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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왈샤 마을 머리맡에 티베트 불교의 창시자로 알려진 ‘연꽃에서 태어난 성자’, 파드마 삼바바의 불상이 우뚝 서 있다.
 리왈샤 마을 머리맡에 티베트 불교의 창시자로 알려진 ‘연꽃에서 태어난 성자’, 파드마 삼바바의 불상이 우뚝 서 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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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살라에서 '티벳 죽음의 서'의 저자인 파드마 삼바바의 수행터, 리왈샤(Rewalsar)로 가려면 중간에 만디(mandi)라는 곳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다람살라에서 로컬버스로 대략 6시간~7시간 정도 달려 도착한 만디는 중소도시였다. 도시 한복판을 가로 지르는 강줄기 곳곳에 크고 작은 힌두 사원들이 들어서 있다.

혼잡한 터미널에서 혹시나 잘못된 정보를 얻을까 싶어 서너 사람에게 재차 리왈샤 가는 버스 편을 알아봤는데 대부분 리왈샤를 잘 알고 있었다. 구글 지도에는 '레발저'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곳 현지인들은 '리벌샤' 혹은 '리왈샤'로 발음하고 있었다(라다크 사내 쿤가는 '리벌샤'로 발음 했지만 이곳 현지인들의 발음대로 '리왈샤'로 표기함).

리벌샤 가는 버스는 한두 시간 간격으로 운행되는 듯했다. 버스는 혼잡한 도시를 통과해 고불고불한 산길로 접어들었고 산 중턱을 오를 무렵에는 유일한 외국인인 나를 포함해 다섯 명의 인도 사람들이 전부였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맥간에서 만난 라다크 출신, 쿤가의 말에 따라 모노 스피릿 게스트 하우스를 찾아 여장을 풀었다. 쿤가의 말대로 맥간에서 머물렀던 칼쌍 게스트 하우스만큼이나 숙박료가 저렴했다. 작은 방은 150루피, 큰 방은 250루피 정도 했다. 작은 방이 없어 큰 방을 잡았다. 맥간에서처럼 작은방을 쓰게 되면 공동화장실과 공동욕실을 사용해야 하지만 큰 방에는 화장실겸 욕실이 설치되어 있었다.

무거운 배낭을 숙소에 풀어놓고 밖으로 나섰다. 리왈샤 마을 머리맡에는 티베트 불교의 창시자로 알려져 오고 있는 파드마 삼바바를 형상화 시킨 거대한 불상이 우뚝 서 있고 그 아래로 큰 호수가 있다. 호수 주변에는 식당과 숙박업소들이 들어서 있고 티베트 불교 신자들이 염주를 굴리며 그 호수 주변을 돌고 있었다.

티베트 불교의 성지로 알려져 있는 리왈샤는 티베트 사원뿐만 아니라 힌두사원, 시크교 사원이 들어서 있다. 3백여 가구에 불과해 보이는 이 작은 마을에 힌두교, 불교, 시크교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장시간 버스에 실려 온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먼저 식당을 찾아 나섰다. 티베트 사람들이 즐비한 이곳 리왈샤에서도 자오민과 모모 그리고 수제비 종류인 뗀둑과 국수 종류인 뚝바를 요리하는 식당들이 여럿 있었다. 버스 정거장 주변에는 과일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해 인도와 네팔을 떠돌며 즐겨 먹었던 망고, 바나나, 파파야, 토마토 등을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선은 말할 것도 없이 돼지고기나 양고기를 먹을 수 있는 식당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맥간에서 체력을 충전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몸이 회복되지 않았다. 노트북 앞에 한 두 시간만 앉아 있어도 온몸의 기가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한두 끼로는 버틸 재간이 없어 두세 끼로 식사량을 늘렸지만 몸 상태는 여전했다.

탄두리 치킨이라도 먹고 싶어 찾아보았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생닭을 파는 상점이 한두 군데 있을 뿐이다. 사원 주변의 식당들이 그러하듯 대부분 채식 식당이었다. 고기 음식이라고 해봤자 뗀뚝이나 뚝바에 양고기 몇 점 들어간 것이 전부다.

생각해 보니 거대한 파드마 삼바바 불상이 마을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곳 리왈샤 마을 전체가 거대한 사원이나 다름없었다. 고깃집이 즐비한 한국 불교의 사찰 주변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한국은 일주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경내로 들어선다. 하지만 이곳 리왈샤는 버스 주차장에서 내려 몇 미터만 걸어 들어가면 일주문을 통과한 기분이 든다. 이런 신성한 마을에서 고깃집을 찾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었다.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도 쉽게 볼 수가 없다. 대낮부터 술에 취한사람도 볼 수 없다. 술 마시는 사람도 보지 못했다. 다만 술파는 가게가 한두 군데 있었지만 술집은 눈에 띄지 않는다. 염주를 비롯한 종교 용품을 파는 몇몇 가게들이 눈에 띄지만 기념품을 사라고 옷소매를 잡아끄는 사람들도 없다.

보통 인도의 사원 근처에서는 손 내미는 걸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데 이곳에는 그런 걸인들조차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호수 주변의 그늘 밑에서 경전을 펼쳐놓고 앉아 있는 젊은 티베트인과 깡통 하나를 앞에 두고 경전을 읊조리고 앉아 있는 늙은 인도 사람이 전부다. 표 나지 않게 손 내밀고 있는 그들에게 지나는 사람들이 한두 푼씩 적선하고 있었다.

티베트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에 어김없이 휘날리는 룽타. 부처님의 말씀을 새긴 룽타를 설치하는 시크교인
 티베트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에 어김없이 휘날리는 룽타. 부처님의 말씀을 새긴 룽타를 설치하는 시크교인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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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어김없이 부처님의 진언을 새긴 돌이며 오색 깃발, 룽타(다르촉)를 쉽게 볼 수 있다. 이곳 리왈샤 역시 호수 한옆에 오색 깃발들이 무더기로 내걸려 있었다.

룽타는 오색 천에 부처님의 말씀을 새겨 깃발로 세우고 바람에 날리는 것이다. 깃발에 적혀진 부처님의 말씀이 바람을 타고 온 세상에 두루 퍼져 나가길 기원하는 룽타는 한자로 '바람의 말' 풍마(風馬)라고 한다. 룽타의 다섯 가지 색은 청색, 백색, 적색, 녹색, 황색.

룽타 깃발을 사진에 담고 있는데 티베트 인이 아닌 터번을 두른 인도 사람이 오색 깃발을 내걸고 있었다.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불교 신자입니까?"
"아니요. 시크교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불교 신자처럼 롱타를 내 걸고 있습니까?"
"부처님이나 시크교 신이나 그 말씀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힌두교와 이슬람을 통합한 시크교는 신에게 경배를 올리고 인류에 봉사해 가며 선한 마음으로 살아가다 보면 그 속에서 신과 마주하게 된다고 믿고 있다. 이들은 종교적인 명상과 봉사를 통한 선한 행동을 통해 다섯 가지의 악으로 여기고 있는 오만, 욕망, 탐욕, 분노, 집착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시크교의 교리는 탐욕스럽고 분노하고 어리석은 탐진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불교의 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크교에서 말하는 신과 마주하는 것은 탐진치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종교를 초월하여 부처님의 말씀이 새겨진 룽타를 내 걸고 있는 시크교의 모습은 리왈샤가 어떤 마을인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수많은 종교들이 공존하고 있는 인도가 종교의 나라라 불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분명 한국 종교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한국에서는 한 마을에 세 가지의 종교가 서로를 받아줘 가며 공존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한국에서도 한때 오만 가지의 종교가 공존하는 인도와 같은 마을이 있었다. 계룡산 신도안 마을이 그랬다. 한때 3천여 명의 종교인들이 모여 살던 신도안에는 무려 3백여 가지의 종교가 있었다. 그들은 종교의 나라 인도에서처럼 종교의 마을, 신도안에서 서로 공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도처럼 다양한 생각과 다양한 사상, 다양한 종교가 공존했던 신도안 마을 사람들은 1970년대 산림녹화 사업의 일환으로 마을을 떠나야 했다.

한국의 큰 종교 단체에서는 그들을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사이비 종교집단으로 몰아갔다. 분명 그들 중에는 사이비 종교단체가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과 종교가 다른, 족보도 없는 작은 종교단체라 하여 무조건 사이비 종교 단체라 취급하는 것은 사상이 다르다고 국가보안법으로 옭아 메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한국의 큰 종교 단체들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되새겨 봐야 할 것이다. 좀 도둑은 몇몇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지만 큰 도둑들은 사회 전체에 엄청난 해악을 끼치기 때문이다.

리왈샤 호수 주변을 도는 순례자.
 리왈샤 호수 주변을 도는 순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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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의 염주
 순례자의 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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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여덟시. 어지간한 상점은 이미 문을 닫았다. 종소리가 마을 전체로 울려 퍼지고 있다. 어느 사원에서는 종교색 짙은 음악소리가 흘러나오고 경을 읊조리는 소리며 뿔피리 소리가 웅장하고 나지막하게 들려온다. 그 소리가 해질녘 소 울음소리처럼 평화롭게 다가온다.

파드마 삼바바가 내려다보고 있는 리왈샤 마을의 불교, 시크교, 힌두교가 각각의 종교가 아니라 하나의 인도 종교라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이 시간 집집마다에서 저마다의 종교 교리에 따른 기도를 올리지 않을까 싶다. 나직하게 만트라를 읊조리고 있는 옆방의 티베트 중년 사내처럼.

나는 반복되는 정전에 하루 일과를 기록하던 노트북을 덮어놓고 밖으로 나와 어둠에 잠긴 마을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모노 스피릿 게스트하우스 이층 숙소에는 호수 주변으로 둘러서 있는 마을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

아홉시 반. 염주를 굴리며 호수 주변을 도는 순례자들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마을은 묵상하는 수행자처럼 고요에 잠기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영역 다툼을 하는 원숭이들과 개들이 짖어대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비좁은 골목을 질주하는 오토바이 소리가 들린다. 살아 있는 동물과 사람의 소리, 하지만 그 적막을 깨는 소리는 오래가지 못한다. 5분도 채 안 돼 다시 적막이 흐른다. 거센 바람이 가끔씩 창문을 세차게 흔들어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래미 알바레즈. 티베트 불교에 매료 돼 지구의 반 바퀴를 날아온 멕시코 출신의 동갑내기를 만났다.
 래미 알바레즈. 티베트 불교에 매료 돼 지구의 반 바퀴를 날아온 멕시코 출신의 동갑내기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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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미와 함께 동행한 파드마 삼바바의 동굴 수행터로 가는 버스는 만원이었다. 버스 지붕위에 까지 사람들로 가득했다.
 래미와 함께 동행한 파드마 삼바바의 동굴 수행터로 가는 버스는 만원이었다. 버스 지붕위에 까지 사람들로 가득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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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부터 파드마 삼바바가 수행을 했다는 동굴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게스트하우스 관리소에 갔더니 머리를 삭발한 외국인 사내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멕시코에서 왔다는 그 또한 파드마 삼바바의 동굴을 찾아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멕시코는 가톨릭 신자들이 많지 않나요?"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나는 불교 신자입니다."
"불교는 어떻게 접했나요?"
"멕시코에서 티베트 승려로부터 강연을 듣고 나서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영어가 짧아 불교에 대한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그는 티베트 불교를 직접 만나기 위해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온 대단한 사내였다. 면도기로 매끈하게 민 '스킨헤드'의 나치주의자들처럼 얼핏 인상이 험악해 보였지만 그의 말투는 다정다감했고 늘 선한 웃음을 내보였다. 그의 이름은 래미 알바레즈(Remi Álvarez). 나는 그를 '래미'라 불렀고 그는 나를 '송'이라고 불렀다.

"송, 당신은 수행자입니까?"
"아닙니다. 한국의 수행자들은 대부분 래미, 당신처럼 스킨헤드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수행자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살려고 하지만 그게 쉽지 않습니다."

나이가 같은 그와 나는 둘 다 다리를 절룩거렸다. 그는 새로 구입한 운동화가 발에 맞지 않아 물집이 생겨 걸음걸이가 불편했고 나는 북인도 코사니에서 다친 무릎 때문에 여전히 절룩렸다. 그는 박박 머리였고 내 머리는 어깨까지 내려와 치렁치렁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이 절룩거려가며 나란히 걷다보면 주변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리왈샤에 머무는 동안 수행자도 아니면서 수행자처럼 틈만 나면 명상을 했다.

오전 오후, 하루에 두 차례 운행하고 있다는 파드마 삼바바의 동굴 수행지로 가는 버스는 겨우 두 다리로 버티고 설 만큼 버스는 만원이었다. 버스 지붕 위에 까지 사람들로 가득했다. 대부분 티베트 순례자들이었는데 터번을 두른 시크교 사람들과 힌두교 모자를 쓴 인도사람들 또한 심심찮게 보였다.

파드마 삼바바 동굴 수행터 아래로 메마른 호수가 보인다.
 파드마 삼바바 동굴 수행터 아래로 메마른 호수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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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드마 삼바바가 수행했다는 동굴은 리왈샤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산머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동굴 아래로 메말라 가는 호수가 있었다. 속살이 훤히 보이는 호수 주변으로 늙은 양치기가 물을 주기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양떼들을 몰고 가고 있었다.

파드마 삼바바 동굴 사원은 2층 건물이었지만 화려한 리왈샤 마을의 사원들에 비하면 소박했다. 동굴 사원에는 티베트 비구니 스님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진한 향 냄새가 온몸으로 휘감아 왔다. 동굴 한 가운데는 파드마 삼바바의 불상이 높다랗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한 옆에는 파드마 삼바바와 함께 이 동굴에서 수행을 하여 여성의 몸으로 높은 성취를 이뤘다는 부탄의 만다라 공주를 상징하는 작은 불상도 놓여 있었다. 그 만다라 공주의 불상은 이곳 동굴 주변에서 수행하는 스님들 중에 비구니 스님들이 많은 이유를 짐작하게 해주었다.

그렇다면 파드마 삼바바는 누구인가? '티베트 사자의 서'의 저자인 파드마 삼바바(Padmasambhava), 그 이름에는 연꽃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또한 부처가 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비와 지혜의 완벽함을 상징하는 구루 린포체(Guru Rinpoche: 존귀하신 스승이라는 뜻)로도 불리고 있다.

8세기 인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파드마 삼바바는 싯다르타처럼 인도의 한 왕국의 왕자였고 왕위를 계승할 나이가 되었을 때 태자의 자리를 버리고, 밀교수행자가 되어 고행 길을 떠났다고 알려져 오고 있다.

밀교를 수행하여 주술적 능력이 뛰어났다고 알려진 그는 8세기 티베트의 티송데첸왕의 초청을 받아 티베트로 건너간다. 당시 티베트는 귀족들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이 믿고 있는 토속종교인 본교의 세력이 강했다. 티송데첸왕은 본교의 신들이나 악마를 제압한 능력자, 파드마 삼바바를 통해 티베트 불교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파드마 삼바바는 티베트 라사의 챵포 강을 역류시키는 등의 많은 기적을 일으키고, 금을 모래로 변하게 하였다가 다시 금으로 환원시키는 신통력을 구사했다는 신비한 일화들이 전해져 오고 있다. 하지만 그의 위력에 위협을 느낀 대신들의 노여움을 사서 국외로 추방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럼에도 파드마 삼바바는 인도의 밀교를 티베트에 처음 전하여 티베트 불교를 창시한 상징적 인물로 받들고 있다.

파드마 삼바바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사후 세계의 안내서로 불리고 있는 그의 저서 <티베트 사자의 서>다. <티베트 사자의 서>는 1927년 서방세계에 처음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티베트 학승 라마 카지 다와삼둡이 영역하고, 영국의 종교학자 에반스 웬츠가 편집해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출판한 이 책은 '이집트 사자의 서'와 비교되면서 서구의 기독교적 영혼관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 책은 특히 집단무의식 이론을 세운 심리학자 칼 융에게 깊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

부탄의 만다라 공주와 함께 파드마 삼바바가 수행했다는 동굴에서 명상에 잠긴 레미.
 부탄의 만다라 공주와 함께 파드마 삼바바가 수행했다는 동굴에서 명상에 잠긴 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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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미와 나는 파드마 삼바바 불상을 앞에서 명상을 했다. 눈을 감고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밖은 땀이 흐를 정도로 더운데 안은 한기가 느껴졌다. 내 몸이 여러 차례 부르르 떨려왔다. 어쩌면 한기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 몸과 마음을 짓누르는 어떤 음산한 기운은 무엇일까.

나는 그 음산한 기운을 견디지 못했다. 명상을 시작한 지 한 시간도 채 안 돼 자리를 털고 일어나 명상에 잠겨 있는 래미를 두고 동굴을 빠져나왔다. 파드마 삼바바의 기운이 서려 있다는 동굴에서 환한 빛과 같은 양명한 기운을 느끼게 될 것이라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음산한 기운이라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명상을 하는 동안 줄곧 이혼을 요구해 오는 그녀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녀가 이혼을 요구해 왔을 때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나는 10여 년에 걸쳐 소박한 삶으로 가족이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글을 써서 3권의 책으로 엮어 내기도 했다. 내 글을 읽은 독자들 중에는 글을 통해 보여준 우리 가족의 소박하고도 행복한 삶을 꿈꾸기도 했다.

그 쥐꼬리 같은 사회적 평판이 이혼을 앞두고 있는 나를 옴싹달싹 못하게 했던 것이다. 적게 벌어 적게 먹고 사는 소박한 삶에 대한 행복론은 결국 내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업이었고 감옥이었다. 그 삶이 업으로 작용해 나를 꼼짝 못하게 옥죌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인도 여행 중 두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그 고통에서 벗어났다고 여겼는데 착각이었다. 명상에 들어 그녀를 떠올렸다는 것은 그녀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여전히 고통스럽게 저 가슴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머나먼 이국 땅 인도, 그것도 낯설고 낯선 리왈샤의 동굴 속에 있었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한국에 머물러 있었다. 내가 앉은 자리에는 국경이 없었다. 지역과 시간과 공간이 하나로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그 어디든 도망갈 곳이 없었다. 저 태양처럼 죽음에 이르기 까지 그 음산한 분노심이 따라올 기세였다. 도무지 나를 놓아 주지 않을 것만 같았다.

동굴 밖으로 나와 바위산 주변에서 바람에 펄럭거리고 있는 수많은 룽타들을 맥 놓고 바라보았다. 바람에 나부끼는 룽타들의 펄럭거리는 소리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 고통 받고 있는 중생들의 아우성처럼 다가왔다. 그 소리는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고통의 소리이기도 했다.

동굴에서 돌아온 그날 밤 나는 엄청나게 내리치는 천둥번개의 공포 속에 잠들어 평생 잊지 못할 악몽을 꾸었다. 악귀를 물리친다는 파드마 삼바바의 수행터, 리왈샤에서 수행자들이 흔히 겪게 된다는 그 생생한 악몽은 분노에 사로잡혀 있던 나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바람에 나부끼는 룽타들의 펄럭거리는 소리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 고통 받고 있는 중생들의 아우성처럼 다가왔다.
 바람에 나부끼는 룽타들의 펄럭거리는 소리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 고통 받고 있는 중생들의 아우성처럼 다가왔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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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인도 리왈샤, #파드마 삼바바, #티베트 죽음의 서, #동굴 수행, #래미 알바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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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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