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예술과 산업은 영화의 두 얼굴이다. 작가가 자기 색을 녹여 창작물을 빚어내기에 예술이며 완성된 작품이 관객과 만나 대가를 얻는다는 점에서 산업이다. 영화를 오롯이 그들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자본가와 순수주의자들의 끊임없는 시도에도 두 얼굴 가운데 어느 하나만 취하고 다른 하나를 떼어버리는 건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은 일이다.

물론 두 얼굴이 언제나 완벽한 비율로 나뉘는 건 아니다. 그런 완벽함은 하룻밤에 양념반 후라이드반 주문이 기백 마리씩 밀려드는 프랜차이즈 치킨집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작가의 색채가 지나치게 강해 배급자조차 난색을 보이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수십 번을 봐도 다른 영화와 차별점을 찾아내기 어려운 작품도 있는 게 현실이다. 어떤 영화는 포스터만 보고도 흥행실패를 직감하게 되고 다른 영화는 오로지 돈만 보고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도 한다. 언제나 그러하듯 참된 작가가 나아갈 길은 그사이 어디쯤 있기 마련이다.

지난 5월 24일 개봉해 200만 관객을 돌파한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예술보다는 산업의 측면에 치중한 영화다. 천문학적 자본이 투입된 흥행시리즈이기에 당연한 일이겠으나 그 정도가 도를 넘어섰다는 생각도 든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시리즈 다섯 번째 영화로 3편인 <캐리비안의 해적 - 세상의 끝에서>가 마지막이 될 것처럼 마케팅이 이뤄진 뒤 나온 '무려' 두 번째 영화다. 감독인 고어 버빈스키와 사실상 주인공 격이었던 올랜도 블룸, 키이라 나이틀리가 모두 하차하고도 두 편이나 더 나왔다는 점에서 시리즈를 이어가겠다는 제작사의 의지가 대단하다 하겠다.

예고된 속편, 기약된 성취... 그러나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엘리자베스 스완(키이라 나이틀리 분)의 공백을 어느정도 메우는데 성공한 카야 스코델라리오. 하지만 그저 메우는 걸로 충분할까?

▲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엘리자베스 스완(키이라 나이틀리 분)의 공백을 어느정도 메우는데 성공한 카야 스코델라리오. 하지만 그저 메우는 걸로 충분할까?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5편 제작은 예고된 일이었다. 차포를 모두 갈아 끼우고도 오로지 조니 뎁이 연기한 캡틴 잭 스패로우의 캐릭터에 의지해 만든 4편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가 매출액만 10억 달러가 넘는 대성공을 거뒀으니 말이다. 말만 시리즈일 뿐 사실상 스핀오프(본 시리즈의 캐릭터를 활용하면서도 본 내용과는 크게 상관없는 내용을 풀어가는 작품을 이름. <울버린> <미니언즈>가 대표적) 격으로 만든 영화에 이토록 많은 관객이 들었으니 제작사 입장에선 위험을 감수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구상할 필요가 없었을지 모르겠다. 연출 역시 롭 마샬에서 보다 몸값이 싼 요아힘 뢰닝, 에스펜 산드베르그에게 넘어갔다.

뚜껑을 연 영화는 전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캐리비안의 해적>시리즈의 리부트"라는 올랜도 블룸의 말은 영화가 기존 시리즈와 줄기를 완전히 달리하고 있다는 뜻에 불과하다. 영화는 전편에서 윌 터너(올랜도 블룸 분)가 걸린 저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전편으로부터 이어진 시리즈임을 선언하는 듯하지만 이후 진행되는 이야기는 그와는 전혀 딴판이다. 악역 살라자르(하비에르 바르뎀)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언급된 적 없는 인물이고 그건 새로 등장하는 인물 모두가 그렇다. 이들은 다짜고짜 등장해 저마다의 사연을 풀어놓고는 그동안 수십 번도 더 봤을 매우 흔한 방식으로 사라져간다.

캐릭터와 이야기는 바뀌었지만 지난 시리즈의 주요 설정은 인물만 바꿔 그대로 복제된다. 윌 터너와 엘리자베스 스완(키이라 나이틀리 분)이 잭 스패로우와 예기치 않은 동행을 했던 1편 <캐리비안의 해적 - 블랙 펄의 저주> 속 설정은 이들 사이에 태어난 헨리 터너(브렌튼 스웨이츠)와 특별한 사연을 지닌 여인 카리나 스미스(카야 스코델라리오 분)를 통해 그대로 반복된다. 각기 윌과 엘리자베스의 역할을 계승한 두 젊은이는 전 세대 주인공들이 그랬듯 사형장에서 극적으로 탈출하고 해적에게 납치되며 그 해적과 함께 예정된 승리를 거머쥔다.

영화는 살라자르에게 1, 2편의 악역 바르보사(제프리 러쉬 분)와 데비 존스(빌 나이 분)의 캐릭터를 한 번에 입히려고도 시도한다. 달빛을 받으면 해골로 변하는 바르보사의 저주가 악마의 삼각지 안에 좀비가 되어 갇힌 살라자르의 저주로 옮겨왔고 데비 존스의 유령선 플라잉 더치맨 호는 살라자르의 사일런트 메리 호로 대체됐다. 크라켄과 같은 괴수는 뼈만 남은 고스트 샤크가 대신한다.

할 말도 없는데 억지로 하는 경우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다른 무엇보다 딸을 사랑하지만 그녀를 20년 넘게 고아원에 처박아둔 인물로 표현된 헥터 바르보사 선장(제프리 러쉬 분). 오스카의 주인인 그조차도 이 같은 감정을 소화하긴 역부족이었다.

▲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다른 무엇보다 딸을 사랑하지만 그녀를 20년 넘게 고아원에 처박아둔 인물로 표현된 헥터 바르보사 선장(제프리 러쉬 분). 오스카의 주인인 그조차도 이 같은 감정을 소화하긴 역부족이었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이처럼 영화가 지난 시리즈에서 효과를 본 코드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으나 성과가 같을지는 미지수다. 눈치 빠른 관객은 한 번 드러난 패에 환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잭 스패로우의 노쇠화가 역력해 액션을 보는 맛도 예전만 못하다. 촬영 중 있었던 부상을 감안하더라도 몸 사리는 모습이 눈에 띄게 많다. 그의 캐릭터가 사실상 영화를 지탱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남은 시리즈가 그리 길지는 않을 듯하다.

결국 문제는 예술의 영역에서 발생했다. 주지하다시피 예술이란 작가의 표현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영화를 보고 있자면 작가가 더는 표현하고 싶은 게 과연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돌이켜보면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는 처음 세 편의 영화로 이야기의 끝을 맺었고 스핀오프 격인 4편으로 생명을 잠시 잠깐 연장한 것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새로운 인물을 내세워 새 출발을 하려 한 리부트 영화가 기존에 보여준 것과 별반 차이가 없으니 이런 생각이 안 들래야 안 들 수가 없는 노릇이다.

더 할 말이 없는 상황에서 억지로 한 편의 이야기를 다시 만들려다 보니 무리수를 둔 부분도 적지 않다. 급조된 악역은 자신이 품은 원한을 대사로 줄줄이 풀어놔야 했고 난데없이 아빠가 된 바르보사는 그에겐 결단코 어울리지 않는 부성애를 마른 튜브에서 치약 짜내듯 쥐어짠다. 총체적 난국 속에서 영화의 하이라이트로 준비되었을 악당의 소멸과 부성애의 발현은 별다른 감흥을 일으키지 못한다. 시리즈를 모두 챙긴 팬의 입장에선 안타까운 일이다.

생각해보면 모두가 돈 때문이다. 나오는 영화마다 천문학적 수익을 기록하니 제작사가 시리즈를 먼저 놓기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노릇이다. 그렇다고 2억3000만 달러를 퍼부어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영화를 내놓는 건 적어도 예술의 영역에선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다. 관객이 그저 잭 스패로우의 껍데기를 보겠다고 극장을 찾는 게 아니라는 걸, 영화는 산업의 얼굴 이면에 예술의 얼굴을 갖고 있음을 제작사가 통감해야 할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는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살라자르가 이끄는 유령선 사일런트 메리 호가 상대 선박을 덮치는 모습. 지난 시리즈의 시각적 충격으로부터 <죽은 자는 말이 없다>가 그닥 나아가지 못한 것이 지난 시리즈의 성과일까 이번 시리즈의 실패일까.

▲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살라자르가 이끄는 유령선 사일런트 메리 호가 상대 선박을 덮치는 모습. 지난 시리즈의 시각적 충격으로부터 <죽은 자는 말이 없다>가 그닥 나아가지 못한 것이 지난 시리즈의 성과일까 이번 시리즈의 실패일까.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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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오마이뉴스 스타팀에서 방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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