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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기념물 57호인 '영일 우각리 향나무'는 임진왜란 의병장 이의온이 직접 심은 것으로 수령 400년 이상을 자랑한다. 이의온은 이언적의 손자이다.
 경상북도 기념물 57호인 '영일 우각리 향나무'는 임진왜란 의병장 이의온이 직접 심은 것으로 수령 400년 이상을 자랑한다. 이의온은 이언적의 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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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월포 해수욕장과 서포항 IC를 잇는 930번 지방도로의 중간쯤에 '영일 우각리 향나무 경상북도 기념물 57호'라는 이정표가 서 있다. 경북 포항 신광면 우각리 113 오의정(五宜亭) 경내에 위치한 이 향나무는 높이 21m, 수령 400년을 자랑하며, 여주이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문화재청 공식 명칭이 '영일 우각리 향나무'인 이 나무는 "오의정 이의온(李宜溫, 1577∼1645)이 오의정을 세우고 손수 심은" 것이라고 현지 안내판에 설명 돼있다.

"이의온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참가하여 전공을 세우고 군자감 직장을 제수받았으며, 귀향하여 오의정을 세웠다. (중략) 이 향나무는 수령이 오래된 희귀한 수종이므로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조선조 성리학자인 이의온은 정여창, 김굉필, 이황, 조광조와 더불어 오현(五賢)으로 꼽히는 이언적(李彦迪, (1491∼1554)의 손자이다.

부친상 기간 빼곤 줄곧 전투하며 살아온 이의온

이 건물의 이름 오의정은 이의온의 호이다.
 이 건물의 이름 오의정은 이의온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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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이의온은 우리 나이로 16세에 지나지 않았다. 이의온은 그해 6월 넷째 형 이의잠과 함께 선도산 전투에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1593년 부친상을 당하여 시묘살이한 기간을 제외하고 전란 기간을 줄곧 전투에 참가했다.

1596년의 팔공산 회맹과 1597년의 화왕산 회맹에도 형 이의잠과 함께 했다. 1597년 중에는 병으로 거동할 수 없는 맏형 이의윤을 대신하여 군량감봉유사 직책을 맡아 군사들의 식량을 조달하기도 했다(이의윤은 그해 34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1598년 이후에는 이순신 휘하에 들어 활동했다. 이의온이 통제사의 참모로 일하게 된 것은 1597년 10월 11일 이순신이 경주부윤 박의장 등 주요 지방 수령들에게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추천해달라고 요청한 데 따른 결과였다. 박의장은 이의온과 김득복(金得福)을 추천했고, 이의온과 김득복은 경주부윤이 준 기병 20명, 활 쏘는 군사 20명, 보병 25명을 데리고 한산도로 출발했다.

이의온이 충무공에게 건의한 정책 중 오늘까지 널리 알려진 가장 대표적인 것은 해로통행첩(海路通行帖)에 관한 내용이다. 해로통행첩은 바닷길을 다닐 수 있는 허가 증명이다. 이 통행 허가증 관련 내용은 임진왜란을 중심으로 1587년부터 1607년까지의 나랏일을 기술한 저자 미상의 역사서 <선묘 중흥지>에 나온다.

<선묘 중흥지>의 해당 부분을 현대문으로 번안하면 다음과 같다.

"이순신이 보화도(고하도)에 주둔하게 되었을 때 군사가 1000여 명에 이르렀다. 군량 부족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은 바닷길을 다닐 수 있는 통행첩(통행 허가증)을 만든 다음 '이 통행첩이 없는 배는 간첩으로 간주하여 처벌한다'고 선포했다.

피란선들이 모두 와서 통행첩을 받았다. 이순신은 배의 크기에 따라 적당한 쌀을 받은 다음 통행첩을 주었다. 그결과 불과 열흘 사이에 쌀 1만여 섬이 생겼다.

이번에는 군사들이 옷이 없어서 걱정이었다. 이순신은 피란을 온 백성들에게 '너희들은 왜 여기까지 따라 왔느냐'고 물었다. 백성들은 모두 '사또를 믿고 왔습니다'고 대답하였다.

'날씨가 춥고 바람이 사나워 군사들의 손가락이 얼어붙어 빠지고 있다. 이래서야 어떻게 군사들이 적과 싸울 수 있겠느냐. 너희들은 남는 옷이 있을 텐데 왜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이순신의 말을 들은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의복을 가져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이순신은 사람을 모아 구리와 쇠를 실어와 대포를 만들고, 나무를 베어와 배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이순신을 도와 모든 것을 다 마련했다."

경주 양동마을의 수졸당은 이의온의 형 이의잠의 고택이다. 수졸당은 동생 이의온과 함께 임진왜란 의병 활동을 했던 이의잠의 호이기도 하다. 사진은 양동마을문화관의 전시 모형을 촬영한 것이다.
 경주 양동마을의 수졸당은 이의온의 형 이의잠의 고택이다. 수졸당은 동생 이의온과 함께 임진왜란 의병 활동을 했던 이의잠의 호이기도 하다. 사진은 양동마을문화관의 전시 모형을 촬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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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온의 문집 <오의정집(五宜亭集)>에는 임진왜란 초기부터 정유재란 때까지 자신과 가족이 겪은 일을 적은 '용사일록(龍蛇日錄)'이 실려 있다. 이 기록에 들어 있는 편지 '상숙계이형(上叔季二兄)'은 그가 넷째 형 이의잠에게 보낸 것이다.

"안부는 물을 겨를이 없습니다. 나라의 일이 이토록 어지러울 때 임금께서 피란길을 떠나셨으니, 조그마한 지혜와 재능뿐인 시골의 선비들도 공을 도모하고, 나라에 충성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아온 우리 집에서 비록 제가 재주는 없으나 외람되게 원수(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에게 발탁되었으니 어찌 죽음을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

위의 편지 내용에서 결의가 확인되듯이, 이의온은 죽음을 불사하고 이순신을 도왔다. 1598년 10월 2일 그는 실제로 죽음 직전까지 갔다. 왜적이 순청왜성 앞 유도(현 송도)에 침범했을 때 이의온은 앞장서서 적에 맞서 싸웠다.

이의온 구하려 입으로 독 빨아들인 이순신

수졸당 입구의 정취
 수졸당 입구의 정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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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 역대 인물 종합 정보 시스템'은 이의온과 관련해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였고 행실이 올바르고 곧았다"라며 "널리 책을 읽어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더불어 무예를 익혔다"라고 증언한다. 무술에 능했기 때문에 맨 앞에 서서 적과 전투를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전쟁 당시 왜군들은 그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난전 중에 왜적이 쏜 독화살이 이의온의 왼쪽 어깨에 박혔다. 그가 죽어간다는 소식이 급히 이순신에 전달되었다. 이순신은 부하를 시켜 이의온의 왼쪽 어깨에 박힌 화살을 뽑아낸 다음 직접 입을 대고 독을 빨아내었다. 덕분에 이의온은 살아날 수 있었다.

한국 역대 인물 종합 정보 시스템에 따르면, 이순신은 전에도 이의온의 인물됨과 실력을 매우 귀중하게 여겨 조정에 보고했고, 이의온은 군자감 직장(軍資監直長)으로 제수 되었다. 이순신은 또 박의장에게 서신을 보내 사람을 잘 판단해 자신에게 소개해준 것을 치하하였다.

이렇게 서로 존경하고 아끼는 사이였으니 이의온이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록 제가 재주는 없으나 외람되이 원수 이순신에게 발탁되었으니 어찌 죽음을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결의를 밝혔던 것이다.  

오의정에 들어서면 향나무의 짙은 향기가 온몸을 감싼다. 오죽 하면 향기의 '향'을 나무 이름으로 썼을까! 이순신과 이의온의 향기로운 삶의 체취에 젖어 내 마음도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엔 경주 양동마을로 가서 이의잠 고택 수졸당도 보고, 여강이씨 종택 무첨당(이의온의 맏형 이의윤의 호)도 답사해야겠다.

여강이씨 종택인 무첨당 건물. 무첨당은 이언적의 맏손자 이의윤의 호이다. 이의윤은 34세의 나이로 1597년에 요절(병사)했다. 병 든 맏형 대신 이의온이 군량미 조달의 책임을 맡기도 했다.
 여강이씨 종택인 무첨당 건물. 무첨당은 이언적의 맏손자 이의윤의 호이다. 이의윤은 34세의 나이로 1597년에 요절(병사)했다. 병 든 맏형 대신 이의온이 군량미 조달의 책임을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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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오의정, #이의온, #이의잠, #이의윤,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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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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