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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영남제일관'은 없었다. 둔탁한 콘크리트의 거대한 위압감이 느껴지는 거대한 현대의 건물만이 금호강을 내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과거 대구 읍성의 남문이자 정문이었던 영남제일관의 이야기다.

대구부성의 정문, 영남제일관

영남제일관은 대구부성의 정문이었다. 1906년 11월 일본인이 되고 싶었던 조선인, 박중양에 의해 성이 무너지기 전까지 대구부성은 1736년 관찰사 조현명에 의해 지어진 이래 수차례의 중·개축을 거치며 대구를 지키고 있었다.

오늘날은 길 이름으로만 남아오는 대구부성이지만, 당시에는 명실상부한 신식 개혁사상을 담아 건축되었던 도시의 상징이었다. 그중에서도 정문이자 남문이었던 영남제일관은 후기 조선 영남의 중심이었던 대구를 드나드는 관문으로 자리를 지켰다. 대구로 새로 부임하던 관찰사들이 가까운 서문을 두고 영남제일관을 통해 대구로 와서 경상감영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은 당시 영남제일관의 당당한 위상을 증언하고 있다.

콘크리트제(製) 영남제일관

영남제일관은 오늘날의 남성로 구 대남한의원 사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오늘 영남제일관을 만나보기 위해 나는 수성구 만촌동 망우당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1906년 박중양에 의해 대구읍성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이후, 수십 년 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했던 영남제일관은 1980년 다른 위치인 이곳에서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가파른 화강암 계단을 올라 영남제일관에 올라보았다.

영남제일관에 올라선 나를 압도한 것은 눈앞에 펼쳐진 금호강의 아름다움도, 거대한 도시의 풍경이 만들어내는 광활함도 아닌 거대한 콘크리트 문루가 만들어내는 위압감이었다. 그것은 나무로 만들어진 고(古)건축이 그가 품어주는 사람들로 하여금 느끼게 하는 편안함보다는, 현대의 콘크리트 아파트가 '입주자'에게 부여하는 위압감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원래 크기의 1.5배 크게 지어졌다는 거대한 규모 역시 콘크리트 벽체가 만들어내는 차가운 기운과 함께 관찰자를 압도하고 있었다.

영남제일관의 기둥은 일부 페인트가 박리되어 속의 콘크리트가 드러나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벗겨진 칠 위에 여러 번 덧칠을 거듭한 이유인지 지저분하고 울퉁불퉁한 자국이 반복되어있었다.
 영남제일관의 기둥은 일부 페인트가 박리되어 속의 콘크리트가 드러나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벗겨진 칠 위에 여러 번 덧칠을 거듭한 이유인지 지저분하고 울퉁불퉁한 자국이 반복되어있었다.
ⓒ 천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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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들여다본 영남제일관의 기둥은 일부 페인트가 박리되어 속의 콘크리트가 드러나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벗겨진 칠 위에 여러 번 덧칠을 거듭한 이유인지 지저분하고 울퉁불퉁한 자국이 반복되어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영남제일루가 더 이상 대구부성의 정문을 자처하던 영남제일루가 아닌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다. 크기와 형태조차 제대로 고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0년 다시 지어진 영남제일관은 그 규모와 형태, 위치 등 모든 방면에서 원래의 그것과 크게 달라보였다.
 1980년 다시 지어진 영남제일관은 그 규모와 형태, 위치 등 모든 방면에서 원래의 그것과 크게 달라보였다.
ⓒ 천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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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배로 크게 지어졌다는 규모를 차치하고서라도, 건축 양식에서조차도 확연한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하단부를 구성하는 무사석(武砂石) 역시 구한말의 사진에서는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각 무사석의 높이가 감소하는 형태이지만, 오늘의 영남제일관에서는 획일화된 석재로 구성되어 있다.

더군다나 벽돌로 만들어진 여장 위에는 구한말의 사진에서는 찾아볼 수조차 없던 석재 구조가 추가되어있다. 상단부는 구조부터 잘못되었다. 6개의 기둥으로 총 5칸이던 문루는 4개의 기둥으로 세워진 3칸 건물로 바뀌어버렸다. 주심포(柱心包)의 형태조차 상이하다. 둥글둥글하고 두꺼운 형태의 공포는 날렵하고 뾰족한 형태가 되어버렸다.

전면에서 보았을 때 1층 문루의 1/3 이상을 차지하던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 현판이 초라해 보일정도로 왜소해진 이유가 문루가 커진 이유인지 현판이 작아진 이유인지는 알 수 없다. 단청조차도 문양과 형태에 차이가 있다.

공간의 의미, 존재의 의미, 역사의 의미

도시 속 수많은 장소들은 각각의 의미를 가진다. 때로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보금자리로써, 때로는 시민들의 휴식처로써, 교육의 장으로써, 수많은 물류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시장으로써 각각의 의미를 가지며, 이는 그들의 존재에 대한 당위성의 부여이기도 하다. 장소가 가진 의미가 과거로부터 이어진 것일 때, 우리는 그 장소를 '유적', '문화재' 등의 수식어를 함께 붙여 말하게 된다.

장소는 그 자체로 여러 가지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장소는 그 공간 자체로의 의미를 가진다. 전국의 수많은 사찰터, 반민특위 표지석,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유지…. 존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멸되었지만, 그 공간은 여전히 과거의 흔적을 간직한 채 의미를 이어가고 있다. 존재의 의미는 그 장소에 공간의 의미를 부여하지만, 공간의 의미와 존재의 의미가 항상 함께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고가도로 건설로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독립문. 지금의 독립문은 과거와 다른 장소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그곳에는 공간의 의미와 별개로 존재의 의미가 이어지고 있다. 특별히 그 존재가 역사적 가치를 가지거나 시대적 대표성을 가질 때 역사적 의미가 부여되기도 한다. 때로는 그 존재가 소멸되었을 때 새로운 존재를 다시 도입함으로써 역사의 의미를 이어가기도 한다. 바로 문화재의 복원이다. 숭례문은 탔지만, 동일한 방법과 소재로 복구한 새로운 숭례문이 그 역사적 의미를 이어가고 있다.

영남제일관에서 내려다보이는 금호강 일원과 동구 일원. 그러나 구한말의 영남제일관에서 바라볼 수 있었던 풍경은 이것과는 크게 달랐을 것이다.
 영남제일관에서 내려다보이는 금호강 일원과 동구 일원. 그러나 구한말의 영남제일관에서 바라볼 수 있었던 풍경은 이것과는 크게 달랐을 것이다.
ⓒ 천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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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잃은 공간은 죽은 공간이다. 그러나 영남제일관에서 나는 이들의 의미를 찾아볼 수 없었다. 영남제일관으로 들어가는 길, 마주친 안내글은 죽은 공간이 되어버린 영남제일관의 운명을 충실히 증언하고 있었다.

"대구 읍성은 1592년(선조23)에 처음 만들때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임진왜란때 허물어진 뒤 1736년(영조12)에 돌로 다시 쌓아 석성을 만들었다. 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정문을 두었는데, 동문은 진동문, 서문은 달서문, 남문은 영남제일관, 북문은 공북문이라 하였다. 1906년 읍성이 철거될 때 성문들도 함게 철거되었다. 이 영남제일관은 1980년 망우공원으로 그 자리를 옮겨 중건한 것으로, 형태는 처음의 모습을 참조하였으나 규모는 원래의 것보다 더 크다."

바꾸어진 공간에서 공간의 의미는 소멸되었고, 1906년 철거되면서 존재의 의미는 함께 잊혀졌다. 처음의 모습은 '참고'하고 크기를 키운 영남제일관은 역사의 의미 마저 잃은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고증되지 않은 역사는 '소설'일 뿐이다

영남제일관 앞의 작은 공원에서는 많은 노인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장기를 두며 자리를 지키던 그들의 대화에는 훈수와 더불어 그들의 젊은 시절에 대한 회상이 오고갔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아 이곳을 찾아온 듯한 그들의 대화에는 유난히 큰 소리가 자주 울려 퍼져있었고 들떠 있었다.

자신의 젊은 시절을 이야기하던 그의 대화에는 조금씩 새로운 이야기가 각색되어가고 있어보였다. 이제는 그 자신도 과장된 진실과 원래의 기억을 구분하지 못하는 듯 했다. 그렇게 과거의 사실은 각색된 진실이 된 채 기억되고 있었다. 그리고 각색된 노인의 이야기처럼 우리들에게 복원된 영남제일관은 각색된 진실이 되어 기억되고 있는 듯했다.

오늘 내가 본 영남제일관은 더 이상 수 백 년 전 성곽도시 대구의 정문을 자처하던, 수많은 행인들이 드나들었던 영남제일관이 아니었다. 처음의 형태를 '참조'하여 원래의 것보다 '크게'지어진 콘크리트 영남제일관은 1980년의 구조물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어 보였다.

문화재의 복원도, 건축물의 중건도 '콘크리트' 영남제일관의 탄생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훗날 영남제일관은 수많은 사람이 드나들었던 대구읍성의 정문보다는, 산업 사회의 슬픈 자화상으로 기억되며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


태그:#영남제일관, #망우당공원, #문화재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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