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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놈과 미친놈은 써도 되지만 잡년과 미친년은 안 됩니다."

영상번역 강의를 할 때 표현 순화에 대해 설명하면서 자주 예로 드는 말이다. 케이블로 방송되는 미드는 방송 심의 규정상 심한 욕설이나 비속어, 은어를 자막에 사용해선 안 된다. 아이들을 포함해 불특정다수가 TV를 시청하기 때문에,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보다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다. 내 설명을 듣고 간혹 '남녀차별' 아니냐는 반응이 돌아온다. 정말 그럴까?

<그런 여자는 없다>
 <그런 여자는 없다>
ⓒ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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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년'이 들어간 표현은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지 궁금해하던 중 게릴라걸스가 쓴 <그런 여자는 없다>를 만났다. 게릴라걸스는 뉴욕에서 결성된 페미니스트 행동주의 그룹으로 1985년부터 30년 넘게 익명으로 활동했다. 주로 고릴라 가면을 쓰고 공공장소에서 성차별 반대 시위를 벌인다.

게릴라걸스는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력을 약화시키고자 이 책을 썼다고 서론에서 분명하게 밝혔다. 더 나아가 부정적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안하겠다고 천명했다.

이들은 우선 '파파걸, 말괄량이, 이웃집 소녀, 팜므 파탈, 잡년, 노처녀' 등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여성 혐오가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언어의 실체부터 파헤친다.

"고정관념과 언어는 마치 탯줄로 이어진 산모와 아이처럼, 대중문화 안에서 잉태되어 일상의 은어나 속어들 속에서 탄생한다. 오늘날 가장 활발한 고정관념의 창시자는 바로 영화나 텔레비전, 음악, 신문, 잡지와 같은 미디어다." (p.16)

영상번역가가 직업인 만큼, 나는 영어권 영화와 미드를 자주 접한다. 극중에서 'bitch'나 'slut'이란 표현을 만나면 어떻게 번역할지 고민하느라 멈칫한다. 대체로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표현은 '잡년'이나 '걸레'. 거침없고 헤픈 여자를 가리키는 이 표현들을 나는 대체 어디서 배운 걸까. 부모님이나 학교 선생님이 가르쳐 줬을 리는 없지 않은가.

결국, 그동안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각인된 것이다. <그런 여자는 없다>를 읽으며 여성 혐오가 반영된 표현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걸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더 소름이 돋는 건, 그 많은 표현을 내가 거의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몸에 배서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왜 그런 표현들이 생겨났는지 의문을 가져 본 적도 없다. 그저, 번역가로서 심의 규정에 어긋나지 않고 한글 자막에 사용할 수 있을지 여부만을 따졌다.

문란하게 여러 남자와 관계를 맺는 여성 캐릭터를 보면 '걸레'라는 표현이 떠올랐지만, 남성 캐릭터를 보고는 '걸레'라는 표현을 떠올린 적이 없다.

'니 에미랑 떡이나 쳐(터키)', '엄마랑 붙어먹는 새끼(미국)'처럼 각 나라마다 엄마를 비하하는 욕설들이 있다. 한국이나 중국 같은 아시아권 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 영화에서도 이런 류의 욕설을 자주 듣는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니 애비랑 떡이나 쳐', '아빠랑 붙어먹는 년'이란 표현은 들은 기억이 없다.

<그런 여자는 없다>를 보면 미디어가 어떻게 여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주입시키고 확산시키는지 잘 알 수 있다. 자신도 모르게 미디어에 세뇌된 대중은 고정관념에 자신을 투영하고 고정관념화된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여자들이 천성적으로 수학에 약하다는 믿음은 오랫동안 과학 분야에 진출하는 여성들의 숫자를 크게 제한하는 효과를 낳았다고 한다.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려면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언어부터 다시 살펴야 한다. 특히, 미디어가 새로운 고정관념을 만들어 내고 확산하지 않는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다시 '잡년'의 번역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미드에서 'son of the bitch'를 만나면 '잡년의 새끼(창녀의 자식)'라고 번역할 수 없다. '개자식'으로 순화(?)한다. 남녀차별적인 발상 때문이 아니다. '년/여'가 들어간 표현들이 대부분 남자를 가리키는 비속어보다 '훨씬 더' 부정적인 의미가 짙고 비하와 혐오 수위가 높기 때문이다.

최근에 이슈화가 된 신조어 '맘충'은 공공장소에서 몰지각한 행동을 하는 일부 엄마를 가리키는 의미에서, 남편이 출근한 시간에 카페에 나가 커피를 마시는 엄마까지 비난하는 의미로 확장됐다. 노키즈존 문제까지 불거지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보편화된 신조어지만 맘충 역시 자막에 써선 안 된다. 이 역시 여성 혐오 표현이기 때문이다.

번역을 하다 보면, 상황에 따라 유행어나 신조어를 사용해 보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튀는 표현으로 재미를 배가시키겠다는 욕심을 부리다 보면 선을 넘어설 위험이 높다. 여성 캐릭터의 몸매만을 보고 '뚱녀', '베이글녀'처럼 원문에도 없는 표현으로 번역한다거나 하는 일은 경계하려고 한다.

직장 동료인데 아무 이유 없이 여자만 남자에게 존대를 하게 설정하면, 관객이나 시청자가 지적하기도 한다. 이제는 대중이 미디어에 녹아든 남녀차별주의를 자각하고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다. 번역가도 맥락과 상관없는 남녀차별적 표현은 피하도록 자기 검열을 해야 한다. 미드 자막을 통해 잘못된 고정관념이 전파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일조하는 셈이니, 자부심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다만, 미드 자막에는 엄격하게 심의 규정을 적용하는 반면, 예능 프로에는 다소 느슨한 기준을 적용한다는 점이 아쉽다. KBS Joy의 <차트를 달리는 남자>에서는 '현대판 신데렐라'라는 주제로 신분 상승한 여성들 이야기를 하며, 영국의 왕세손비 케이트 미들턴을 가리켜 '취직이 아닌 취집'을 원했다는 식으로 화면 자막을 넣기도 했다.

앞으로도 미디어를 통해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시키는 표현들이 끊임없이 전파될 것이다. 무기력하게 세뇌당하지 않으려면 계속 의문을 갖고 문제 제기를 해야 한다. 혹은, 게릴라걸스가 아래에 제안한 것처럼 고정관념을 뒤집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만약 세상이 야심찬 여성, 거침없는 여성, 내 섹슈얼리티의 주인은 나라고 말하는 여성을 잡년이라고 부른다면, 기꺼이 잡년임을 인정하고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스스로 '잡년'임을 자처한다면, 그 말은 비하의 의미가 될 수 없다."(p.82)

미디어가 만들어낸 여자에 대한 고정관념들
▲ <그런 여자는 없다> 표지 미디어가 만들어낸 여자에 대한 고정관념들
ⓒ 함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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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여자는 없다 - 국민여동생에서 페미나치까지

게릴라걸스 지음, 우효경 옮김, 후마니타스(2017)


태그:#그런여자는없다, #게릴라걸스,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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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하며 글 쓰며 세상과 소통하는 영상번역가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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