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명민.

김명민이 다시 한 번 아빠가 됐다. 다만 드라마 장르가 아닌 SF의 탈을 썼다. 계속 반복되는 하루를 살아야 하는 이 남자. 과연 아이를 무사히 구할 수 있을까. ⓒ CGV아트하우스


"대타라고 해서 거기다가 자존심을 세울 일은 없어요. 그 역할을 잘 해내는 게 배우니까요."

데뷔 초 '대타 배우'라는 수식어가 잠깐 붙었을 즈음 그가 여러 인터뷰를 통해 반복해서 했던 말이다. <불멸의 이순신>(2004)에선 송일국, <내사랑 내곁에>(2009)에선 권상우의 대타 등. 비록 첫 번째 선택은 아니었을지언정 그는 맡은 작품에서 기대 이상을 해냈고 명실공히 이젠 누구나 인정하는 배우가 됐다.

잠시 숨을 골랐던 그가 영화 <하루>로 박차를 가한다. 오는 15일 개봉인 이 작품은 그가 처음 경험하는 SF 장르다. 같은 시간대가 반복되며 위기에 빠진 딸을 구하려는 아빠 준영 역을 맡아 처절하게 부성애를 표현했다.

모 아니면 도

사실 쉬운 선택은 아니다. 최근 개봉한 타임 루프(시간의 반복을 소재로 한) 영화나 한국형 SF가 모두 흥행에 참패했다. 김명민 역시 이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타임 루프 소재치고는 의구심이 남지 않는 이야기였다"고 운을 뗐다.

"문제는 이 시나리오를 어떻게 영화로 구현할 건가인데 그건 뭐 감독님 몫이니(웃음). 할리우드 SF는 충분히 볼거리가 많고 잘 짜여 있잖나. 막대한 자본이 들어가 눈을 즐겁게 하는 요소가 많다. 근데 우린 그렇지 않으니 드라마에 집중해야 했다.

타임 루프를 해보니까 모 아니면 도더라. 한번 했으니 다신 안 할 거다! (웃음) 현장 자체가 오히려 타임 루프에 빠진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매일 같은 상황의 반복, 같은 옷차림에 보조 출연자도 똑같으니. 한국 영화 중 시간을 소재로 한 SF 영화가 성공한 게 없다지만 난 자신할 수 있다. 그래도 지금까지 나온 타임 루프 소재 중에선 완성도가 가장 높지 않을까 한다."

 영화 <하루>의 관련 사진.

영화 <하루>에서 준영(김명민 분)과 민철(변요한 분)은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 직전까지 시간의 반복을 경험한다. 두 사람이 이를 인지하고 힘을 합쳐 사건을 해결해가는 게 주요 이야기다. ⓒ CGV아트하우스


예산의 한계로 <하루> 측은 같은 장소에서 서로 다른 사건을 몰아서 촬영하는 등 강행군을 해야 했다. 당시 어려움을 설명하며 김명민은 "매 신마다 키워드를 정해놓고 연기해 혼란을 막으려 했다"고 전했다. 신마다 감정이 점차 커져야 했던 반면, 같은 장소에서 서로 다른 내용을 한꺼번에 촬영했으니 배우로선 나름 연기적인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는 방법이었다.

"처음 깨어났을 땐 '혼란', 그다음은 현실과 혼란 사이 '갈등', 또 다음엔 딸을 살려야 함을 깨달았으니 죽기 전에 빨리 구하기 위한 '스피드'. 그런 식으로 나름 키워드를 정해놓고 촬영했다. 사실 몰아 찍기는 드라마에서 많이 쓰는 건데 이걸 영화에서 하려니 참…. 촬영 전날까지 사실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계산했는데 힘들긴 하더라. 드라마 촬영 때 배운 순발력이 도움이 됐지. (웃음)"

스스로 설득시키기

연기 달인 등 자신을 칭찬하는 여러 수식어를 민망해하는 그에게 연기 방식을 물었다. "관객들을 설득시키기 위해선 내가 일단 그 인물이 돼야 한다"며 "캐릭터의 대변인이라 생각하고 연기하려 한다"고 답했다. <하루>에서도 그는 "왜 그렇게 딸을 살리려고 노력했는지 이해 안 가는 부분도 있었다"며 "나름 합리화도 시키려 했다. 그래야 의심하지 않으니까"라고 덧붙였다.

"내 경우엔 캐릭터에 대해 납득하지 못하면 대사가 한 마디도 안 나온다. 그래서 스스로 설득시키는 거다. 하지만 한 번도 현실에서 뭔가 대입해서 연기한 적은 없다. 눈물 흘려야 할 때도 제가 겪은 슬픈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 뭔가 눈물의 질감이 달라지더라. 그냥 대본에 주어진 상황 안에서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 같다. 감정이 너무 안 잡혀서 고생할 때? 그럴 때일수록 더 (대본에) 집중하려 한다."

이는 그가 20년 넘게 지켜온 나름의 철칙이기도 하다. 매번 지치지 않고 도전을 즐기는 것에 김명민은 "내가 뭔가 못했을 때의 쪽팔림이 내 동력인 거 같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왠지 오기가 생긴다랄까. 눈 뜨고 내 연기를 못 볼 거 같고 쥐구멍을 찾고 싶을 때가 있다. 다음엔 저런 식으로 안 해야지! 이런 게 에너지가 된다. 근데 막상 촬영을 시작하면 그런 일이 반복된다. 촬영 전까진 이 역할만큼은 나보다 잘할 사람은 없다고 스스로 되뇐다. 그런 자신감이 없으면 못 해내거든. 후배들에게도 강조한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면 그 누구도 설득할 수 없다고. 근데 그건 그때뿐이다. 다 찍고 나서 보면 어휴! 못 봐줄 때가 많다. 이런 아쉬움이 다음 작품으로 가게 하는 힘이 된다.

100중에 70 정도를 채웠다고 가정하면 언제 90을 채울 수 있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하며 지낸다. 채찍이지. 이렇게 안 하면 주저앉고 만다. 나이도 들었고 말이다(웃음). 초심을 잃지 않는다? 솔직히 이미 다 잃었지! 20년 넘게 했는데. 하지만 (기억하려고) 노력은 해야지. 나이 먹으면 자신에게 관대해지거든. 엄격함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공한 기업가들 보면 주변엔 관대하지만 스스로 냉정한 분들이 많더라."

 배우 김명민.

ⓒ CGV아트하우스


버리는 작업

김명민은 데뷔 초 한 감독에게 들은 '버리는 작업'을 마치 좌우명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매일 발음 연습을 여전히 하고 있었으며, 현장에 일찍 도착하는 습관도 유지 중이었다. 이 정도면 독종이다. "<영화> 소름 때 윤종찬 감독님이 한 말"이라며 그는 "그땐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경력이 쌓이면서 뭔가 채우는 것보다 버리는 게 더 어렵다는 걸 깨닫고 있다"고 말했다.

"채운다는 건 오버해서 연기하는 거고 비운다는 건 뭔가 모자라게 연기하는 것이다. 극점이 있다면 최대한 거기에 가깝게 하되 그 아래로 하려고 한다. 잘 안 되지. 50%는 계산으로 준비하고 나머진 현장에서 채운다. 신인 중에 100을 준비해오는 친구들이 있는데 그러면 감독의 말이 안 들어간다. 대신 난 현장을 일찍 간다. 적어도 한 시간 정도. 스태프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나름 그 환경에 날 적응시키는 거다. 그런 워밍업이 내겐 굉장히 중요하다. 그때 나머지 50을 채우는 거지.

배우에겐 의무가 있다. 발음이 좋아야 하고, 눈빛이 살아있어야 한다. 그래서 몸도 지친 상태로 두지 않는다. 촬영 때 술을 먹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설령 술에 취한 신이 있어도 웬만하면 멀쩡한 상태로 찍는 편이다."

그 많은 수식어는 차지하고 그는 '배우 김명민'으로 불리길 원했다. 하나 더하자면 "동료들에게도 인정받는 배우라고 불리고 싶다"며 그가 눈빛을 밝혔다.

<하루>를 시작으로 김명민은 한창 달린다. 당장 < V.I.P >의 촬영이 끝났고, <물괴> 촬영을 진행 중이다. 여전히 도전을 즐기는 그의 모습을 관객 입장에서 마음껏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배우 김명민.

김명민이 말한 배우의 의무는 곧 배우가 지켜야 할 덕목이었다. 나이듦을 인지하면서 정체되지 않게 노력하는 그는 자신에게 말그대로 당근보단 채찍을 주는 이였다. ⓒ CGV아트하우스



김명민 하루 변요한 SF 한국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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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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