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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를 걷고 있는데, 길 한복판에 푯말을 든 사람이 서 있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 붉은 바탕에 노란색 고딕체로 쓴, 익숙한 형식과 내용의 글귀였다.

별생각 없이 지나쳐 가는데, 그가 나를 향해 소리쳤다.

"짐승의 숫자 666 받지 마세요!"

"그 '짐승의 숫자'는 어디 가면 받을 수 있나요?" 이렇게 묻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으나, 고개를 돌려 계속 걸었다. 대꾸하려던 것이 꼭 짓궂은 장난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무섭다는 '짐승의 숫자'를 어디서 나눠주는지 알아야 피할 수도 있을 것 아닌가?

하지만 묻는다 해도, 명확한 답을 듣지는 못할 것이다. "그럴 때가 와요" 식의 막연한 답변이 돌아올 터이다. 그 역시 자신을 말세론으로 이끈 사람으로부터 그 이상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막연함'은 그의 확신과 충성심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런 막연한 두려움이야말로, 온종일 그를 뜨거운 태양 아래 서 있도록 만든 원동력일지도 모를 일이다

애써 번 돈을 땅속에 투자하고 있는 미국인들처럼 말이다.

'말세'를 준비하는 미국인들

 미국에서 성황리에 판매되는 '지하 벙커' 광고. 가장 값싼 '미니벙커'가 한국 돈으로 5천 만 원이 넘는다. 미국에서 '벙커 산업'은 트럼프 집권 후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미국에서 성황리에 판매되는 '지하 벙커' 광고. 가장 값싼 '미니벙커'가 한국 돈으로 5천 만 원이 넘는다. 미국에서 '벙커 산업'은 트럼프 집권 후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 Rising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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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 미국 내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사업 분야가 있다. 바로 '지하 벙커' 건설업이다. 핵 공격을 받아도 끄떡없는 (정확히는 그럴 거라고 주장하는) 비밀 대피소를  땅 속에 지어주는 사업이다.

최근 영미 언론은 미국 남부를 중심으로 부흥하고 있는 벙커산업을 특집으로 다뤘다. 엔비씨(NBC) 뉴스는 텍사스에서 맹활약 중인 업체 '라이징 에스(Rising S)' 대표 클라이드 스콧을 인터뷰했다. 그는 트럼프 집권 직후 매출이 한 달 새 무려 500~700%나 증가했다고 자랑했다.

물론, 벙커산업은 트럼프 이전에도 존재했었다. 예컨대 오바마 시절에도 경기는 나쁘지 않아, 250% 정도씩 꾸준히 성장했었다. 하지만 결코 트럼프 시절과 같은 호경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매출만 오른 게 아니다. 고객들이 벙커를 주문하는 이유 자체가 크게 달라졌다. '라이징 에스'는 오바마 정부 때 사업을 시작했는데, 벙커는 주로 총기나 개인 재산을 감추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총과 재물을 왜 지하에 감추려 했을까?

 '핵전쟁에도 끄덕 없다'고 광고하는 지하 벙커의 광고 영상. '고급 모델'은 수억
 원에서 수십 억 원에 달한다.
 '핵전쟁에도 끄덕 없다'고 광고하는 지하 벙커의 광고 영상. '고급 모델'은 수억 원에서 수십 억 원에 달한다.
ⓒ Rising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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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다. 오바마는 후보 시절부터 총기 규제의 필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규제'라고 해 봐야, 판매업자들에게 면허를 요구하고, 구매자들의 신원조회를 의무화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로 도입된 정책 역시 이 수준을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총기 소지자들 사이에서는 '앞으로 총을 못 사게 될 것'이라거나, '정부가 와서 총을 빼앗아 갈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오바마가 당선된 2008년과 재선에 성공한 2012년에 총기 판매량은 가파르게 치솟았다.

총은 그렇다 치고, 재산을 숨기려던 까닭은 무엇일까? 보수세력들 가운데 오바마를 '공산주의'나 '빨갱이'라고 비난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서 한국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 온 반공주의의 원조가 미국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 무시무시한 '공산당 정부'가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그러니 감출 수 있는 건 뭐든 감춰야 했다.

이제 오바마 정부는 과거가 되었고, 새로운 대통령이 부임했다. 그러나 벙커 파던 미국인들의 두려움은 줄기는커녕 몇 배로 커졌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보수주의자들, 자기들이 뽑아 놓고 두려움에 떨다

 지하벙커의 홍보 이미지. '구매자금대출 가능'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지하벙커의 홍보 이미지. '구매자금대출 가능'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 Rising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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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는 절대 뒤로 물러설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면 김정은이나 푸틴 같은 '사이코'들과 한 판 붙어야 할 지 몰라요."

클라이드 스콧은 <인디펜던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흥미롭게도, 벙커 사업이 번창하는 곳은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지역이고, 특히 트럼프 지지도가 높은 지역이다. 스스로 트럼프를 찍어 놓고 나서 그 결과가 두려워 땅속에 숨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지난 대선에서 한국에서 일어난 상황과도 일치한다. "북한과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말하던 보수 정당의 대통령 후보가 갑자기 "좌파 정권이 들어서면 트럼프가 북을 선제타격할지 모른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후보는 더 나아가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사실상 김정은이 되는 것"이라는 논리까지 내놓았다.

대선 직전에 폭등한 홍준표 후보 지지도는 막판에 조장된 공황상태와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보수 유권자들 사이에는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면 북한이 핵미사일을 쏠 것"이라는 뜬금없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왜 문재인이 '빨갱이'인지, 왜 북한이 '빨갱이'에게 미사일을 쏘는지 (홍준표 논리대로라면 '사실상' 김정은이 김정은을 향해 미사일을 쏘는 셈이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보수정부가 집권할수록 전쟁의 위험이 커진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북한이 행한 5번의 핵실험 가운데 무려 4번이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일어났지만, 이런 객관적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본래 공포심은 합리적인 판단의 결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니까.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아이러니는, 종교와 보수주의가 사람을 끌어들이는 무기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 준다. 그것은 공포감이다. 근거를 찾을 수 없는 막연한 공포감.

현재 주문이 밀려서 고민이라는 '라이징 에스' 대표는 본래 '말세를 준비하는' 종교인들의 피난처를 지어주는 일을 했었다. '라이징 에스'라는 사업체명 역시 '부활하는 아들(Rising Son)'이라는 종교적 명칭에서 따온 것이었다.

종교적 묵시론은 반공주의와 정치적 보수주의로 '사업 모델'을 바꾸어 성업 중이다. 공포의 효과는 즉각적이고 그 대가는 크다. 미국에서 팔리고 있는 벙커는 최저가 '미니 형'이 한국 돈으로 5000만 원을 넘어선다.

하지만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거나 자신의 일생을 내어주는 데 비하면 그나마 싼 편이다.

벙커, 종말론, 사드

 군사전문지 <내셔널인터레스트>. 사드가 북한 미사일 방어용이 아니라 중국 견제용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군사전문지 <내셔널인터레스트>. 사드가 북한 미사일 방어용이 아니라 중국 견제용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 내셔널인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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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THAAD)'는 한국에서 여러모로 골치거리다. 무기의 효율성부터 (한 번도 실전에 사용된 적이 없다), 중국의 반대로 인한 경제보복, 박근혜 정부 시절의 미심쩍은 배치 과정과 최근 보고 누락(혹은 은폐)에 이르기까지 여러모로 논란이 되고 있다.

이 무기가 몰고 온 혼란에 비하면, 이 방어체계에 대한 합리적이고 전문적인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직 북핵에 대한 공포와, '미국의 뜻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또 다른 공포감이 '한미 동맹'이라는 걸맞지 않은 이름으로 유포되고 있을 뿐이다.

전문가들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동의하고 있다. 첫째, 사드 배치는 북한보다 중국을 겨냥한 조치이고, 둘째는 사드가 북한의 대남 공격을 막는 데 효과가 없다는 점이다.

예컨대 국방전문지 <내셔널인터레스트>는 사드 한국 배치 문제로 들끓던 2016년 2월에 특집기사를 냈다. 기사의 핵심은 제목이 잘 요약해 준다. "사드는 북한 미사일 방어보다 중국 채찍질하기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내셔널인터레스트>는 사드의 근본적 한계를 지적한다. 북한의 대륙간탄도 미사일은 남한을 겨냥하고 있지도 않고, 사드로 방어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북한의 주력 무기인 저고도 포와 미사일에 대해 사드는 완전히 무용지물이라는 점도 아울러 지적한다.
 <내셔널인터레스트>는 사드의 근본적 한계를 지적한다. 북한의 대륙간탄도 미사일은 남한을 겨냥하고 있지도 않고, 사드로 방어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북한의 주력 무기인 저고도 포와 미사일에 대해 사드는 완전히 무용지물이라는 점도 아울러 지적한다.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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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는 '사드' (고고도 방어체계)가 중거리나 중단거리 미사일 방어용으로 개발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다시 말해, 저고도 미사일이나 장거리 미사일에는 쓸모가 없다는 점이다. 이 점은 개발·판매사인 록히드 마틴도 동의하는 부분이다.

대륙간탄도탄은 사드가 잡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애초에 북한이 남한을 공격할 가능성 자체가 없는 무기이다. <내셔널인터레스트>는 한반도 전체를 따져도 1100킬로미터 밖에 안 되는데, 북한이 사거리 5500km가 넘는 대륙간탄도탄을 남한으로 쏘는 바보짓을 왜 하겠느냐고 지적한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에서 사드 논의가 시작된 동기가 북한의 대륙간탄도탄(ICBM) 개발이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사드가 완전히 무용지물인 무기체계에 대응해 사드 배치를 강행한 것이다.

모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북한이 서울 공격용으로 전략 배치한 장사정포나 방사포 대해 사드는 완전히 먹통이기 때문이다. '고고도'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사드는 대기권 안팎으로 높이 나는 미사일을 요격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무기이다.

 북한 전문매체 '38 North'의 보고서에 수록된 이 사진은 사드의 본질과 한계에 대해 많은 점을 말해준다. 하나는 중국의 우려대로, 레이더가 중국 정찰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의 미사일 감시에 비효율적이라는 점이다. 그림이 보여주듯, 해상에서 발사된 미사일은 레이더에 전혀 포착되지 않는다.
 북한 전문매체 '38 North'의 보고서에 수록된 이 사진은 사드의 본질과 한계에 대해 많은 점을 말해준다. 하나는 중국의 우려대로, 레이더가 중국 정찰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의 미사일 감시에 비효율적이라는 점이다. 그림이 보여주듯, 해상에서 발사된 미사일은 레이더에 전혀 포착되지 않는다.
ⓒ 38 No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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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노스'가 발간한 보고서 "사드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역시 사드의 기본적 한계를 지적한다. 만일 북한이 미사일 20발 이상을 동시에 쏠 경우, 레이더가 무력화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북한이 잠수함을 이용해 바다에서 미사일을 쏠 경우, 추적 자체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북한의 핵이 남한을 겨냥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남한에 배치 중인 사드가 북핵을 겨냥한 게 아니라는 전문가의 진단 역시 중요하지 않다. 본래 공포는 합리적인 판단의 결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그 공포를 조장해 이득을 챙기는 세력이 있다. 그것이 사드이든, 벙커산업이든, 종말론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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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통신원입니다.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언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 기...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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