를 만들겠다고 나섰다. 바닥에 떨어진 동전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또렷한 사진에 3D 입체 정보까지 더해진 지도다. 여기에 지역 주민을 비롯해 구청과 소방서, 봉사단체 등 사용자들의 필요를 담아내기 위해 집단지성으로 더 많은 정보를 모아낼 생각이다. 이른바 '크라우드 맵핑(Crowd Mapping)'이다. 소방차가 다닐 수 있는 길과 없는 길, 비상소화장치함과 CCTV 자리, 연탄이나 도시락을 전해주기 좋은 길, 가로등이 있는 곳과 망가진 곳, 쓰레기가 버려져 악취가 심한 곳, 넘어져 다치기 쉬운 길 등 모을 수 있는 정보를 모두 지도에 담는 게 이들의 목표다.

또 하나, 몇 년 뒤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 모를 이곳 쪽방촌의 기록을 남기는 것도 이들에겐 중요한 일이다. 앞으로 이들이 한 장 한 장 쌓아갈 구룡마을 지도는 곧 서울의 역사로 남을 것이다.

시각장애인도 볼 수 있는 그림책과 이주외국인을 위한 법률 플랫폼

▲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미술관(Belvedere Museum)에 전시된 구스타프 클림트의 명작 '키스' 옆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3D 작품이 나란히 놓여있다. 유럽연합의 'AMBAVis'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지난해 10월에 제작되었다.
 ▲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미술관(Belvedere Museum)에 전시된 구스타프 클림트의 명작 '키스' 옆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3D 작품이 나란히 놓여있다. 유럽연합의 'AMBAVis'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지난해 10월에 제작되었다.
ⓒ 3DPRIN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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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각장애인도 마음껏 그림을 볼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다

눈에 보이는 시각 정보를 글에 온전히 담아내긴 어렵다. 갈수록 다양한 시각 정보들이 늘어가는 시대에 점자에 기대야 하는 시각장애인들이 느끼는 소외감은 클 수밖에 없다. 누릴 수 있는 정보가 적으면 그만큼 기회도 줄어든다. 점자를 읽듯 손으로 그림을 느낄 수 있는 '촉각 그림책'이 있기는 하지만 그 수와 종류가 턱없이 적다.

'MAGNETIC5'는 시각장애인들이 더 많은 시각 정보를 자유롭게 볼 수 있도록 더 좋은 '촉각 그림책'을 만들려고 한다. 활판인쇄, 마블링, 실크스크린, 고전 사진술 등 여러 인쇄 기법에 더해 3D 프린터처럼 새로운 기술을 적용하고, 여러 질감을 드러낼 수 있는 소재도 찾아 나설 생각이다.

2013년부터 시각장애를 가진 아이들과 함께 책을 만들고 '글그림 만지기'를 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섬유 작가와 가죽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스토리텔러 등 여러 예술 작가들의 힘을 빌려 지금까지 나온 그 어떤 책보다도 나은 그림책을 만들어내겠다는 게 이들의 포부다.

#4. 이주 외국인도 한국 법률을 자기 나라말로 볼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우리나라에 사는 외국인은 200만 명에 달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이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지 않다. 한국 사회의 이방인이자 약자인 이들은 직장이나 가정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기 일쑤지만 마땅히 받아야 할 법의 보살핌조차 받지 못하는 일이 많다. 언어가 달라 법에 기댈 수 없는 탓이다.  

'라임프렌즈'는 변호사와 통역인, 번역가 그리고 IT 개발자들이 뜻을 모아 외국인에게 꼭 필요한 법률을 외국어로 번역해 제공하는 웹 플랫폼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출입국관리법, 다문화가족지원법, 외국인근로자의고용등에관한법률, 국적법 등 모두 18개의 법률과 시행령, 시행규칙을 중국어, 베트남어, 인도네시아어를 비롯해 13개 언어로 번역하는 게 이들의 목표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노동위원회)과 이주민통번역센터, 이주희망노동센터를 비롯한 20여 개의 시민사회단체들이 힘을 보태기로 했다. 외국인 스스로 번역에 참여할 수 있는 길도 열어둘 생각이다.

'카고 바이크'로 새로운 도시 문화 열고, 헌옷에서 실 뽑아 새 옷 짓고

덴마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카고바이크'
 덴마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카고바이크'
ⓒ 서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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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자동차만큼 공간이 넉넉한 자전거로 새로운 도시 생활의 가능성을 열다

어린 자녀를 집에서 멀지 않은 유치원에 데려다 줄 때, 장을 보러 동네 시장이나 마트에 갈 때 번잡한 도로에 차를 몰고 나가는 일이 썩 내키지 않지만 달리 도리가 없다. 아직 어린 자녀를 태우거나 장바구니를 싣기에 자전거는 너무 작고 불안한 탓이다.

'하자센터'는 자동차만큼 큰 짐과 사람을 거뜬히 싣고 태울 수 있는 자전거를 만들어 자동차에 단단히 묶여있는 도시 생활에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내려 한다. 이들이 만들려는 자전거는 이른바 '카고 바이크(Cargo Bike, 짐 자전거)'다.

1970년대 덴마크에서 처음 만들어져 유럽에선 제법 많이 쓰이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도로 조건이나 생활 방식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찾아보기 어렵다. '하자센터'는 서울이라는 도시 환경과 시민의 삶에 어울리는 자전거를 시민, 특히 엄마들과 함께 만들고 이를 타보도록 함으로써 더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이들은 지난 5년간 '자전거공방'을 운영하며 장애 청소년을 위한 '텐덤 바이크(2인용 자전거)'를 비롯해 다양한 자전거를 손수 개발해본 경험에 더해 카이스트 공학팀과 전문 자전거 디자이너와의 협업으로 누구든 타고 싶어 할 만큼 멋진 자전거를 만들어낼 계획이다.

#6. 버려진 옷에서 실 뽑아내 새로운 옷을 짓다

해마다 버려지는 옷이 수만 톤에 달한다. 게다가 헌옷 수거함으로 버려지는 옷은 기대와 달리 가난한 이웃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서울에만 1만 3000개에 달하는 수거함에 모인 헌옷들은 대부분 다른 나라로 팔려 나가며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사업자의 배를 불릴 뿐이다.

'123컬렉터'는 버려지는 옷에서 실을 뽑아내 옷이나 러그(깔개)를 비롯한 새로운 직물을 지어보겠다며 나섰다. '시민 Re-weaving(재직조)'으로 헌옷을 되살리는 순환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포부다. 가정에서 손쉽게 실을 뽑고 천을 짤 수 있게 직조기를 비롯한 도구를 개발하고, 뜻 있는 시민을 모아 방한복, 러그, 목도리, 무릎담요, 포대기 등을 만들 수 있도록 천 짜는 법과 디자인 하는 법을 가르칠 계획이다.

헌옷을 모으는 일에는 '아름다운가게'가 함께 하기로 했고, '코오롱 FnC'는 시장에서도 통할만한 디자인을 갖추도록 하는 데에 힘을 보태기로 했다. 헌옷을 수거해 새롭게 만든 직물을 시장에 되파는 데까지 순환 생태계가 조성되면 새로운 일자리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으로 '123컬렉터'는 기대하고 있다.

이밖에도 ▲ 흡연자와 비흡연자의 공존을 위한 서비스 디자인 실험(어라운디), ▲ 지역화폐를 매개로 한 공동체 은행 건립 실험(마포공동체경제네트워크 모아), ▲ 재건축 앞둔 둔촌 주공아파트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 실험(마을에숨어), ▲ 시민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연결하는 '음악 활동 플랫폼' 구축 실험(고구마교육음악연구소), ▲ 서울혁신파크의 여러 자원을 활용한 '작은 결혼식' 실험(세눈컴퍼니) 등도 6개월간의 도전에 나섰다.

이제 막 첫발을 뗀 이들 11개 프로젝트가 부디 서울을 조금 더 나은 도시로 만들어가길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 * R. Murray, J. Caulier-Grice, & G. Mulgan. (2010), “The Open Book of Social Innovation”, p. 3.



태그:#리빙랩, #사회혁신, #서울혁신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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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2월 전라북도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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