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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면서
나는 해방둥이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여름방학 때 당시 도쿄의 한 중학교에 다니던 아버지가  고향에 돌아왔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외아들이 학병에 끌려 나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우선 집안에 대라도 잇고자 귀가 일주일 만에 미리 점지해 둔 이웃마을 여성과 혼인시켰다. 그래서 이듬해 가을에 내가 태어났다. 내가 태어날 때는 해방 직후로 이미 조국은 분단이 됐다. 그 뒤 7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반도에서는 혈육도 만나지 못하는, 인륜을 저버린, 야만의 역사는 지속되고 있다.

1950~1953년 한국전쟁 때 숱한 젊은이들의 주검을 목격한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씀했다.

"니가 군대에 갈 때는 38선은 없어질 거다."

하지만 그 손자가 군에서 전역한 지 36년이 지났다. 이즈음에는 그 손자의 손자뻘들이 38선 대신에 한국전쟁 이후 새로 생겨난 휴전선 철책을 사이 둔 채 동족끼리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처럼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나는 이제 인생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남북의 긴장 완화와 조국의 평화통일에 이바지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국전쟁의 비망록이랄까 징비록 <박도 선생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한국전쟁>(가제)을 남기고자 한다. 그 준비로 이 스토리펀딩 <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을 시작하는 바다.

이 연재는 100일간 약 30회 연재할 예정이며, 여기에는 그동안 내가 수집한 한국전쟁 사진 1800여 점 가운데 약 300여 점을 소개할 예정이다.
평양시민들이 부서진 대동강철교를 건너 남쪽으로 피란하고 있다(1950. 12.). ⓒ NARA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가다

2004년 1월 31일, 나는 <오마이뉴스> 여러 독자들의 성원으로 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 안두희를 10여 년간 끈질기게 추적하며 응징한 권중희 선생을 모시고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아래 'NARA')에 갔다.

우리가 그곳에 간 목적은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지신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 배후를 밝힐 수 있는 문서를 찾아보고자 함이었다. NARA는 워싱턴 D.C. 근교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의 깊은 숲속에 있었다.
2005. 12. 제2차 방문 때 NARA 앞에서 필자 ⓒ 박도
NARA는 투명 유리로 된 최신식 6층 건물로, 그 규모가 엄청 컸다. 하지만 그 건물의 웅장함보다 그곳에 소장된 각종 기록물의 방대함과 그 양과 질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NARA 수장고에는 독일 누렘베르그의 재판기록, 히틀러의 두개골 사진, 태평양전쟁 당시 도쿄로즈의 라디오 원고, 이승만 대통령과 김구 주석 간의 논쟁, 베트콩 지하 비밀 벙커의 지도, 북한군의 견장 등 별별 희귀한 자료들이 갈무리돼 있었다. 그 가운데 그 일부는 내 손으로 만져도 보고, 눈으로 확인도 했다. 
NARA 자료실에 소장되어 있는 한국전쟁 당시의 북한군 견장. ⓒ 박도
NARA 방문 첫날 5층 사진자료실에서 한국 관련 사진(주로 한국전쟁 사진)들을 보자 우리나라 현대사의 진실이 그대로 드러났다.

1945년 9월 9일 미군이 이 땅에 진주한 후,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하지 사령관은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로부터 항복 문서를 받았다. 그런 다음 가장 먼저 조선총독부(해방 후 중앙청) 광장에 게양된 일장기를 내리고 미군들이 경례를 하는 가운데 성조기를 게양했다. 나는 그 장면의 사진을 보자  우리나라의 현대사 질곡을 단박에 감 잡을 수 있었다. 사진으로 볼 때 우리나라가 해방된 게 아니라 주인만 바뀐 꼴이었다.

이밖에도 그날 사진자료실에서 우리나라 현대사의 가장 비극인 6.25 한국전쟁 사진을 보자 나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1945. 9. 9. 오후 4시 무렵, 미군 병사가 조선총독부 국기게양대에서 일장기를 내리고 있다. ⓒ NARA
1945. 9. 9. 오후 4시 무렵, 미군 병사가 조선총독부 국기게양대에서 끌어내린 일장기 대신에 미 성조기를 게양하고 있다. 이로써 그 시간부터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미 군정기로 접어들었다. ⓒ NARA
이 사진들에는 한국전쟁의 실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산길 들길 아무데나 지천으로 흩어져 있던 시체더미들, 쌕쌕이(전투기)들이 염소똥처럼 마구 쏟아 떨어뜨리는 폭탄, 포화에 쫓겨 가재도구를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허겁지겁 뛰어가는 피란민 행렬, 배만 불룩한 아이가 길바닥에 버려진 채 울고 있는 장면, 흥남부두에서 후퇴 수송선에 오르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 흥남철수 당시 유엔군들이 얼마나 다급했으면 군복을 입은 채 그대로 바다로 뛰어 들어가 수송선에 오르는 모습, 끊어진 대동강 철교 위로 꾸역꾸역 곡예 하듯 남하하는 피란민들, 꽁꽁 언 한강 위 괴나리봇짐을 이고 진 피란민들이 어린아이를 앞세우고 건너는 모습, 부산 영주동 일대의 판자촌, 수원 역에서 남행 기차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피란민들….
1951. 1. 5. 서울 근교, 1. 4 후퇴로 끝없이 이어진 피란민 행렬. ⓒ NARA
나는 이 사진들을 보자 그때의 기억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하늘에서는 전투기의 굉음과 폭격소리로, 산과 들에서는 멀리서 가까이서 들려오는 대포소리와 기관총소리로 귀청이 멍멍했다. 논이나 밭, 들길에는 채반에 누에처럼 널브러진 시체들, 전투기들의 융단 폭격으로 온전한 건물 하나 없이 온통 폭삭 주저앉은 도시와 마을…, 그리고 탱크가 캐더필러를 굴러 돌진해 오는 소리들이 쟁쟁하게 들려왔다.
1950. 8. 11. 미 전투기들이 북한군 진지에 폭탄을 투하하고 있다. ⓒ NARA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기갑부대의 사열 장면. ⓒ NARA
NARA에 소장된 사진을 입수하다

나는 이 사진들을 보는 순간 NARA에 소장된 사진자료 모두를 우리나라에다 옮겨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마치 고려 때 문익점 선생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목화씨를 붓두껍에 숨겨온 것처럼. 하지만 그것을 죄다 옮겨놓기는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행히 자료실에서 사진 스캔은 허용되기에 그날 자원봉사로 안내한 재미동포 주태상씨의 스캐너를 빌려서 40여 일 동안 NARA에 소장된 수백만 장의 사진 가운데 480여 매와 버지니아 주 남단 노퍽 시에 있는 맥아더기념관 사진들을 검색, 수집한 뒤 이를 <사진으로 보는 한국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오마이뉴스>에 30회 연재한 바 있었다.
1950. 8. 25. 전투기 공습 후 쓰러진 피란민의 시신들. ⓒ NARA
그런 뒤, 재미동포 사학자 이도영 박사가 발굴한 학살 사진을 덧보태서 기록문화, 특히 사진 자료가 귀한 우리나라에 한국전쟁 비망록인 사진자료집을 남긴다는 사명감으로 2004년 6월 25일 한국전쟁 기념일에 <지울 수 없는 이미지>라는 제목의 사진집을 엮었다. 이 사진집이 나온 뒤 각계로부터 분외의 호응을 받았다. 각 매스컴은 대서특필해줬고, 많은 독자들이 전화와 메일·편지를 보내왔다.

"귀중한 자료집을 편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사의 소중한 자료로 후손들이 보도록 잘 보관하며 전하겠습니다. 나는 할아버지 아버지와 같이 3대가 한 집에서 살아온 사람으로, 한국전쟁의 참화와 참담한 생활상을 잘 기억은 하고 있었으나, 기록물이 전혀 없어서 자식들에게 말로만 그 당시를 전하려니까 아이들이 도통 실감을 하지 못하더군요.

하늘을 보고 땅을 치며 통곡하여도 시원치 않을 한국전쟁의 근본 원인은 지난 세기 선조들이 국제사회 제국주의자들의 움직임에 너무 무지하여 대처를 잘못해서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기는 치욕을 당한 까닭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 세대는 과연 국제사회에 잘 대응하고 있는지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아무튼 기억 속에 남아있던 역사적 사실을 생생한 자료로 수집·편찬해 주신 데 대해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2004. 8. 8. 경북 경주시 안강읍에서 70대 노인 이성우 드림

나는 그 이듬해인 2005년 11월에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다시 NARA에서 제2차 한국전쟁 관련 기록물을 검색하여 800여 매를 입수한 뒤 귀국해 눈빛출판사에서 <지울 수 없는 이미지 2>와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 장면>을 펴냈다. 이 사진집 또한 반응이 매우 좋아 2007년 2월에 제3차 한국전쟁 기록물 리서치 작업 길에 올랐다. 

그때 NARA와 맥아더기념관에서 제3차 한국전쟁 기록물 검색하여 500여 매를 입수했다. 이 사진 자료들은 대부분 종군기자들이 찍은 한국전쟁 사진들이지만, 여기에는 유엔군들이 인민군과 중공군에게 노획한 문서 파일 50여 매도 담겨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북위 38선 일직선에서 울려 퍼진 인민군 대포의 포성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새로운 원한의 군사분계선(휴전선)에서 그 포성이 멎었다. 3년 남짓 동안 지루하게 계속된 한국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끝나지 않은 전쟁' '잠시 쉬는 전쟁' 매우 '더티(dirty)한 전쟁'으로 일단 그 막을 내렸다.

한국전쟁은 세계 전쟁사에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으로, 그 피해는 피아 150만 명의 전사자와 360만 명의 부상자를 낳았고, 1000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포성이 멈추자 한반도 전역은 초토화로 도시와 마을은 온통 잿더미였다.
휴전협정 후 비무장 군사분계선에 세울 표지판들. 1953. 7. 31. ⓒ NARA
사진의 힘

한국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그새 7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때 길거리를 헤매던 전쟁고아들을 비롯해 혹독한 전쟁을 겪은 기성세대들은 대부분 저 세상 사람이 됐다. 이제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은 전쟁을 체험한 일부 세대에게만 가물가물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사진 한 장은 백 마디 웅변보다도 더 힘이 있다. 아무리 기억력이 비상해도 기록을 따를 수가 없다. 기록의 중요성은 백 번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불나방은 제 무리가 불에 타죽는 것을 빤히 보고도 겁도 없이 불에 뛰어들다 저도 불에 타죽고 만다. 파리도 마찬가지다. 파리통에 새까맣게 빠져죽은 동족의 무리들을 보고도 꾸역꾸역 그 통에 들어가 똑같은 처지가 되고 만다. 이처럼 하등동물은 학습이 없기 때문에 거듭 시행착오로 제 목숨을 잃고 만다.

그러면 고등동물이라는 사람은 어떤가. 전임 대통령이 무리한 장기 집권 끝에 비극적인 최후를 당한 것을 보고도 자기만은 예외라고 같은 길을 거듭하다가 똑같은 최후를 맞았다. 또 전임 대통령이 친인척 비리로 대국민사과를 하는 것을 보고도 각성하거나 조신하지 않았다가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건 대한민국의 현대사의 한 단면이다. 이는 역사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다.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나라일수록 역사를 아끼고, 사랑하며, 올곧게 기록해 쌓아가고 있다. 역사학자 김성식은 <내가 본 서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국 사람은 역사를 아끼며, 프랑스 사람은 역사를 감상하고, 미국 사람은 역사를 쌓아간다." 

그들은 사소한 것이라도 역사가 있으면 이를 아끼고 그대로 보존하며 원형을 손상치 않고자 심지어 건물의 먼지를 닦는 것도 주저한다. 그들은 조상의 어둡고, 부끄러운 역사일지라도 있는 그대로 보존하면서 후손들에게 바른 역사를 일깨워준다고 한다. 이는 역사를 모르는 이들이 하등동물처럼 거듭 시행착오를 범하거나 역사의 시계 침을 되돌려 놓기 때문이다.

일찍이 고려 인종 때 김부식은 <진삼국사표>에서 다음과 같이 역사 기록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우리의 옛 기록(古記)은 문장이 거칠어 뜻이 통하지 않고 사적이 빠져 없어져, 이로써 임금의 착함과 악함, 신하의 충직함과 간사함, 국가의 편안함과 위태로움, 백성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을 모두 드러내어 뒷사람들에게 권장하고 경계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비록 어린 시절이었지만 한국전쟁을 몸소 체험한 세대로 후세들을 위해 죽기 전에 가제 <박도 선생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남기고자 한다. 그동안 미국 NARA는 세 차례, 버지니아 주 남단 노퍽의 맥아더기념관은 두 차례나 다녀온 바 있다. 이번에 여건이 마련되면 다시 한 번 더 그곳을 찾아가서 미처 살펴보지 못한 자료를 수집하여 앞으로 내가 펴낼 책에다 생생히 담고 싶다.
1950. 10. 19. 함흥, 300여 명의 정치범이 동굴에 불법 감금되어 질식해 죽었다. 유엔군이 점령한 뒤 이 시신들을 동굴에서 꺼내 늘어놓자 유족들이 가족을 확인하며 울부짖고 있다. ⓒ NARA
한국전쟁의 비망록

그동안 세 차례 NARA 리서치 작업은 재미 동포 박유종 선생이 헌신적으로 도와주셨다. 그분은 상해 임시정부 백암 박은식 대통령 막내 손자다. 이제는 그분도 80세의 고령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진인사대천명의 심정으로 <박도 선생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쓰기 위해 한번 더 NARA에 가고자 한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을 바란다.

이 모든 일들은 조상님과 순국선열께서 하늘에서 내려 본다는 것을 늘 명심하면서 추진해 나가겠다.
NARA 5층 사진자료실에서 한 사진자료를 두고 스캔 여부를 논의하는 왼쪽의 박유종 선생과 필자. 2005. 12. 1. 제2차 방문 때. ⓒ 박도
[리워드 안내]

<오마이뉴스> '좋은 기사 원고료'로 후원해주신 모든 분들께는 '한국전쟁 사진 2매'를 메일로 랜덤 전송합니다. 그 견본 이미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또 후원자 분들을 위해 기자의 저서 <카사, 그리고 나>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약속> <항일유적답사기>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을 준비했습니다.

종로에서 진행될 '박도 기자와의 차 한잔' 초대권과 강원도 횡성군에서 열릴 '작가와의 대화' 초대장도 리워드로 마련했습니다.

<오마이뉴스> '좋은 기사 원고료'로 후원해주신 독자분들께서는 기자에게 쪽지로 성함과 우편물을 받을 주소, 이메일 주소를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리워드 발송 기준은 스토리펀딩 기준과 동일함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1950.10.31. 원산. 헐벗고 굶주린 아이들이지만 웃음은 떠나지 않는 아이들. ⓒ NARA
1950.9. 한 지아비가 시각장애인 아내를 지게에 진 채 피란길을 떠나고 있다. ⓒ NARA
1950.10. 서울 은평. 한 소녀가 동생을 돌보며 불타버린 야외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 NARA
1953.2.19. 전란 중이지만 설빔을 차려 입은 천진난만한 소녀들이 민속놀이의 하나인 널뛰기를 하고 있다. ⓒ NARA
1950.10. 옹진전투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한 국군 특무상사가 목발을 짚은 채 침통한 표정으로 철조망 앞에 서 있다. ⓒ NARA
기자의 저서. 왼쪽부터 <카사, 그리고 나>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약속> <항일유적답사기>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카카오(다음) 스토리펀딩에도 실렸습니다.

태그:#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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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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