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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서울 합정동 백주년기념교회에서 한국여성민우회의 <미디어씨, 여성혐오 없이는 뭘 못해요?> 4회차 강연이 열렸다. 엔터테인먼트 웹 매거진 아이즈(IZE)에서 글을 써온 최지은 기자가 강연을 맡았다.

이날 최 기자가 전달한 미디어, 그중에서도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여성 혐오 현상에 대한 진단 내용을 전달한다.

나는 왜 말하기 시작했나

최지은 기자가 엔터테인먼트 사업에서의 여성혐오 현상을 분석·설명하고 있다.
 최지은 기자가 엔터테인먼트 사업에서의 여성혐오 현상을 분석·설명하고 있다.
ⓒ 남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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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 기자는 기자 재직 당시 차곡차곡 쌓아온 '흑역사'를 고백하며 강의를 시작했다. 최 기자는 미디어의 여성혐오 현상에 대해서 알기 전에는, 대중에게 그저 '재밌다'고 여겨지는 것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쉽게 말해, 네티즌이 'ㅋㅋㅋㅋ'라는 가벼운 댓글을 달 수 있는 주제. 엔터테인먼트 현장의 그러한 주제를 뽑아내는 것에 급급해왔다. 장동민의 개그와 UV의 음악을 칭찬하는 기사를 쓰기도 하던 최 기자를 변화로 이끈 일은 바로 2015년에 일어났다.

지난 2015년 2월 김태훈 칼럼니스트는 패션매거진 <그라치아>에 한 칼럼을 기고했다. 칼럼의 제목은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 이 칼럼에는 '현재 한국의 페미니즘은 이상하다. 무뇌아적 남성들보다 더 무뇌아적이다'라는 문장이 들어가 있었다, 국내 페미니즘 운동을 '한국식 페미니즘'이라 명명하며 평가절하하고 남녀 갈등 구도를 촉발하는, 글 전체를 관류하는 주제의식이었다.

그로부터 두 달 뒤엔 개그맨 장동민, 유세윤, 유상무의 <옹달샘의 꿈꾸는 라디오> 여성비하 파문이 일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출연하는 팟캐스트에서 "(나는) 처녀가 아닌 여자를 참을 수 없다", "섹스할 때 상대방이 처녀인지 아닌지 구별해야 한다"라는 발언을 일상적인 개그 소재로 삼았다.

논란이 불거지자 이들 개그 삼인조는 기자회견을 열어 사과했다. 그럼에도 논란은 여전히 씁쓸하게 남았다. 그들의 혐오적 개그에 대한 지적이 방송 직후 일어난 것이 아니라 장동민이 MBC <무한도전>의 고정 멤버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일어난 후에야 논란이 됐다는 점, 그리고 그들의 사과는 여성 혐오 발언에 대한 책임만은 교묘하게 피해갔다는 점, 그들의 끔찍한 언행은 금세 잊히고 텔레비전 이곳저곳에서 여전히 활약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여성들은 반격을 시작했다. 트위터 등 SNS상에서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운동이 시작됐고, 이는 최 기자의 각성을 불러왔다. 여성을 혐오하는 이 남성들의 성공, 이 남성들의 서사를 스스로가 확대하고 재생하고 있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거지?'

최 기자는 여성 혐오 사회에 저항하지 못하고 일조하던 지난 과거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수년 전 써 내려간 기사들은 그에게 여전히 원죄처럼 남아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지난 8일 서울 함정동 백주년기념교회에서 <미디어씨, 여성혐오 없이는 뭘 못해요?-4강. 연예사업 편> 강연이 열렸다. 한국여성민우회가 주최한 이날 강연은 최지은 ize 전 기자가 맡았고, 70여명의 참석자가 자리했다
 지난 8일 서울 함정동 백주년기념교회에서 <미디어씨, 여성혐오 없이는 뭘 못해요?-4강. 연예사업 편> 강연이 열렸다. 한국여성민우회가 주최한 이날 강연은 최지은 ize 전 기자가 맡았고, 70여명의 참석자가 자리했다
ⓒ 남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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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0일 방영된 <무한도전> '미래예능연구소' 특집에는 '변화하는 미래 예능의 판도를 분석한다는 콘셉트 아래 게스트 여럿이 등장했다. 방송인 유병재, 그룹 위너 김진우, 배우 배정남 등 모두 남성이었다. 한 누리꾼은 이날 방송에 대해 '미래 예능에도 여자는 없구나'라고 평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 그중에서도 예능프로그램의 성차별에 최 기자는 주목했다. 현재 인기리에 방영되는 프로그램들의 속성을 요약하자면 '여자 없는 예능, 남자뿐인 예능'이었다. MBC <무한도전>을 필두로, JTBC <비정상회담> <아는형님> <냉장고를 부탁해> tvN <신서유기> <문제적 남자> 등이 그 주인공이다. 최 기자는 "여성 고정 패널이 등장하는 프로그램을 더 찾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예능 고정 출연진들 사이의 성별 불균형이 심각한 이유가 궁금하다면. '이 사회에서 무엇이 콘텐츠가 되는가'에 대한 고찰을 선행하면 된다. 최 기자는 "남자의 모든 것, 남자는 숨만 쉬어도 아이템이 된다"고 평했다. 리얼 버라이어티나 토크쇼 포맷뿐만 아니라, 요리, 육아, 여행, 토론, 심지어 머리를 쓰는 문제풀이까지, 남자가 하기만 하면 그것은 예능이 된다. 수년째 인기리에 방영 중인 프로그램 JTBC <냉장고를 부탁해>에 여성 셰프가 첫 등장하기 까지는 자그마치 1년 반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최 기자는 '남자만' 출연하는 예능과 '여자만' 출연하는 예능의 대표작 한 작품씩을 언급했다. tvN <알쓸신잡>과 Mnet <언프리티랩스타>다. 이 두 프로그램은 전혀 다른 성격을 지녔지만 프로그램의 서사를 풀어나가는 방식에서 닮은 점이 있다. 다양한 분야의 박사들이 모여 여행을 떠난다는 포맷의 프로그램 <알쓸신잡>인 출연진은 46세에서 58세 사이의 남성이다. 최 기자는 이러한 캐스팅의 한계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미 '인문학'을 표방하는 많은 예능들이 '남성 어르신'들만을 연단에 세워왔으며, 여성 전문가를 발굴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이 프로그램 역시 이러한 고질병을 그대로 답습했고, 인문학 예능에 남자만 등장할 수 있는 이 현상은 '연륜있는 남자가 얘기하는 모든 것을 인문학이라 쳐주는 건가'하는 의심을 품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여성 래퍼들의 치열한 경쟁을 담은 <언프리티랩스타>라는 프로그램의 원동력은 바로 '여자들의 기싸움'이다. 여성이 두 명 이상 있는 현장에 대해서는 '기싸움'이라는 테마가 어김없이 붙기 마련이고, 이토록 편협한 상상력에서 제작자, 시청자, 언론, 모두가 벗어나지 못한다. 정정당당하게 실력대결을 벌이는 모습보다는 '여자의 적은 여자' 프레임을 통해서만 바라보는 것이다. 반면 '점심 메뉴 선정'을 두고까지 기싸움을 벌이는 <알쓸신잡> 출연자들의 모습에는 그 누구도 기싸움 프레임을 씌우지 않는다. 서열을 둘러싼 남자 어른끼리의 기싸움은, '기싸움'이라 명명되지 않고, 카리스마 넘치는 남성들의 지적 대화 정도로 그려진다. 이렇듯 남성들에게는 허용되나, 여성들에게는 그렇지 못한 것이 많다.

최 기자는 tvN <뇌섹시대-문제적 남자> SBS <백종원의 3대천왕> JTBC <아는형님> Mnet <프로듀스101 시즌1> 등을 언급하며, 한국 예능이 여성에게 허락하는 자리가 무엇일지 분석했다. 그 역할은 '홍일점', '꽃병풍', '치어리더', '막내' 정도. 그렇기에 김원희, 이효리, 송은이, 김정민 등의 유능한 여성 예능인들은 설 자리를 잃고 변방을 맴돌았다. 현재 상황에서는 개그우먼 김숙 정도가 여성에게 이토론 부박한 예능 판국에서 살아남았다. KBS2 <언니들의 슬램덩크>와 MBC <비디오스타> 등의 '여성만의' 예능은 오로지 김숙이 있기에 성립이 가능한 프로였다.

왜 변하지 않을까

넷플릭스 코리아 트위터 계정이 22일 오후 게재한 <마블 아이언 피스트> 관련 게시물.
 넷플릭스 코리아 트위터 계정이 22일 오후 게재한 <마블 아이언 피스트> 관련 게시물.
ⓒ @Netflix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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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은 계속되어 왔지만 변화는 없었다. 다수의 기업들은 여전히 여성혐오 논란을 일으킨 남성 연예인들을 광고 모델로 기용했다.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 '넷플릭스'는 유세윤을, 글로벌 메이크업 브랜드 '맥'은 유상무를 불렀다. 페미니즘 영화라 분류되는 <원더우먼> <델마와 루이스> <히든피겨스> 등의 홍보를 맡은 기업은 '미모로 세상 다 구할 기세' '여리여리 소녀'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며 영화의 주제의식과 반하는 한심한 수준의 홍보 문구를 내놓았다. 각종 여성혐오 사건 이후 용기를 가지고 페미니즘 운동을 함께 해온 여성들은 무기력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미디어 콘텐츠 제작 현장은 압도적으로 남성 친화적이다. 창작을 하는 사람, 투자를 하는 사람, 홍보를 하는 사람, 거의 모든 분야를 남성들이 휩쓴다. 일례로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심의위원 9명은 모두 남성으로, 그들의 평균나이는 64세다. 이러한 주요결정권자 다수가 나이든 남성이고, 그렇기에 새로운 시도 대신에 기존의 안전한 방식을 선호하며 변화의 방법을 꾀하지 않는 것이다. 더불어, 남성 제작자들은 남성 연예인들의 과오를 잘 잊어준다. 연예인으로서의 능력과 그들의 잘못을 아주 섬세하게 분리해주고, 그들을 지속적으로 기용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방송계 남성 네트워크, 남성 연대이며, 이것이 갖는 압도적인 위력은 강력하다.

비단 제작 현장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 시청자들 역시 남성의 과오에는 관대하고 여성의 실수에는 가혹한 평을 내리는 성향을 보인다. 남-녀 연예인이 비난받는 이유를 찬찬히 살펴보면 답이 나온다. 남성 연예인들은 어떠한 비행을 저질러도 복귀가 쉽지만, 여성 연예인은 잘못이 아닌 것까지 잘못했다고 말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최근 방송된 MBC <나혼자산다>에 출연한 배우 김슬기는, '집들이 음식을 부족하게 장만해 손님들을 배고프게 했다'는 이유로 사죄의 의미를 담은 사과문을 올려야 했다. 시청자들의 이러한 행위는 결국 제작진들에게 여성 연예인을 기용하지 않는 것에 대한 알리바이를 설계해주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여성 혐오 전력이 있는 연예인을 기용하는 기억에 적극적인 항의 표시를 하거나 불매 운동을 할 수 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같은 관련 기관에 민원 제기를 할 수도 있고, 각자의 SNS를 활용해 부조리함을 공론화하는 방식을 택할 수도 있겠다. 궁극적으로는 나의 욕망이 표출되는 과정 속에서 옳은 방법으로 미디어를 활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가 진단을 끊임없이 이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최 기자는 전했다. 


태그:#한국여성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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