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는 영화 <옥자>의 스틸 이미지.

관객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는 영화 <옥자>의 스틸 이미지. ⓒ 넷플릭스


전 세계로 배급되는 500억대 예산의 할리우드 영화에 강원도 산골에서 살아가는 할아버지와 손녀가 등장한다. 그들의 행색도, 사는 집도 일절 꾸밈이 없다. 정말 강원도 깊은 골짜기에 가면 있을 것 같은 다 쓰러져가는 집과 살림살이다. 영화 제목도 한국적인 이름 '옥자'여서 더 호기심을 끌었다.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봉준호의 신작은 강원도 산골에 사는 14살 소녀와 그의 반려동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울 만큼 자신감이 넘친다.

이것은 감독 자신이 밝혔듯 사람과 동물 사이의 교감 혹은 유대감이 문화와 국경을 넘어서는 친근하고 공감 가는 소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영화는 다국적 거대 기업의 음모와 이를 막으려는 동물보호단체를 등장시키는 등 할리우드 관객에도 좀 더 어필할 만한 점을 가미했다. 또 전 세계의 가축 수를 폭발적으로 늘게 한 공장식 축산업과 유전자 변형 먹거리가 인류의 미래에 드리운 재앙의 그림자도 경고하고 있다.

봉준호의 힘

깊은 산골에서 할아버지 희봉(변희봉)과 단둘이 사는 미자(안서현)에겐 옥자(목소리 연기 이정은)가 유일한 친구다. 옥자는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슈퍼돼지'인데, 어느 날 미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온다. 10년 동안 옥자의 사육을 맡겼던 이들인데 옥자를 뉴욕의 슈퍼돼지 콘테스트 무대에 올리고자 온 것이다. 영화는 이때부터 영민하고 당찬 미자가 똑똑한 돼지 옥자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분투를 그린다.

영화는 서사의 힘이 가장 중요하고, 장소와 배우가 서사를 구현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봉준호 감독은 장소와 배우 연기를 중요시하는 감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간의 작품을 보면 장소 선택에서 남다른 개성을 보여줬고, 서사 속에도 풍부한 통찰을 담으면서 한국 영화의 '밝은 미래'로 주목받았다.

<옥자>에도 신(Scene)마다 다양한 로케이션이 눈길을 잡아끈다. 영화 <괴물>을 연상시키는 지하상가 장면, 모두 올라가는 혼잡한 계단에서 혼자 내려가는 미자를 통해 서울에 도착했음을 효과적으로 알리는 부감 숏(Shot), 옥자를 실은 차를 미자가 쫓아가면서 보이는 서울 시내 풍경, 흥분한 옥자가 날뛰는 터널 장면 등은 봉준호 감독의 재능과 개성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감독은 미장센에도 공을 많이 들였다. 그는 자신도 영화를 찍을 때 "핵심 이미지(Master Image)의 구현이 가장 중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이것은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주도적, 결정적 이미지이며 "유전자 정보를 담은 하나의 세포에 비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영화 포스터를 떠올리면 그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봉준호는 어떤 특정한 주제를 전달하고 싶은 욕구에서 이야기를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문득 떠오른 이미지 같은 사소한 아이디어로부터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그가 한강 교각을 기어오르는 괴생물체를 보고 영화 <괴물>의 스토리를 떠올리고, 문득 관광버스에서 춤추는 아줌마들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고 <마더>를 구상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봉준호의 힘이 느껴지는 작품 <옥자>. 하지만 군데군데 아쉬움이 남는다.

봉준호의 힘이 느껴지는 작품 <옥자>. 하지만 군데군데 아쉬움이 남는다. ⓒ 넷플릭스


<옥자>의 아쉬움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면 <옥자>에도 그럴 법한 미장센이 있다. 영화 후반에 등장하는 도살장과 가공공장 장면이다. 런던 교외의 버려진 발전소와 그 위에 띄운 거대한 돼지 풍선을 담은 핑크 플로이드의 <애니멀즈> 앨범 재킷이 떠오르기도 하고, 지난 세기의 악몽이었던 유대인 절멸 수용소가 떠오르기도 한다. 어느 것이건 어떤 영화에서도 쉽게 볼 수 없었던 독창적인 미장센으로, 이 영화가 '단 하나의 이미지에서 출발했다면' 바로 이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준다.

축산업의 양면성과 딜레마, 유전자 변형 먹거리가 넘쳐나는 시대에 대한 통찰, 인간과 공존하고 교감하는 동물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메시지도 인상 깊다. 미국에서 온 동물 보호 활동가들이 타협 불가능한 세계와 싸우는 이상주의자로 그려진 모습도 동물 보호의 역사가 짧은 국내 관객에겐 낯설면서도 신선하다. 봉준호의 장기인 영상과 음악의 모순된 매치와 이를 통한 '아이러니'의 극대화도 여러 군데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옥자>는 서사도, 인물도 다소 전형적인 것이 흠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할리우드 영화의 전형적인 이야기 전개 구조를 충실히 따르고 있고, 캐릭터도 다면적인 묘사가 부족하다. 미란도 자매(틸다 스윈튼)가 아버지 콤플렉스를 가진 사이코패스로 그려진 점도, 조니 박사(제이크 질렌할)가 장광설을 늘어놓는 알코올 중독자로 그려진 점도, 제이(폴 다노)가 결벽적이고 다소 신경증적인 리더로 묘사된 점 등도 너무 전형적이고 단순화된 인물 묘사라는 느낌을 준다.

할리우드가 축적해온 충실한 문법을 따름으로서 매끈하고 깔끔한 만듦새의 상업영화가 됐지만, 봉준호다운 개성이나 속 깊은 통찰은 다소 아쉬운 영화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가 100억 예산 영화를 만들었을 때도 보여준 개성과 재능을 그 다섯 배의 물량을 투입한 영화에선 정작 드문드문 찾게 되는 것 같다. 12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120분. 오는 29일 넷플릭스·극장 동시개봉.


옥자 안서현 변희봉 틸다스윈튼 봉준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