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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 박정순과 자녀(최계자, 최종철) 6.25 전 박정순이 자녀와 함께 찍은 사진
▲ 희생자 박정순과 자녀(최계자, 최종철) 6.25 전 박정순이 자녀와 함께 찍은 사진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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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자야, 종철아!!! 흑흑흑. 군인아저씨, 마지막 부탁입니다. 친정엄마가 제 시체 찾으러 반드시 올 테니까, 저를 따로 묻어 주세요."

총을 쏘려던 헌병은 눈물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탕탕탕"

잠시 후 총소리는 아치실 야산을 휘감았다. 군인들의 지시로 시신수습에 동원된 아곡리 주민들은 박정순의 시체만 별도로 묻었다. 이날 약 150명의 청주지역 보도연맹원들이 충북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 아치실 야산에서 학살되었는데, 별도로 매장된 경우는 박정순씨만이었다. 죽어가면서 군인에게 눈물로써 호소한 것이 통한 것이다. 28살의 젊은 여성이 8살, 5살의 아이를 남겨 두고 보은 아곡리까지 와서 군인에게 학살된 이유는 무엇일까?

"속리산 구경시켜 줄 테니 음식 싸 갖고 와라"

박정순 학살 현장 박정순 학살현장을 안내한 신덕호 옹
▲ 박정순 학살 현장 박정순 학살현장을 안내한 신덕호 옹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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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시절 천재나 입학할 수 있다는 경성사범(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의 전신)을 나와 중앙초등학교에서 근무 중이던 박정순씨는 국민보도연맹을 만든다는 소식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남편 최동식씨가 좌익활동을 하다 경찰의 검거를 피해 행방불명되어, 빨갱이 집안으로 찍혔기 때문이다.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똑같은 국민으로 대우해주고, 이전의 전력을 묻지 않는다"는 허언(虛言)을 철석같이 믿었다. 공무원 신분에 아이 둘을 키워야 하는 상황에서 국민보도연맹을 안전한 은신처로 믿은 것이다. 하지만 국민보도연맹은 안전지대가 아니라 블랙리스트이자 살생부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청주경찰서는 상급기관의 국민보도연맹원 예비검속 지시를 받고 청주청원지역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했다. 경찰들은 관내 지서를 통해 청원군 옥산면, 남일면 보도연맹원들과 청주 보도연맹원을 청주경찰서 무덕전(관)에 감금했다. 중앙초등학교 교장 관사에서 직원 회식에 참여하고 있던 박정순씨에게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빨리 무덕관으로 모이라는 것이다. 무덕관이 죽음의 구렁텅이로 가는 직행버스라는 것을 일부 사람들은 알았다. 즉 보도연맹 이사장 신형식을 비롯한 일부 간부는 일찌감치 몸을 피했고, 경찰, 공무원들은 자기 가족들을 빼돌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박정순씨의 시댁은 지역의 유지였다.

박정순씨의 시아주버니 최동선씨는 일제시대에 청주농고를 나와 청주읍회의원을 역임했고, 청주시내 각종학교 사친회장, 학무위원을 지냈다. 특히 대한민국 최초의 지자체선거가 있었던 1952년에는 충북도의원에 당선되어, 초대의장을 지냈고, 1956년에는 재선의원이 되었다. 즉 6.25 당시에 최동선씨는 청주시에서 유지로 행세했고 적극적 의지만 있었으면 제수 박정순씨를 살려낼 수 있었다. 하지만 최동선씨는 자신의 얼굴에 붉은 칠을 하기 싫었는지 처와 딸(최종인, 84세, 서울 거주)에게 "너네 작은엄마가 무덕전에 있으니 데리고 와라"라고 책임을 떠넘겼다.

무덕전에는 최동선의 제수 박정순씨만이 아니라 최동선씨의 여동생 최재덕(1927년생)씨도 있었다. 힘없는 여성 두 명이 가서 박정순씨를 빼내 올 수는 없었다. 박정순씨와 함께 트럭에 실린 보도연맹원들은 "속리산 구경시켜 줄 테니 음식 싸 갖고 와라"는 거짓말에 반신반의하며 미원으로 향했다. 미원초등학교에서 하룻밤을 지낸 이들은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 아치실에서 1950년 7월 12일 오전 10시경 집단 학살되었다. 희생자는 150명 가량이었는데, 그 중 여성이 3명이었고, 박정순씨와 최재덕씨가 거기에 포함된 것이다.

"한 여자가 유언하기를 꼭 나를 따로 묻어달라"

1950년 7월 12일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에 GMC트럭 여러 대가 먼지를 흩날리며 도착했다. 트럭을 길가에 세운 군인과 경찰들은 논과 밭에서 농사일을 보던 주민들에게 집안으로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곧이어 수백 발의 총소리가 아곡리 마을과 산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총소리와 동시에 비명소리, 피울음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청주보도연맹원 약 150명이 보은 땅까지 끌려와 학살된 순간이다. 총살 직후 경찰들은 마을 집집마다 다니며 남성 청장년들을 소집해, "빨갱이들 잡아 놨으니까 장례 치러라"며, 시신수습을 강요했다. 마을 사람들은 삽과 괭이를 갖고 3개의 학살지점 인근에 시신을 매장했다.

학살장소는 아곡초등학교 맞은 편 야산의 2개 지점(각각 50명, 3명)과 현재 한빛주유소 터(100명)에서 이루어졌다. 학살 현장에는 떡과 음식들이 널려 있었다. 여성 보도연맹원 3명은 별도로 학살되었는데, 시신수습과정에서 "빤스 속주머니에서 돈이 나왔어. 그 돈으로 술을 받아먹었다"고 한다.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신덕호(89세, 보은군 아곡리 거주)옹은 박정순씨를 기억했다. "사망자 중 여자가 3명이었는데, 한 여자가 유언하기를 우리 친정 어머니가 보통분이 아니니 꼭 나를 따로 묻어 달라"는 말을 들었고, 1951년경에 시신을 선이장했다고 증언했다.

청주사범병설중학교에서 청주중학교로 전학 한 이유

최계자 엄마 박정순의 사연을 증언하는 최계자
▲ 최계자 엄마 박정순의 사연을 증언하는 최계자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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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순씨의 두 자식은 천애고아가 되었다. 큰 아버지 최동선씨가 지역의 유지였지만 조카들의 삶에는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다. 8살에 어머니를 잃은 박정순씨의 딸 최계자(75세, 경기도 분당 거주)씨는 청주사범 병설중학(청주교육대학교의 전신)에 입학했다.

하지만 사납금(수업료)을 미납한 채 학교에 다녔는데, 하루는 백부 최동선씨가 자신의 명함을 꺼내 뒷면에 메모하더니, "너네 교장 갔다 줘라"고 했다. 명함에는 "학생의 처지가 불우해 수업료를 낼 수 없으니 청주여중으로 전학시켜 달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최동선씨는 청주여중 사친회장이어서, 친인척들은 수업료를 내지 않았던 것이다. 지역유지가 천애고아가 된 조카의 수업료를 내기 싫어서 전학을 시킨 것이다.

67년 전 어머니를 잃은 최계자는 하루속히 과거사법이 개정되어 어머니의 죽음이 밝혀지고 명예회복 되길 바라고 있다. 또한 아곡리 유해발굴이 진행되어 고모 유해를 되찾기를 염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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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