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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산들이

그래, 발단은 돈이었다. 지난 일요일(4일) 저녁 가족 모두 외식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아내가 아이들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저녁은 너희들도 돈을 좀 보태라."
"왜?"
"저번에 산들이 생일날 어른들한테 돈도 많이 받았잖아. 너희들이 엄마·아빠보다 돈 더 많아. 그러니 좀 보태렴. 우리 식구 다 같이 먹는 거잖아."

다른 아이들보다 자연친화적인 아이
▲ 도시농부 산들이 다른 아이들보다 자연친화적인 아이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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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을 보니 아이들의 지갑에 돈이 너무 많이 있고, 이럴 때 아이들에게 베푸는 법을 가르치려는 아내의 의도인 듯했다. 엄마의 뜻하지 않은 제안에 아이들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각자의 방식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알겠다며 흔쾌히 돈을 쾌척하는 첫째와 아무것도 모르고 엄마가 달라니까 돈을 주는 막내, 그리고 입이 퉁퉁 불어 어쩔 모르는 둘째.

몇 분 전만 하더라도 자기가 돈이 제일 많다며, 지갑이 터질 것 같다고 생글거리던 둘째였는데, 그때부터 식당까지 가는 길은 둘째와 엄마의 투쟁의 길이 돼버렸다. 안 그래도 돈 욕심이 제일 많아 짠돌이의 기질이 보이는 아들을 걱정하는 엄마와 자식인 내가 왜 가족 외식에 돈을 내야 하는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산들이와의 투쟁.

막상막하였다. 비록 산들이는 엄마·아빠의 온갖 협박성 발언에 못 이겨 결국 5000원을 넘겼지만 인상을 풀지 않고 계속 뚱한 표정을 지었고, 아이의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엄마는 계속해서 둘째를 설득하고자 했다. 중간에 아빠기 끼어 이제 그만 됐다고, 아빠가 밥값을 낼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기에도 너무 많이 와버린 상태였다.

나로서는 기분 좋게 밥 먹으러 나와서 이게 뭐하는 건지 짜증도 났지만 지켜볼 뿐이었다. 평소에 둘째가 돈에 대해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였던 터라 언젠가 한 번은 나도 아이를 붙잡고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돈을 베풀어야 하는 이유를 가르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유치원에서도 설움을 겪는 둘째

활짝 잘 웃지 못하는 둘째
▲ 산들이의 웃음 활짝 잘 웃지 못하는 둘째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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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는 내내 계속되는 설득과 반항. 이미 모자간의 대화는 단순히 돈 문제를 넘어서 둘째가 가지고 있는 생활 전반에 대한 불만으로까지 번져 있었다. 둘째로서 누나와 동생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여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산들이의 나름 이유 있는 항변들. 그러던 녀석이 갑자기 자신의 어린이집 생활 이야기를 꺼냈다. 집에서도, 어린이집에서도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는 맥락이었다.

"내가 어린이집에서도 얼마나 힘든데."
"어린이집? 왜?"
"어린이집에서도 내가 하자는 놀이는 다들 안 한단 말이야. 그리고 나를 약 올리기도 해."
"뭐라고 하는데?"
"나보고 대머리 빡빡이래."
"왜 대머리 빡빡이야? (연초에 엄마가 머리를 짧게 깎았으니 그랬을 수 있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네 머리가 아빠 머리보다도 길어."
"몰라. 그냥 와서 대머리 빡빡이라고 놀린단 말이야. 아니라고 해도 막 그렇다고 하고."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아이가 학교에서, 유치원에서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한다는데 이에 대해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렇다고 부모가 곧바로 어린이집에 쳐들어가 친구들을 혼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옆에서 첫째 까꿍이가 대뜸 끼어든다.

"그럴 때는 그냥 무시해. 내가 아니면 그만이지. 뭘 신경 써. 그냥 무시하다 보면 걔네들이 지쳐서 아무 말 안 해."
"피하면 계속 따라와서 대머리 빡빡이라고 놀려."
"그래도 그냥 모르는 척 해. 너만 아니면 그만이지 뭐. 나도 학교에서 친구들이 나 약 올리면 그냥 무시해버려."

역시 까꿍이었다. 엄마와 아빠한테 혼나도 1분 있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헤헤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녀석. 그건 그만큼 자존감이 있다는 것일 텐데 왜 둘째 산들이는 누나만큼 자존감을 갖지 못 하는지.

형과 달리 활짝 잘 웃는 막내.
▲ 막무가내 막둥이 형과 달리 활짝 잘 웃는 막내.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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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산들이에게 내가 겪었던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화를 들려줬다. 만화 <아기공룡 둘리>에서 도우너가 희동이한테 '개동이'라고 발언한 이후 아빠의 이름을 제대로 부른 친구들이 한 명도 없었던, 그래서 1년 내내 내 이름이 너무 싫다고 어머니에게 찡찡댔지만, 그 다음 학년에는 어머니의 충고를 받아들여 오히려 개똥이라는 별명을 이용해 반장이 된 이야기였다. 

그러자 옆에서 아내가 거들고 나섰다. 자신의 어렸을 때 별명은 이름 때문에 '람보'였단다. 어린 여자 아이에게는 진짜로 너무 싫은 별명이었는데, 아이들의 놀림을 그냥 꾹 참아냈고 그러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아무도 그 별명을 부르지 않았다든가. 그러니 둘째 너도 잘 참다 보면 다 지난 이야기가 될 거라는 결론이었다.

어렸을 때 누구나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놀림의 기억. 아이가 자란다는 것은 그런 고비를 이겨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아이의 성정은 달라진다. 과연 산들이는 이번 고비를 어찌 넘길까? 속으로 삭일까? 아니면 자신의 장점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까? 부모의 입장으로서는 아이가 부디 슬기롭게 이번 고비를 넘기기를 바랄 뿐이다.

"역사여행 가고 싶어"

역사의 비극 앞에서의 산들이
▲ 제주 너븐숭이 4.3 기념관 역사의 비극 앞에서의 산들이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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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방언 터지듯 자신의 불만을 쏟아내는 둘째에게 아내는 거듭 사과를 했다. 셋째를 임신한 상태에서 갓 세상을 인식하기 시작한 첫째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아주 어린 둘째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남편인 내가 보기에는 그것만 해도 아내가 존경스러웠으나, 아내는 둘째에 대해 짜증을 더 낸 것이, 둘째를 더 챙겨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듯했다.  

둘째가 찔끔찔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엄마의 진심어린 사과 때문인지, 아니면 둘째로서 가지고 있는 서러움이 밀려와서 그런지 아이는 어쨌든 눈물을 보였고, 아내는 그런 둘째를 위로해주기 위해서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것들을 열거하기 시작했다. 맛있는 걸 사줄까? 여행을 갈래? 등등.

그러자 둘째가 선뜻 대답했다. 여행을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역사여행. 녀석은 공연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는 엄마와의 여행보다는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아빠와 단 둘이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7살 아이가 역사여행을?

처음에는 뜨악했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평소 오고가며 아빠에게 주어들은 역사적 지식을 어린이집에서 이야기했을 것이고, 이에 아이들이 자신을 우러러보자 역사에 더 재미를 붙였을 것이다. 선생님도 둘째가 역사와 관련해서 발표를 많이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태생적으로 역사에 관심이 있었겠지. 지난번 제주도에 갔을 때도 4.3 사건에 대해서 계속 물었던 녀석이었다.

4.3을 뚜렷하게 기억하는 녀석
▲ 산들이의 제주도 4.3을 뚜렷하게 기억하는 녀석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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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내게 둘째와 단 둘이 여행을 다녀오라고 부탁했다. 첫째와 셋째를 빼고 단 둘이 다니면서 아이의 자존감을 끌어올리라고 했다. 10세가 되지 않은 어린이가 그 시절에만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 자존감인데 현재 산들이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자존감이었다. 누가 뭐라 하던 자기 자신을 믿고,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긍정할 수 있는 힘.

별 수 있는가. 떠날 수밖에. 난 산들이에게 이번 주말 아내의 말마따나 강화도로 역사 여행을 떠나자고 했다. 고대서부터 근대의 역사가 있는 강화도를 돌아다니며 역사를 공부하고, 이를 통해 산들이의 자존감을 키워주기로 했다. 물론 100% 확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부모로서 꼭 해야 할 일인 듯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둘째는 벌써 주말의 역사여행 생각으로 들떠 있었다. 첫째와 셋째는 자신들도 가고 싶다며 아우성이었지만, 이번만 둘째에게 양보하고 다음에 따로 가자고 했다.

이번 주말, 산들이와 난 강화도에서 어떤 여행을 하고 있을까.

참, 이후 산들이는 마음이 풀려서인지 외식비에 보태쓰라며 거금 5천 원을 쾌척했다. 저녁, 맛있게 잘 먹었다. 산들아!


태그:#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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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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