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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거의 20년 전에 신영복 선생님의 <더불어 숲>(신영복의 세계여행)을 처음 접했습니다.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문명과 사람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따뜻한 글과 그림엽서. 20대 초반의 대학생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는데 큰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이며 그 감동으로 막연하게 세계 일주에 대한 꿈도 품게 됐습니다. 인생의 반환점에 이르렀다고 생각되는 2017년, 배낭여행자가 되어 그 꿈을 실행에 옮깁니다. 당신이 보낸 첫 번째 엽서에 적혀있던 '언젠가 나는 당신의 답장을 읽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문구에 무모한 용기를 얻어 여행지에서 편지를 띄웁니다. 이 여행기는 당신 그리고 또 다른 수많은 당신들과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 기자 말

하얼빈역 1번 플랫폼에 설치된 펜스 사이로 본 안중근 의사 의거지점.  역사 신축공사로 인해 역사적인 장소는 이미 사라져 있었습니다.
 하얼빈역 1번 플랫폼에 설치된 펜스 사이로 본 안중근 의사 의거지점. 역사 신축공사로 인해 역사적인 장소는 이미 사라져 있었습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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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러~"

역무원의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뉘앙스로 보아 그 뜻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역사적 장소.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역 1번 플랫폼. 

1번 플랫폼은 존재했지만, 의거 지점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하얼빈역으로 가기 전에 온라인 포털사이트 검색해봤습니다. 2013년에 문을 연 안중근 기념관이 역사 신축공사로 휴관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의거 지점 자체가 사라졌다는 정보는 어디에서도 접하지 못했기에 무척이나 당혹스러웠습니다. 

포털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안중근 의사의 저격 지점과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졌던 자리를 표시한 사진을 역무원에게 보여주며 재차 물었습니다. 역무원은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펜스 사이를 보여주며 '저 위치였다. 이제는 없어졌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허탈한 마음으로 공사장 펜스 사이를 바라봤습니다. 남의 나라에서 오래된 기차역을 다시 짓겠다는데 그것을 가지고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헤이룽장성 당국에서 안중근 의사 기념관도 원래 위치에 2배로 확장해서 다시 개관하겠다고 했다니 그 말에 아쉬움을 달랠 수도 있겠습니다. 

유럽 기차여행 꿈꿨던 청년 안중근

그러나 해방 70년이 넘도록 안중근 의사의 유해조차 모시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의거 지점 바닥 타일이 그냥 평범한 콘크리트 덩어리일 뿐인지, 중국인들이 생각하듯이 우리도 그렇게 평범하게 생각해도 되는 것인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중국이 하얼빈 의거 지점을 어떤 형태로 조성해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우리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이런 무심하고 무감한 역사 인식 속에서, 혹여 우리가 원하는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안중근 기념관이 들어선다고 한들 무슨 할 말이 있을지 내심 우려가 되기도 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 오전 7시에 도착해 '늙은 도적'을 기다리는 두어 시간 동안, 살아온 수십 년의 세월이 수천 번 머릿속을 스쳐 갔을 것입니다. 다방에서 마시는 차는 무슨 맛이고 무슨 향인지도 느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걸어가는 순간 러시아 의장대의 음악 소리가 들리기나 했겠습니까. 직접 얼굴을 본 적도 없이 오로지 신문에 실린 흐릿한 흑백사진 하나에 의지하여 감(感)으로 적을 찾는 그 발걸음은 수만 근의 무게였을 것입니다.

방아쇠를 당기던 찰나, '제발 총탄이 적의 심장을 관통하기를…'이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장남을 신부로 키워달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가 말입니다.

이제는 100년도 더 세월이 흘러 그날의 흔적은 모두 사라진 1번 플랫폼이지만, 상상만으로도 전율이 일어났습니다. 

"꼬레아 우라! 꼬레아 우라! 꼬레아 우라!" 

모든 것을 걸고 모든 것을 감내한 식민지 청년의 의로운 용기와 한 맺힌 외침에 가슴이 먹먹합니다.

지금이나 당시나 하얼빈역은 만주 지역 교통의 요지입니다. 역에는 수많은 철길이 교차하고 있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파리와 이탈리아 여행을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던 평범한 서른한 살의 안중근. 사냥과 술, 사람을 좋아하던 호방한 사내는 마음먹기에 따라 유럽으로 향하는 열차를 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열차는 여기가 마지막이었습니다.

안중근의 마지막 전장, 여순감옥

여순감옥 수감 당시 안중근 의사가 머물렀던 독방
 여순감옥 수감 당시 안중근 의사가 머물렀던 독방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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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의병 참모 중장 안중근의 첫 번째 전장이 하얼빈역이었다면, 여순 감옥은 두 번째 전장이었습니다.

법정투쟁의 요체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이유가 개인적 원한에서 비롯된 사사로운 행동이 아니라, 동양평화를 농락하는 야심가에 대한 독립전쟁 일환의 응징이었음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재판 과정 내내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 15가지를 논리적으로 열거하며 시종일관 일본 측 재판부와 검찰을 압도했습니다. 그리고 일제에 의해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재판의 부당함을 설파하며, 만국공법에 따라 전쟁포로로 자신의 신병을 처리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후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대로입니다. 사형선고, 의로운 행동이니 일제에 항소하지 말고 떳떳하게 죽음을 맞이하라는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 항소 포기의 대가로 약속받은 <동양평화론> 집필 시간, 그러나 이 약속마저 어긴 일제의 빠른 형 집행, 순국. 

재판 과정은 물론이요, 죽음을 앞둔 순간까지도 품위를 잃지 않았던 모습에 일본인 간수들이 경외심을 느낄 정도로, 그는 '영웅'이라는 찬사가 조금도 아깝지 않을 만큼 고결한 모습으로 그렇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여순 감옥은 주로 만주와 몽골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한국인, 중국인, 몽골인 항일투사들이 갇혔던 장소입니다. 감옥의 위치가 위치이다 보니 투옥됐던 사들 중 당연히 중국인들의 숫자가 많았습니다.

안중근 의사 순국장소. 형이 집행되었던 자리와 건물은 안중근 의사 특별전시실로 꾸며져, 방문객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안중근 의사 순국장소. 형이 집행되었던 자리와 건물은 안중근 의사 특별전시실로 꾸며져, 방문객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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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안중근 의사가 머물렀던 독방과 순국 장소, 기념실을 특별히 마련하고 설명해놓을 정도로 안중근 의사의 위상은 대단했습니다. 특히나 쑨원, 저우언라이 등 중국의 여러 지도자가 그의 의거를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했는지, 그것과 관련한 글과 헌사를 상세히 전시해놓은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중국에서도 이렇게 평가하고 기리는데, 한국에서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폄하하는 일부 학자와 누리꾼들이 '애국 보수'라는 이름으로 드러내놓고 활동하는 작태가 한심하고 부끄럽기 그지없었습니다.

아무리 달려도 산이 보이지 않는 넓은 땅, 미국이나 러시아에서 보았을 법한 풍경. 연길을 향해 가는 열차의 창밖 정경에 여기가 그렇게 노래로만 불렀던 만주벌판이요, 광야임을 깨달았습니다. 오랜 시간 분단이라는 섬에 갇혀 있던 잃어버린 우리의 '대륙성'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중국 버스에서 한국어 안내방송을 듣다

비암산 일송정에서 바라본 용정 시내와 해란강
 비암산 일송정에서 바라본 용정 시내와 해란강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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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하반기에 개통됐다는 고속열차의 도착역은 연길서역. 역내에서 흘러나오는 한국어 안내방송과 큼지막한 한글 안내판에서 연변 조선족 자치주 위상을 마주했습니다. 자치주는 해당 자치 민족의 언어가 중국어보다 먼저 표기되는 것이 법으로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이는 세계 여느 대도시에 존재하는 코리아타운과는 성격 자체가 다른 것이었습니다. 시내버스에서도 다음 정거장을 알리는 한국어 방송이 들리고, 간도 억양으로 대화하는 할머니들의 모습에서 흡사 한국의 지방 소도시에 와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연길 시내를 걸으면 한족의 숫자가 월등히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죄다 돈 벌러 한국 가거나, 다른 도시로 떠나갔지. 우리 때만 해도 민족적인 정체성이 있는데, 점점 갈수록 그런 거 찾아보기 힘들지요." 

50대가 훌쩍 넘은 조선족 민박집 사장님의 걱정처럼, 연변 자치주에서 조선족 동포의 비율은 이제 30%대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구한말에 먹고 살기 위해 강을 건너 농토를 개척했던 조선인들의 피와 땀이 어린 땅, 망국의 한을 안고 강을 건너 독립의 꿈을 품고 풍찬노숙하던 선각자와 투사들의 땅. 간도는 그렇게 현실적인 지금의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민족시인' 윤동주가 태어난 그 곳

오른쪽 기와집이 윤동주 생가.  산세 좋은 이곳 명동마을에서 윤동주는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자랐습니다.
 오른쪽 기와집이 윤동주 생가. 산세 좋은 이곳 명동마을에서 윤동주는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자랐습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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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윤동주의 흔적은 연길에서 차로 30~40분 떨어진 용정 곳곳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생가가 있는 명동마을, 그가 공부했던 은진학교 옛터(현 한족 학교), 윤동주와 간도 독립운동사의 유산을 잘 기념하고 있는 대성학교(현 용정중학교), 고종사촌이자 평생의 벗이었던 '청년문사' 송몽규와 함께 누워있던 묘지….

일송정에서 바라보는 용정의 전경과 명동마을의 풍경은 너무나 익숙한 우리 산천이었습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용정이 가졌던 지역의 성격과 분위기가 어린 동주에게 미쳤던 영향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윤동주 시에 흐르는 민족적 정서와 서정적인 표현, 깊은 고뇌에서 얻어진 인간 본연에 대한 진실한 성찰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한국인의 가슴을 울리고 있습니다.

법 없이도 살 사람, 온화하고 내성이었던 윤동주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버티고 버티다가 일본 유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창씨개명이었지만, 못내 그것이 마음에 걸렸던지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 내얼골이 남어 있는 것은 /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 이다지도 욕될가…'라고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를 '참회록'으로 남겼던 사람입니다.

총칼을 든 투사는 아니었지만, 우리의 말과 글을 통한 민족독립에 의지를 냈던 사람입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될 당시 진술서에서 일본 유학의 동기를 '조선독립을 위해 자신이 민족문화를 연구하려면 전문학교 정도의 문학연구로서는 부족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밝히기도 했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하던 이 순수한 청년은 생전에 자기 이름 새겨진 시집 하나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이국땅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의 대상이 돼 정체 모를 주사를 맞고 떠나갔습니다.

윤동주의 시신을 찾으러 갔던 그의 부친에게 일본인 간수는 그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눈을 감았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스물아홉! 날개 한 번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어가며 토해내었을 그 한(恨)의 깊이를 감히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개인의 팔자, 민족과 무관할 수 없어"라던 신영복 선생

윤동주 생가 안에 세워져 있는 '서시' 시비(詩碑)
 윤동주 생가 안에 세워져 있는 '서시' 시비(詩碑)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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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일생이 정직한가 정직하지 않은가를 준별하는 기준은 그 사람의 일생에 담겨 있는 시대의 양(量)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대의 아픔을 비켜 간 삶을 정직한 삶이라고 할 수 없으며 더구나 민족의 고통을 역이용하여 자신을 높여 간 삶을 정직하다고 할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개인의 팔자는 민족의 팔자와 결코 무관할 수 없습니다. (중략)

진실을 밝힌다는 것은 자기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며, 나아가 우리 사회와 민족의 운명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읽어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을 소중하게 여기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의 현재를 정직하게 바라보게 할 뿐 아니라 진실은 과거를 청산하고 동시에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일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진실의 발견이 미래의 참된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운명과 민족의 운명. 안중근 의사와 윤동주 시인을 찾아가는 내내 당신(신영복 선생)의 이 글귀가 떠올랐습니다. 

안중근을 만나러 가는 길은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독립의 꿈을 안고 산화한 수많은 독립투사를 만나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우리의 기억에 강렬히 남아있는 큰 이유는 그 거사가 통쾌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패 혹은 불발된 의거는 일제강점기 내내 셀 수 없이 많이 있었습니다. 성공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지사들의 의로운 마음이 안중근 의사와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윤동주 시인을 만나러 가는 길은 수많은 식민지 청년 지식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윤동주는 기적적으로 사후에나마 작품들이 세상에 알려져 '민족시인'이라는 명예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암울했던 시절, 시대의 모순을 기꺼이 껴안고 윤동주와 같은 길을 걷다가 끝내 꽃을 피우지 못한 채 어딘가에 묻혔을 아까운 청춘들의 꿈을 생각해봅니다.

'영웅'과 '민족시인'이라는 화려한 찬사 이면에서 시대의 아픔에 비켜서지 않았던 안중근과 윤동주의 삶을 마주합니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두 사람.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그들을 불러내야 합니다. 그들의 삶을 다시 읽는 것은 다른 시대 다른 공간에서 살다간 또 다른 안중근, 윤동주를 만나는 일이며, 오늘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만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 현재 세계일주 인문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태그:#안중근, #윤동주, #하얼빈역, #용정, #여순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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