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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2학년 때 서울에서 동화 속 왕자님처럼 생긴 아이가 전학을 왔다. 나는 당시 여수에서 살았는데, 근처에 대규모 공업단지가 있어서 대도시에서 아버지 직장을 따라 전학 오는 얘들이 많았다. 진현이라는 그 아이도 그렇게 우리 학교로 왔다.

당시 현지 아이들과는 다른 '고퀄' 외모에 귀티 나는 서울 말씨, 흡사 <캔디>라는 만화영화 속 '안소니' 같았다. 전학 온 첫날, 담임 선생님은 그 아이를 내 옆에 앉혀 주셨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 그 아이가 내 옆에 앉았다는 사실은 똑똑히 기억한다. 그때 나는 처음 가슴이 두근거리고 뭔가 찌릿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 느낌이 사랑이었을까?

5학년이 되었을 때 나와 반이 달랐던 그 아이는 나를 보러 우리 반으로 왔다. 영문을 모르고 어정쩡하게 복도에 나가 서있는 내게 그 아이는 다시 서울로 전학 간다며 손에 뭔가를 쥐여줬다. 매미 모양의 장난감이었다. 난 다른 애들이 볼까봐 아무 말 못하고 서둘러 교실로 돌아왔다.

때는 장마철이었는데 비를 쫄딱 맞으며 집에 왔던 기억. 입맛도 없고 기운도 없고 뭔가 슬픔 비슷한 것이 날 압도했던 기억이 있다. 3년 동안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이라고는 그 아이생일에 초대되어 한 번 간 적이 있는 게 다였는데. 그날 그 아이 집 정원에서 메뚜기를 잡고 놀고 있을 때 한 마리도 못 잡은 내게 메뚜기를 쥐여주던 기억. 그런데 나는 그 아이가 떠나고 슬펐다. 이런 느낌이 사랑이었을까?

대학을 들어가서는 1학년 초부터 졸업할 무렵까지 심한 스토킹을 당했다.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그때 교문 앞 게시판에는 매일 대자보가 여러 개 붙어있었다. 그 중에 나를 향한 대자보가 일주일에 한번은 붙었다.

전교생이 내 얼굴은 몰라도 이름은 알 정도였으니. 나와 다른 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그 아이는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으면서 내 행동 하나하나를 적어 게시판에 붙이는 걸로 시작해서, 집 앞이나 강의실 앞에서 기다리는 걸로 진화했다. 그러더니, 만나주지 않는다며 내 앞에서 자해를 했다. 당시에는 스토킹이란 말도 없었고 그저 "남자가 여자를 너무 사랑해서 생긴 일" 쯤으로 여겼다. 그 아이가 군대에 가고 우리 집이 이사하면서 스토킹은 끝이 났다. 그 아이도 이 끔직한 행동을 사랑이라고 생각했을까?

직장생활 2년차에 친한 언니 결혼식에 갔다가 한 남자를 만났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많았던 그는 나보다 6살이 많았는데, 당시 내가 경험하지 못한 신세계를 보여줬다. 주말마다 페러글라이딩이나 승마, 수상스키 등등 온갖 레저 활동에 날 데려갔고 같이 있는 게 즐거웠다. 새로운 활동을 하고 새로운 장소에 가보고 모든 게 신기했다. 그렇게 6개월 만에 그가 내게 프로포즈를 하던 날, 나는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때까지 결혼을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그는 내게 "자기는 나이가 있어서 결혼을 빨리 하고 싶다"며 결혼 아니면 이별, 양자택일을 주문했다. 나는 이별을 택했다. 그는 나를 사랑하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떠난다며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섰고 나도 마음이 아팠지만 그를 잡진 않았다.

열렬한 연애 끝에 결혼한 내 친구는 어느 겨울 저녁. 맨발에 슬리퍼도 짝짝이로 신고 우리 집에 달려왔다. 남편이 다른 여자가 생겼다며 "정말 미안하지만 이혼해 달라"며 무릎을 꿇었다고 했다. 결혼한 지 7년만이다. 친구는 분노에 몸을 떨었고, 커피를 타주던 내 손도 같이 분노에 떨었다. 친구는 "누구 좋으라고 이혼 해주냐"며 이혼 대신 자기의 마음을 위로해줄 다른 남자를 만났다. 하지만 그 남자도 유부남. 새로운 남자를 만나 위로받아 좋은 마음과 죄책감사이에서 눈동자가 흔들리는 친구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지난한 시간이 지나서야 친구는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친구도, 그 남편도 너덜너덜해졌다.

이후에도 주변에 많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지켜봤고 내게도 수차례 더 지나갔다.  사랑 앞에서는 사람들의 감정은 극과 극으로 평등해 지는 것 같다. 사랑 때문에 어느 공주님은 북을 찢었고, 젊은 베르테르는 자기 머리에 권총을 당겼으며, 모딜리아니를 잃은 잔느는 만삭의 몸으로 6층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또 사랑은 바보 온달을  장군으로 만들었고 베를리오즈는 사랑을 얻기 위해 '환상 교향곡'을 썼다.

사람들은 말한다. 이것은 사랑이고, 저것은 사랑이 아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하니까 아프다 등등. 사랑은 사람들의 숫자만큼 다른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때때로 사랑을 통해 나의 바닥을 확인하기도 하고 반대로 내가 가진 최고의 모습을 보게도 된다. 사랑과 이별을 반복할수록 소심해지고 작아지는 사람도 있고 성숙해지고 넓어지는 사람도 있다.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차이 일까?

직장생활 6년차 되던 해.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를 만났다. 당시 이 남자를 만나 귀에서 종소리가 울린다던지, 운명 같은 걸 예감 했다던지 그런 건 없었다.  사회생활에 지쳐있었고 "이제 결혼해서 편히(?) 살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뭘 몰라도 한참 모른 생각이지만. 그렇게 두 아들을 낳고 20년을 살았다.

이런 저런 사랑을 통해 나는 "내 안에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의 질과 양이 결정되어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내가 가진 그릇만큼 사랑이 담기고 그 그릇만큼의 사랑을 상대에게도 내밀 수 있는 것 같다.

꽃이 언젠가 지듯이 사랑에도 생로병사가 있어 끝이 나기 마련. 하지만 매서운 비바람 속에서도 열매를 맺는 꽃이 있듯이, 또 그 열매 중에서 터질 듯 무르익는 열매가 반드시 남듯이, 우리의 사랑도 그 끝이 파멸이 아닌 성숙이길 바라본다.

성숙에 이르는 사유
▲ 사색하는 여인 성숙에 이르는 사유
ⓒ 문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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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사랑, #성숙, #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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