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악녀>의 포스터. 올해 열린 제70회 칸영화제 미드나잇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되기도 했다.

영화 <악녀>의 포스터. 올해 열린 제70회 칸영화제 미드나잇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되기도 했다. ⓒ NEW


영화는 현란하고 신선한 액션 신으로 시작한다. 주인의 시각에서 펼쳐지는 살육에 가까운 대결 장면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잔인한 장면임이 분명하지만,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동시에 도대체 그의 사연을 궁금케 한다.

그 의문은 쉬이 풀리지 않는다. 거의 자살 테러에 가까운 살육을 벌였던 주인공은 알고 보니 여자였다. 그녀는 거구의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건물 밖으로 무사히 빠져나오지만, 그녀를 기다린 건 포위망을 좁힌 경찰이었다. 그렇게 국가기관이 그녀를 접수해 생명을 담보로 그녀에게 봉사할 것을 제안한다. 숙희(김옥빈)는 그렇게 삶을 유지한다.

비극적 순애보

영화는 대단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앞서 말한 1인칭 액션과 함께 영화는 숙희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그녀가 무술의 고수로 성장한 배경을 설명한다. 훈련 과정에서부터 적과의 대결 과정에서 단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 준비된 킬러로서 키워지는데 전적으로 이는 중상(신하균 분)의 가르침 덕이다. 숙희의 과거에서 중상은 사랑의 대상이었다. 현재는 킬러지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틋함이 있는 것. 결국 <악녀>의 외연은 액션이지만, 실제 영화를 끌어 가는건 숙희라는 여성의 비극적 순애보이다. 그게 단지 아버지와 중상, 딸, 현수(성준)로 대상이 바뀔 뿐이다.

하지만 현란한 도입부와 이런 순애보적 요소에도 중상(신하균)과의 관계나 결말은 씁쓸한 맛을 남긴다. 순진한 연변 처녀 숙희가 아버지의 죽음을 품고 복수극에 자신을 내던졌고, 그건 다시 사랑하는 이의 복수로 이어졌다. 숙희의 순애보와 모성을 이용하는 국가기관은 철저히 냉혹하다. 과연 숙희는 존재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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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이 된 여성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기꺼이 살육의 기계가 된 여성. 그런 그가 엄마라는 존재로 살고 또 다시 사랑의 이름으로 파멸한다. 어쩌면 인간 숙희로 사고하고 자각하며 살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과거 산업화 시대 우리 여성들이 누군가의 딸, 아내, 어머니로 불렸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도입부는 숙희를 대상적 존재로 보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게임에서 흔하게 접했던 시점이다. 게임이기에 상대방을 죽이고 피를 내는 것에 참여자들은 무감각하다. 숙희 역시 마찬가지다. 그 숱한 사람들을 죽이는데 일말의 감정 흔들림이 없다. 마치 임무 수행을 마친 캐릭터가 생명을 다하듯 자신을 접었던 그녀는 아이를 통해, 새로운 사랑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하지만 거기엔 킬러로서의 삶에 대한 반성은 없다.

숙희만이 아니다. 매력적이지만 역시나 국가 기관의 수동적 수행자 역할을 넘어서지 못한 권숙(김서형 분)이나, 단선적 캐릭터로 쓰인 김선(조은지 분)과 민주(손은지 분) 역시 안타깝다. 영화는 여성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이 캐릭터들의 사고는 편평하다. 반면 남성은 사고하며 복잡한 속내를 가진 입체적 인물로 그린다.

그런 면에서 의심스럽다. 숙희는 이 사회에서 이방인처럼 대우받는 연변 출신 중 하나다. 영화에서 그 지역성을 숙희라는 전근대적 여성상을 설명하는 도구로 쓴 건 아닐까.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그렇게 아버지를, 사랑하는 이를, 아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여성 캐릭터를 개연성 있게 끌어낼 수 없으니 말이다. 이건 또 하나의 오리엔탈리즘이 아닐까.

연변 주먹이었던 중상은 순진한 숙희를 이용하고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승승장구하며, 딸마저 제거해 버리는 자존적 범죄자로 묘사된다. 이를 보면 같은 연변 출신이지만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결론에 이르렀다. <악녀>가 여성에 대해 안일한 시각을 갖고 있다는 증거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악녀>는 오히려 전근대적인 여성 잔혹사에 가깝다. 차라리 진정한 '악녀'이고, 자기 파멸을 다루려했다면 중상은 물론, 국가기관에 대한 보다 처절한 응징을 하는 게 낫지 않았을지. 복수를 매개로 했지만 살인 기계가 되어버린 자신에 대한 그녀만의 입장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끝까지 숙희는 배신당한 사랑으로 몸부림치다 끝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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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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